열 운 장지영(張志暎)
근대화의 격동기에 전통적인 한학 숭상의 집안에 태어난 열운 장지영은 18살 때, 강제 을사보호조약으로 말미암은 민영환의 우국 충정의 희생에 감동한 것이 동기가 되어 독립정신에 눈뜬다.
한성 외국어학교 한어과를 졸업하고(1906) 그 학교 부교관으로 일하면서 이 정신을 더하여 갔다. 그리하여, 당시 독립운동자들이 모이는 상동교회에 나가게 되고, 거기에서 신학문의 선구자요, 민족학문과 민족사상에 투철한 한힌샘 주시경을 만난다. 열운의 한 삶의 정신적이고 학문적인 길은 여기에서 결정된다. 열운은 한힌샘(주시경)의 문하에서 국어학을 연구하면서 더욱 근대과학의 지적 향상을 위하여 사립정리사본과(수리전문)를 졸업한다.
그리고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민족교육에 힘쓰다가 돌아와 상동청년 학원 강습소에서 교사 및 학감의 일을 보았으니, 이 일은 이 학원이 문을 닫을 때(1914)까지 계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열운은 한힌샘의 학문과 사상을 굳게 이어 받았다.
한힌샘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매, 열운은 스승이 맡아 교육하던 여러 학교 가운데, 경신학교를 맡아 스승의 학문과 교육을 이어서 심화시켰다. 이것은 민족 근대화 교육에의 중단없는 계승에 이바지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인도 '간디'의 무저항 자활운동에 충격을 받은 열운은 동지와 더불어 '물산장려회'(1912)를 만들어 국산품 애용에 열풍을 일으켰다. 또한 혈서동맹 비밀단체인 '흰얼모'를 만들어(1913), 3·1운동 때는 이 운동을 온 국민적인 격동으로 이끌기 위하여 포고문을 만들어 살포함으로써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장되는데 이바지했다.
한힌샘이 세상을 떠난 뒤, 열운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학회인 국어연구학회(→한글모)의 의사원으로 활동하고, 이 학회의 후신인 '조선어연구회'(1921)(→조선어학회→한글학회)를 창설함으로써, 유구한 문화민족의 긍지와 영원한 민족학술의 요람의 길을 열어 놓았다.
언론계로 활동무대를 옮긴(조선일보 기자 : 1926) 열운은, 예봉으로 친일세력을 비판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여러번 불려다녔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전과 4범이 되어 있었다. 열운은 조선일보의 문화부장이 되면서 '문맹퇴치운동'(1928 : 보나르드운동)을 앞장서 펼쳤다.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에 맞춤법통일안을 연재하여 훗날에 통일안 심의에 참고가 될 「조선어 철자법 강좌」(1930)를 출간했다.
또한, 열운은 민족해방을 위한 단일전선의 민족단체인 '신간회' 조직의 발기인이 되었고(1927), 그 상무간사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전 편찬의 기초작업으로, 맞춤법 통일과 표준말 선정이 선행되는 바, 열운은 당시 양정학교에 근무하면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자 열운은 1차로 붙잡혀 모진 수난을 겪었다.
해방 뒤에는 조선어학회의 재건을 위하여 이사장 일을 맡아 힘쓰고 '세종중등국어교사 양성소'를 인가받아 그 소장의 일을 봄으로써, 당시 질적·양적으로 절박한 국어교사의 빈자리를 메우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문교부 편수 부국장으로도 일을 보게 된 열운은 앞으로 나아갈 새나라 교육의 기초와 방향을 옳게 잡아 주기도 했다.
대학 강단에 서게 된(1948) 열운은 민족이 서로 싸우는 비극 속에서도 민족교육의 빈자리를 메웠고, 수복 뒤에도 대학과 대학원의 강의에서 학문적 진리와 민족정신을 전하여 줌에 심혈을 기울여, 후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성품이 대쪽같고 진지하고 결백하면서도 인정이 넘치는 열운은 자연미에 대한 관조 또한 생활화되었다. 이는 후학들에게 자연관과 인생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열운의 학문의 주요 업적은 말본(문법) 연구와 향가 및 이두 연구이다. 「조선어전」(1924)의 말본체계는 한힌샘 주시경의 분석체계를 이어 발전한 것이요, '향가'와 '이두' 연구는 20여 년의 연구 끝에 이루어낸 「이두사전」(1976)으로 집약되는 바, 이는 옛시대(고대) 국어학, 국사학, 옛시대 사회학, 그리고 법제사 연구의 길을 열어 놓았을 뿐 아니라, 민족 자주정신과 민본사상에 투철한 세종대왕이 고유문자를 창안한 동기를 규명해 준다는 점에서 그 학문적 업적이 역사적이다.
열운의 삶과 학문은 위대하다. 1964년에 받은 명예문학박사학위(연세대학교)는 학문의 업적의 상징이요, 1977년의 건국 포장(대통령)의 추서는 열운의 나라사랑의 참된 징표다. 열운은 1976년 3월 15일 오전 9시 90살로 한 삶을 마쳤으며, 한글학회 장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선유리에 안장되었다. 열운은 갔으나 그의 삶과 학문의 바탕을 이룬 나라사랑의 얼은 후학들에게 영원히 미치고, 그의 학문은 정통적인 국학의 맥을 이루어 길이 이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