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영화 
감독과 관객의 힘겨루기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
 
정성일·KINO 편집장
 

프랑스의 철학자 질 플뢰즈는 점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것은 그들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이 버려져 있는 장소들 사이에서 길을 만들고 공간들은 구역을 정하고 그 사이에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형태로서의 지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우리들은 삶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리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살아가는 장소를 명명하고, 그 위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 이름아래 살아가는 공간적 존재론의 뫼비우스적 환원은 모든 우리들의 문화 속에 스며들어오고 있다. 그 속에서 영화는 또 하나의 가상-지도그리기virtual mapping의 실천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은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영화이다. 또는 그의 의도는 아니라 할 지라도 그 자신도 모르게 우리들의 동시대성을 다루면서 그 사이로 끌려들어오고 있다. 

이것은 재미있는 관찰이다. 한국영화의 대부분이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시간을 다투고 있는 동안 그 반대로 공간에로 관심을 돌리면서 홍상수는 자신도 모르게(또는 의식적으로) 동시대성을 확보한 것이다. 임권택은 「창/노는 계집」을 만들면서 여전히 시간의 변모에 관심을 기울인다. 장선우는 「나쁜 영화」에서 나쁜 ‘아이들’과 홈 리스의 ‘늙은이’들 사이를 끊임없이 구조적으로(또는 말 그대로 도식적으로) 비교하면서 두개의 삶 사이의 시간적 원근의 감상주의에 사로잡힌다. 박광수는 점점 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가 70년대의 두개의 시간 사이의 고리를 만들어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후 3년만에 새로이 준비하는 「이재수의 난」(가제)이 일백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스스로 은둔하는 것처럼 만들고 있는 배용균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이 어둠 속의 알레고리를 만들어내며 머무는 장소도 여전히 멈추어 선 시간이다. 그들로 부터 홍상수는 아주 다른 곳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홍상수에게서 공간적인 것이 그의 사유 속에서 완전한 바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가 만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제목이 만들어 내는 오해만 아니라면 훨씬 더 자유로운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는 영화이다. 서로 한자리에서 결코 만나지 않으면서 서로의 관계가 얽혀있는 다섯명의 남자와 여자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여기서 정말 주인공은 이들의 동선이 만들어 내는 상상 속의 지도이다. (아마도 서울의) 구석구석 거리를 맴돌며 만들어 내는 거리와 그 사이에서 한없이 반복되고 있는 동일한 풍경은 이 영화를 일종의 미로로 만들고 있다. 그 미로는 다섯명의 등장인물로 하여금 한 장소를 맴도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도시의 풍경이 그들의 마음이 되어가는 일상성의 침투이다. 이들을 망가트려 가는 것은 그들 사이의 인간관계라기 보다는 이들이 살고 있는 도시 그 자체의 정서이다. 서구 근대성의 풍경은 아시아의 우리에게 밀려 들어오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삶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섯사람 사이에서 유추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것은 위기의 관계이며, 동시에 그들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공간 속에서 동시적으로 정의하는 내재성의 장 내부의 구속관계이다. 그 중 누구하나도 이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는 벗어나는 순간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서로의 의지관계를 상실하고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러나 「강원도의 힘」은 그의 이전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연장선이자 동시에 그로부터 스스로 단절하고 있다. 홍상수는 무슨 까닭인지 그 스스로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공간을 부정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도시를 벗어나 강원도로 떠난다. 실제로 이 영화는 스스로 하는 이야기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둘로 나눈 다음 서로에게 아귀가 맞는 부분들만을 남겨놓고 이리저리 잘라낸 이야기는 그 스스로의 힘으로는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한다. 전적으로 그 스스로의 이야기에 배제되어 있는 부분들의 부재들의 상상적인 사건(또는 행위들)을 통해서만 거기 머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내내 그것을 채우는 일에 우리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거의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또는 좀더 정확하게는 심지어 뒷걸음 치면서 이 영화의 절반이 끝나고 난 다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처음은 이미 절반이고 절반이 지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 영화는 처음이다. 그러니까 점들을 통해 선을 만들었던 홍상수는 이번에는 그 선들을 다시 점으로 나누고 있다. 그래서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간 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저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지리학의 영화를 만들어 낸 홍상수가 그저 기하학적인 공간 사이의 곡예를 시도하는 것은 그 스스로를 함정에 밀어넣는 것처럼 보인다. 

「강원도의 힘」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는 스스로로 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만들어 내는 지리학적 공간으로 부터 그것을 스스로 무시하고 새로 만들어 내려는 관계이다. 어쩌면 「강원도의 힘」은 그의 첫번째 영화와 너무 닮아 있으면서도 그 정반대에 위치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그가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그를 옭아매는 듯한 그 힘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제목은 「강원도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단계에서 스스로 그 영어제목을 「Under the Influence of the Province」로 정했다가 영화를 완성한 다음에는 정말로(외국인에게는 그 지리적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 어려운 직역에 가까운) 「The Power of Kawang-Won Province」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중심에 놓여져 있는 것은 그 알 수 없는 힘과 강원도의 거리이다. 그는 그 사이에서 힘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의지가 있다. 두번째는 그 반대로 탈출하려는 것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도시를 통해 만들어 내려는 그의 새로운 지도작성법을 통해서 그 스스로 새로운 지명을 기입하고 그 의미를 찾는 대신 익명적인 도시로 부터 벗어나 매우 구체적인 지명을 지닌 낯선 지방으로 가서 그곳으로 부터 돌아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더이상 도시에 대한 사유는 없다. 그저 거기서 그 모두가 그 모두로 부터 타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심지어 두명의 주인공은 서로에게 타자가 되어가고, 이야기마저 서로를 돌아보며 낯설어하고, 그들을 감독은 낯선 시선으로 돌아본다. 마지막 장면이 모호한 것은 그것이 여백의 의미여서가 아니라, 사실은 감독 자신도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도주가 있다. 

그 두가지 방향의 속도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세번째 영화에서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벌써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기다림인가, 그 기다림의 시간만큼 우리는 그의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볼 것이며, 동시에 그는 관객의 힘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시한번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잔인한 행복이다. 그 힘이 다할 때 우리들에게서 홍상수의 영향은 힘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를 창조하고 그것을 보는 것은 힘의 겨루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나의 마지막 질문. 강원도에는 정말 힘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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