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1998년 사진영상의 해. 사진영상의 해에 해야 할 일
사진예술의 수준을 높이는 획기적인 기회로 삼아야…
-한국사진협회를 중심으로
고영일 / 사진평론가
■성공적인 사진영상의 해를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제언
예술문화의 모든 부문이 해마다 번갈아 가면서 국가적이고 국민적인 행사를 벌여 왔는데 이번에는 1998년을 사진, 영상의 해로 맞이하게 된 것은, 우선은 사진의 자리를 다른 모든 예술 분야의 자리 매김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고자 하는 애씀의 결과로서 기뻐해야 할 일이고, 다음으로는 영상의 홍수 속에서 살게 된 현재와 그 영상의 디지털화로 말미암아 세계화될 21세기를 바로 앞둔 시점에서 우리 사진의 자화상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어서 다듬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다른 예술장르에 못지 않는 '사진영상의 해'가 되자는 몸부림을 뼈아프게 치러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의 소속단체가 '한국사진작가협회' 이기 때문에 그러한 위상에서 제언함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장이 '98년 사진영상의 해의 집행위원장인 만큼 더욱더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 첫째이자 마지막 부탁은 한국사진작가협회야 말로 이번 기회에 순수사진 Serious Photo을 위한 행사를 담당하는 사명감을 불태워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사진이 순수예술로의 길을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사협' 이라는 단체 운영의 제도가 갖는 예술 외적인 경직성 때문에 질적 향상에 대한 방향이 소홀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반성되어져야 할 두 가지 과제는, 사진은 단 한 장의 평면 tableau으로만 보여질 것이 아니라는 점과 사진의 미학적인 깊이를 모색해야 한다는 점인 것이다.
■'포토폴리오' 사진이라야
포토폴리오라는 포맷이어야 할 까닭인 사진행동을 시사하는 에피소드 하나를 든다.
'……지난 2월에 중풍을 맞아서 쓰러진 뒤 이제 다시는 사진활동을 하지 못하게 누운 채 겨우 반신을 움직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소. ……'
이것은 늙은(74세) 일본인 사진인과의 교분에서 받게 된 편지의 한 구절이다. 그가 쏟아온 사진작가로서의 정열을 아는 나로서는, 또 나 역시 고희를 넘은 나이이고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며칠을 위로의 답장에 골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누워 있는 곳의 머리맡 구석에 28mm 정도의 광각렌즈가 붙여진 카메라를 삼각대에 얹어 세워 놓고서 셔터릴리즈를 길게 매달아서 이불 속의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쪽의 손으로 작동시킬 수 있게만 해 놓으시오. 그리고는 당신의 눈에 비쳐지는 희로애락의 순간들을 찍어 놓으시오. 그러면(몇 해를 더 누워 있을지 몰라도) '죽기 전 한해 동안에 보고 느낀 것들' 이 길이 남을 것이오. 그렇게 보고 간 한 인간의 마지막 일 년은 얼마든지 '당신만의 경우' 가 아닐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누구나 겪기 마련인 죽음까지의 일념에의 실감이 오로지 그만의 것이라고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나의 답장의 핵심 부분인데 내가 그런 처지면 어쩔까 하는 데서 떠오른 제안이기도 하다.
물론 단 한 장의 사진으로는 다할 수 없는 표현이 되기 마련인 작업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예술의 한 장르로서 사진이 사회적인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 장의 사진으로 하는 감각적이고 표면적 비교만이 운위되는 까닭에 인간 감동에의 성찰이 모자랄 수밖에 없는 때문이고, 그런 사회적인 제도로서 콘테스트에 의한 단편적이고 기교적인 경쟁만이 사진작가에의 길이 되는 제도 때문이다. 거기에다 '사진작가'로 공인되어지는 일이 얼마만큼한 끊임없는 자기 연찬을 각오해야 하는 일인가 하는 예술혼까지도 사라져 버리는 풍조마저 풍미케 함에 있어서랴.
콘테스트 제도는 사진 취미의 경쟁욕을 높혀주는 데에는 크게 공헌했을지 몰라도 우리 사진계의 수준을 다른 나라와 동등하게 키우는 데는 기여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단 한 장을 가지고 표현을 다 하지 못하는 사진 틀 때문이며 끝내는 그런 제약을 스스로 택하는 폐단을 못 느끼고 있는 '한사협' 의 방향의 미비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부언하면 사진의 주체성-다른 예술 분야에 못지 않은 내용을 확립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연구와 사진인 자신에 대한 성찰이 모자란 때문이고 그런 폐단은 오로지 단장 짜리 사진으로 콘테스트 함으로써 사진 인구를 늘리고자 하는 방향설정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안해 내어진 것이 포토폴리오 형식에 의한 사진표현이었고 그나마 사진예술의 공인 단체인 '한사협' 에 의해서가 아니라 카메라메이커의 사업의 한 방도로서 공모케 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운영기업체의 예산삭감 때문에 단명에 그친 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한사협'이 '한 자의 사진으로는 못 다 할 이야기가 세상에는 분명히 더 많음'을 계몽하기 위해서라도 포토폴리오에 의한 사진표현을 지도하는 제도를 이번 기회에 확립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새로운 내용에의 이해
이와 같은 새로운 포맷에의 출범을 강조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사진 본래의 흐름이 내용으로 삼아지는 바탕에서 사업이 구상되어져야 할 것이다.
사진은 현실을 촬영하는 일임은 물론이다. 그렇게 150년 전에 시작된 사진이 이제 와서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현실이 되어 버릴 정도로 사진은 범람하게 되었고 그런 현실 속에 우리가 살게 되었음을 외면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진발명 초기의 것인 현실의 복제(複製) 에만 그치는 일은 한갓 소아병적인 폐단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진 자체가 또 하나의 현실로서 카메라 앞에 실재(實在)하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사진전시장에서 감히 바로 보기가 꺼려지는 것을 대하면서도 그것을 인정 안 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여태까지의 사진에서 보여진 도발, 충격, 박력 있는 현실과는 정반대적인 촬영자의 내면세계-속삭임, 중얼거림, 자기응시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진이라는 매체가 오늘날에 와서 살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일을 매개해 주는 자기 반성의 도구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진은 오늘날 세계 속의 일을 내가 보고하는 구실에서 출발해서 나라고 하는 세계 안의 성찰을 기술하는 필기도구이거나 화필이 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여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펜으로 적은 문학이나 붓으로 그리는 그림과 맞먹는 지위가 확보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사진은 비로소 창조행위의 한갓 과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게 되며 오늘날 우리의 모든 장르의 예술행동들이 현실을 시뮬러클simulacle화 (模擬像化)하는데 에 까지 이르고 있는 만큼 사진도 여태까지의 주제를 버리기보다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도록 하는 해석의 자유가 구사되어져야 할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이른바 풍경사진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풍경이라는 현실을 복사해 내는 일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걸음마 정도에 속하는 예술 수준이라고 할 것이고 엄연한 현실로서의 사진에 휩싸이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일부러 외면하는 소아병적인 자기방어, 자기만족의 껍질 속에 숨는 태도라 할 것이다. 거기서 추구되어지는 미는 우리의 실존과는 깊은 상관의 것이 아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지난 2∼3월에 있었던 요꼬하마미술관에서의 전시회를 보면서 우리 '한국사협' 이 골라내는 풍경사진을 상기하면서 일어난 생각이다.
그 전시회는 '잃어버려진 풍경-환상과 현실의 경계 Absolute Landscape-Between Illusion and Reality' 라는 테마를 내걸고서 '사람은 누구나 살고 있는 동안에 온갖 풍경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기억 속에서 강렬하게 남아서 언제까지나 리얼리티를 띠기도 하고 마치 꿈속의 한 장면과 같을 경우도 있다. 그리고는 기억속의 이미지에 휩쓸려 버리고는 눈앞의 광경이 오히려 환상처럼 보이는 일마저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면서 무수의 풍경과 만난다. 그래서 생기는 자문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의 풍경이란 과연 무엇이냐?' 그런 문제이다. 라는 관점에서 세계 각국에서 16인의 사진작가에 의한 95점의 사진작품 전시회였다.
풍경사진을 놓고서 보는 생각의 차이를 생각케 된 것인데 그 16인의 각각 다른 시각을 낱낱히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나의 가장 개인적인 느낌을 사진이라는 연장을 가지고 발견하는 곳에서부터 사진인의 창작활동은 시작된다'는 상식이 소중히 여겨짐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끝내는 표현방법은 버리자고 했고 가장 개인적인 느낌으로 창작은 출발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바처럼 '사진영상의 해'에 어떤 행사를 전개할 것인가를 행사의 종류를 나열하기에 '한국사진작가협회'로서는 스스로 사진예술의 수준을 높이는 획기적인 기회로 삼는 자세가 필요하겠기에 굳이 포맷과 내용을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런 탈바꿈 없이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관변단체로 하여금 작가 곧 예술가를 공인케 하는 제도의 핵심체다움이 이런 대외적이고 세계 사진계의 주목을 받는 행사로 말미암아 되려 퇴색해 보여지기 쉽기 때문이다.
우선 '한사협' 이 연중행사-공모전, 촬영대회. 사진학술강좌를 더욱 성대하게 치뤄내야할 것이다. 촬영대회는 아마추어의 기교의 연습장이라고 치고, 공모전을 포토폴리오로 하는 것은 사진을 대하는 자세의 시금석이자 새 경험으로 삼게 하는 기회로 삼게 해야 할 것이다. 단지 그 행사가 여태까지의 공모전과는 다르게 중앙에 마련된 공정한 심사기관에 심사를 일괄 위촉함으로써 새 포맷에의 해석도 바로 세우고 전국적으로 평준화된 수준 제고도 꾀하는 방법이 채택되어져야 할 것이다. 사협의 전 회원이 새로이 학술강좌를 의무적으로 받되 사진에 대한 새로운 개안을 꾀하는 커리큘럼도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상은 '사진작가'로 공인 받는 일에 대한 자성과 분발의 해가 되고자 하는 데에 뜻이 두어져야겠다는 생각에서의 제언이다.
■여러 가지 행사들
제1회 서울국제사진비엔날레를 열 수 있었으면 한다. 이웃 일본도 공공예산을 들여서 동경도사진미술관을 창설하면서 비엔날레를 공모에 의해서 밖에 열지 못했다. 상금을 걸고 경쟁적인 출품을 유도하고 심사하는 공모라는 자세는 온전한 예술적인 접근법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그 대신 구미의 권위자를 심사에 초빙했음) 것은 아직 세계의 유수의 사진 비엔날레에 끼어들지 못했으므로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런 비엔날레에의 구상을 집행부에 묻고 싶다.
또 파리의 '사진월간' 행사 때처럼 시내의 모든 화랑과 전시장으로 하여금 각각 독자적인 기획에 의한 사진전을 열고 할 수는 없을까. 보여 줄만한 사진을 모으기가 힘들 것이다.
적어도 뜻 있는 테마를 내걸어서 - 센세이셔널한 문제로 세계적인 관심을 끌만한 범위의 작가들의 초대전쯤은 한번 국민들과 사진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국내적으로 볼 때에는, 전국의 구석구석에서 그나마 자기 세계에 정진하는 사진인들이 있을 것인즉 이들에게 조명이 비춰지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도 뜻이 있겠고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외국 사진계에 초청 받은 일이 있는 작가들을 한데 모아보는 일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각 고을을 단위로 향토색 짙은 사진을 집대성해 보고, 그러면서 지방색을 비교해 봄으로써 고을마다의 사진인들이 함께 호흡하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도 이 해에 있음직한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