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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수집가를
찾아서 - 악기우표수집가 김영운
이선실·르포라이터
공식적인 통계자료나 지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표수집은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취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유럽에서는 10명당 3명이 우표를 수집하고 있으며, 우표수집이 ‘취미의 왕’ 혹은 ‘왕의 취미’라고 일컬어진다고 한다. 작년에는 중국 대륙에 우표수집의 이상 열풍이 일고 있다는 외신 기사가 소개되기도 했었다. 우리나라에도 우표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40여만 명으로 추측된다고 하니, 과연 세계적인 취미의 왕이라고 할 만하다. 우표수집이 이렇게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우표가 지니고 있는 재산적 가치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록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우표는, 1856년 영국령 가이애나에서 발행된 1센트짜리 우표로, 1차대전 후 경매에서 3만 2천 5백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일단 우표가 발행되면, 후대에 갈수록 더욱 큰 재산가치를 갖게 되니, 사람들이 우표수집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표수집을 반드시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우표는 한 시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시대물이기 때문이다. 우표의 작은 지면에는 세계 각국의 독특한 정치, 경제, 문화, 풍습들이 들어있다. 그래서 어쩌면 우표는, 세계의 역사나 한 민족을 이해할 수 있는 창구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문화연구원의 김영운 교수는 우표의 이러한 문화적 가치를 수집하고 있는 이색수집가이다. 세계의 악기 우표를 수집하고 있는 김영운 씨의 콜렉션은 현재, 100여 개 국 800여 점… 음악관련 우표를 포함해도 한 2천여 점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우취인(우표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의 소장품이 수십만 장에 이르는 현실이고 보면, 김영운 씨를 우표수집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 역시 자신이 우표수집가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래서 재산가치도 별반 없는 악기 우표만을 고집하는 독특한 수집가다. 김영운 씨가 처음 우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당시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그의 누나는 영어 공부 삼아 외국인과 펜팔을 했는데, 편지만 주고 받은 것이 아니라 우표 수집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색의 봉투에 붙은 우표를 떼어 신문지에 뒤집어 말린 다음 빨간 우표첩에 정성스레 정리를 하는 누나의 모습… 어린 동생에게는 그런 누나가 필시 동경의 대상이었으리라. 김영운 씨는 그런 누나의 취미를 모방해서, 국내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누나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의 우표수집은 획기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누나가 정성스레 모았던 빨간 우표책을 통째로 김영운 씨에게 물려 주었던 것… 그 앨범에 꽂힌 우표는 독일과 미국의 우표가 주를 이루었고, 모두 도장이 찍힌 것이었다. 김영운 씨는 누나의 수집품을 얻으면서, 우표수집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는 집으로 오는 우편물에서 도장 찍힌 우표를 물에 불려 떼어 말리는, 아마츄어 수준의 수집이었다. 1차적인 우표수집의 취미가 보다 전문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 다니던 중학 시절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영자로 표기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독일우표에 그려진 인물 옆에 씌여진 ‘베토벤’이니 ‘바하’같은 음악가들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전공이 음악이다 보니, 자연 이들 우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우표첩 정리방식이 달라졌다. 단 한권 뿐인 우표첩에 음악관련 우표는 앞에서부터 정리하고, 다른 우표들은 뒤쪽으로 몰아서 꽂기 시작한 것. 우표 정리방식을 바꾼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우표수집 취미는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 동네 고서점에서 몇 개의 ‘정재무도홀기(呈才舞蹈笏記)’를 발견하게 되자 그것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 그는 몇 번이나 서점을 들락거리다가 마침 우표상을 겸하고 있던 고서점의 주인과 협상이 되어 ‘정재무도홀기’와 우표를 바꾸고 말았다. 물론 음악이나 악기 관련 우표는 따로 빼놓았지만…. v 그러나 그 사건 이후, 그는 우표에 더욱 연연하게 된 것 같다. 다시 시작된 우표수집은 ‘제네럴 콜렉션(Geeral collection)’의 차원을 뛰어 넘어 ‘몽땅 모으기’의 방식을 채택한다. 앨범은 대륙별, 국가별로 정리되었고, 수집 방법은 얻기, 바꾸기, 사기, 훔치기(?)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수집벽이 바뀐 것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부터이다. 전문적인 우취관련 연구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표수집’은 유아기적 취미라는 선입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무작정 모으던 수집에서 벗어나 음악우표만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악기우표였는데, 그것은 전공과 관련된 정보를 이들 우표에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해외관련 비디오도 많고 인터넷도 활성화 되어, 세계의 민속 악기들에 관한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지만, 20여 년 전에는 기껏해야 악기 사전 정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그런 사전은 대략적인 설명만을 소개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림이 누락된 것도 많았고, 사진이 있어도 흑백으로서 판별이 어려웠기 때문에, 악기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것. 그런 현실에서 우표는 악기에 대한 자료의 보고였다. 사전에서도 찾기 힘든 세계 각국의 민속 악기가 총천연색으로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연주 방법까지 그려진 우표들도 있었다. 이러한 우표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그의 우표수집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제 우표수집은 취미가 아니라 연구자료의 수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v 그러나 음악관련 우표를 수집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소재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서울의 우표상은 대부분 들렸고, 지방 출장 때도 그 지방의 우표상은 반드시 들렸다. 몇만 점의 우표를 취급하는 우표상에서, 음악관련 우표를 찾는 일은, 약간 과장을 곁들인다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에 비유될 수 있으리라. 음악적 지식이 없는 우표상들은 생활 도구나 인물 사진을 악기나 음악가 우표라고 내미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음악우표의 수집은 전적으로 그의 노력의 성과였던 셈으로, 그는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몇 시간 동안 뒤적거려 겨우 한두 장의 우표라도 구하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우표수집은 돈과 약간의 열성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이지만, 그에게는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아주 특별한 일’이었던 것. 그의 이런 ‘아주 특별한 일’은 더욱더 특별하게 되는데, 언제부터인가 우표수집의 범위를 더욱 축소하여, 음악우표 중에서도 각 나라의 ‘민속악기’가 도안된 우표만을 수집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이들 우표를 통해 악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다. 그는 악기우표를 통해, 음악의 도구인 악기가 문화권과 민족에 따라 조금씩 모양과 활용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도 그의 기억에 남는 것은, 야트가라는 악기이다. 몽고의 우표에서 가야금과 똑같이 생긴 악기를 발견한 그는, 문헌을 통해 그것이 1950년대 북한에서 수입된 악기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 편경이 세계 유일의 돌로 만든 악기라는 상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베트남 우표를 통해서였다. 이밖에도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처럼 문화적으로 소개가 덜 된 지역의 악기들도, 대부분 우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악기우표는 새로운 지식만 제공한 것은 아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거문고를 전공했던 그는, 무대악기만 악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표수집을 통해, 민속 악기도 악기라는 인식의 일대 전환을 이루게 된 것. 이러한 악기에 대한 열린 시각은, 1988년에 발표된 「한국 토속악기의 악기론적 연구」라는 논문에도 반영이 된다. 취미가 학문적 업적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v 대부분 수집이라는 취미는 소장품에 대한 확대의 욕구를 내재하고 있다. 김영운 씨도 이 점을 인정한다. 이왕이면 자신의 수집품이 보다 완전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김영운 씨의 특별한 점은, 그가 수집에 있어서 양적확대보다는 질적확대를 꾀해 왔다는 점에 있다. 다른 사람의 우표수집관에서 보면, 그의 수집은 일면 이해하기 어렵다. 소 재면에서도, 경제원칙면에서도 여느 수집가와는 반대의 길을 걸어왔으므로… 하지만 그의 우표수집이 매니어들에 비해 유아기적이라든지, 아마츄어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의 우표수집은 처음 취미로 시작되었지만 전공과 맞물려 학문적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그 또한 단순한 지식의 제공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인식 확대의 계기로 점점 발전해 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용운 씨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성공한 수집가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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