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국악

수확의 계절, 공연장 가득 메운 신비의 소리

-'97 세계피리 축제, '97 피리역사축제




박성희 / 부산대 강사

■ 실크로드가 보이는 피리소리 - 세계피리축제

지난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4일간에 걸친 피리축제는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개최된 것이었고, '비단길을 타고오는 낭만의 선율 환상의 소리'라는 부제로 보아 알 수 있듯이 실크로드와 연관된 나라들의 음악가들이 각기 관악기로 만들어진 음악을 소개하고 연주하는 장이었다. 터어키, 중국,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몽골, 한국의 전통곡과 창작곡이 매일 적절하게 배치되어 연주되었는데, 한국의 경우엔 정재국의 피리독주, 김찬섭의 민요모음, 김응서의 대금 청성곡과 김석출의 태평소 시나위, 박찬범의 풀피리 연주 등 다채로운 관악기곡을 들을 수 있게 구성되었다.

작년의 경우 공연, 워크샵, 리사이틀, 경연의 형식인데 비해 이번 공연은 보다 구체적으로 공연을 위주로 워크숍을 곁들인 형식으로 짜여졌으며 개막식전 행사에 국악기 제작과정 실연회와 풍물마당이 곁들여졌다. 지난해에 비해 보다 구성력은 있었지만 보여주기 위한 공연에 치우쳤고 행사위주로 한 건 치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왜일까?

피리에 관한 기원설로 「삼국유사」에는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에 작은 산이 있어 그 모양이 거북머리와 같고 그 위에는 대(竹)가 있는데, 낮이면 둘이 되고 밤이면 하나로 합해졌다. 임금이 이것을 베어오게 하여 적(笛)을 만들고 이름을 만파식(萬波息)이라 하였다. 이러한 만파식적은 왜적을 물리치고, 병을 없앤다는 신기(神器)로 보관되었다'라는 기록도 전한다. 이렇듯 악기를 단순히 소리만 내는 도구가 아닌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는 자연의 일부로 보았다.

국악기의 대부분이 자연의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움직이게 하는 데 적기(適器)이다. 특히, 피리류의 관악기는 공기를 울림으로써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음역이 높은 소리는 신비한 느낌, 애절한 느낌이 들기도 하며 힘있게 불면 장엄하고 꿋꿋한 느낌이 나며 낮은 음역의 소리는 가슴을 적시게 하는 묘한 힘을 가졌다.

그래서, 피리류를 신적(神笛)이라고도 하였나 보다.

터어키의 대표적 관악기 '네이' 몽골의 '비쉬그르' 등과 중국의 고대부터 동물뼈로 만든 관악기인 '골초', 악기 여주와 동시에 연주자의 목소리가 함께 울리는 카자흐스탄의 '스뷔즈리', 우즈베키스탄의 민속관악기인 '수르나이' 등의 각국 관악기와 우리의 대금, 피리, 태평소와 잊혀져가고 있는 풀피리 등이 선보였다. 특히 몽골의 민요연주 후에는 우리의 아리랑이 그들의 관악기로 울려 나왔다. 음악의 국제교류 한편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카자흐스탄의 연주자가 연주를 했을 때 피리의 울림을 감상 할만 하면 연주내내 비춰졌던 화려한 야광빔 조명과 드라이아이스, 물방울 거품 등의 배경으로 어느 부분에서는 눈을 감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효과가 과연 연주를 얼마나 돋보이게 하는지 의문이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커다란 액정화면은 연주자의 연주모습, 손놀림 등과 악기를 자세히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나라를 소개하며 연주곡목을 소개하는 등 사전준비된 설명 또한 그 민족악기와 음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세트였다.

삼일간의 공연을 합쳐 사일 동안의 '세계피리축제'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조용히 끝났다. 피리라는 관악기를 통한 각국의 전통음악과 미의 교류, 예술가의 교류 등 국제화와 문화교류의 물꼬를 트는 행사로 자리 잡으려면 보다 많은 의견수렴과 준비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축제'의 이름에 맞는 다채로운 프로그램 즉, 각 나라의 피리에 관한 설화나 역사 등의 정보, 각 나라의 악기와 악보진열 등이 함께 했었다면 피리축제를 더 빛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전문적 음악감독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준 공연이었다.

■ 한눈에 보이는 현대 피리작품세계 - 피리역사축제

'97 피리역사축제'는 지난 5월에 개최되었던 '가야금역사축제'에 이어 국립국악원이 기획한 창작곡 시리즈 연주회이다. 지난 10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삼일에 걸쳐서 공연되어진 현대 피리작품 세계는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되어진 피리창작곡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발전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무대로써 좀더 많은 일반인들이 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가야금,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에 비해 관악기는 대중성이 약한 탓도 있었겠지만 '세계피리축제'의 홍보에 묻혀서인지 가족잔치 분위기를 씻을 수 없었다.

연주된 곡목들로는 첫째날에 김기수 작곡의 「다스름」(정재국 연주), 황병기 작곡의 「풍요」(강영근 여주), 김용진 작곡의 「환(幻)」(황규남 연주), 이강덕 작곡의 「황토재」(문정일 연주), 김흥교 작곡의 「피리와 장구를 위한 수상」(김정집 연주), 이상규 작곡의 「청산」(박인기 연주)이었다.

첫째날에 연주된 곡들중 「다스름」과 「청산」은 1970년대의 초기 작품 경향을 볼 수 있듯이 전통곡의 음계와 장단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곡이었고, 「황토재」는 세피리, 당피리, 향피리의 음색과 음역을 이용하여 여름철 농촌의 풍경(녹음, 소나기, 황토재)을 각각 표현하였다. 첫째날에 연주된 곡들이 1970년대의 대표적 피리곡이며 피리곡 전부라고도 할 수 있겠다(이성천, 신홍균 등의 몇 곡을 제외한). 또한 「풍요」는 해금독주 및 피리독주를 위한 곡으로 작곡되어진 곡이며, 안정된 모습으로 「청산」을 연주한 박인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주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둘째날은 이상규 작곡의 「해동청성」(곽태규 연주), 이해식 작곡의 「춤피리」(강호중 연주), 김영동 작곡의 「영혼의 피리소리」(이종대 연주), 박일훈 작곡의 「피리를 위한 협율」(김근섭 연주), 원한기 작곡의 「농(弄)」(사재성 연주), 이성천 작곡의 「풀피리」(김현주 연주), 김광복 작곡의 「피리 독주를 위한 잽이의 소리」(김광복 연주)가 연주되었다.

해석학에서는 악보를 떠난 무대에서의 음악연주 자체도 창작행위에 포함된다고 보기 때문에 연주자의 작품해석은 또 하나의 창작품을 만들어내는 결과이다. 「춤피리」의 악보는 보지 못했지만 강호중의 연주는 배음(倍音)과 다성음악 Multiphony의 주법을 자유자재로 표현해 냈고, '피리역사축제'의 유일한 여성독주자인 김현주는 「풀피리」를 차분하게 그려내었다. 주된 선율을 이끌어가고 있는 피리는 연주기법상 호흡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수제천과 같은 국악합주곡에서는 피리가 쉬는 동안 대금, 해금 등의 악기가 그 다음 선율을 이어서 연주를 하여 선율이 끊기지는 않게 진행을 하는데, 독주곡으로서의 피리연주는 쉼없이 연주를 하기 때문에 호흡의 쉼 사이 여음을 장고 장단이나 그 밖의 반주악기가 처리를 해야 한다. 「춤피리」의 장고는 음정을 변화시키는 주법을 사용하였고 「영혼의 피리소리」에서 징과 북의 역할은 피리 음색의 변화에 맞추어 저음부를 담당하였다. 선율의 정서면에서 「춤피리」가 시도적이고 예술적이라면 「영혼의 피리소리」는 대중적이라 할 수 있었고, 두 곡의 연주자 또한 고난도의 주법 시도를 힘있게 잘 소화해 내어 연주를 빛내 주었다. 또한 연주자 자신이 작곡한 「피리독주를 위한 잽이의 소리」는 즉흥성을 바탕으로 하여 연주자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 낸 곡으로 연주자 김광복만의 곡이다 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세째날은 전인평 작곡의 「고구려를 위하여」(국립국악원 연주), 김영재 작곡의 「피리합주곡 1번」(피리연구회 연주), 박범훈 작곡의 「춤을 위한 메나리」(국립국악관현악단 연주), 이강덕 작곡의 「환상적 조우」(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연주), 이인원 작곡의 「피리와 타악을 위한 협주곡 - 윤회」(KBS국악관현악단 연주), 이해식 작곡의 「춤을 위한 축제피리」(경기도립국악단 연주)가 연주되었는데 곡들 모두 초연(初演)이라는 의의 외에도 좀처럼 모이기 힘든 여섯 단체의 피리주자들 46명, 반주자 27명이 참여하는 그야말로 '피리판'이 아닐 수 없었다.

각 단체의 피리주자들 연주를 함께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초연곡이라는 흥분감을 갖고 감상하였는데, 창작곡 모두 피리 음역의 보완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한 곡들이었다. 즉, 낮은 음역에는 개량된 대피리를 사용한다든가 높은 음역에는 태평소 또는 새로운 주법의 개발 등을 이용하여 피리 음역을 확대하여 단선율에서 화성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피리음악의 질적인 발전을 위한 바탕이 되리라고 기대해 본다.

삼일 동안 연주되었던 '피리역사축제'는 지난 '가야금역사축제' 때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축제를 매개로 하는 작품곡 테이프 판매, 작품악보집(저작권 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겠지만), 피리역사에 해당되는 책자나 정보지 등의 부대상황이 함께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제까지의 창작곡 흐름과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눈을 볼 수 있게 하였고, 피리계 대표연주자들의 연주를 함께 들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획이란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지속적인 악기별 역사축제가 기대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