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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리뷰 - 연극
김미혜·연극평론가, 한양대교수
5월부터 시작되어 6월 중순까지 ‘사랑의 연극제’ 기간이다. ‘연극 영화의 해’였던 1991년에 시작된 이 제도는 문예진흥원의 후원으로 관객들이 평소보다 저렴한 입장료로 관극을 할 수 있는, 말하자면 보다 넓은 층의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지속적인 시도이다. 그런 관계로 문제성있는 신작이나 거창한 이벤트보다는 이미 공연된 작품들, 가벼운 터치의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는 것이 그 경향이며 그 이유가 나름대로 설득력도 있다. 30여편이 공연되고 있는 올해도 이런 경향은 여전하다. 그 중 ‘이강백 연극제’의 작품들이 그나마 관심을 끌지만 과거 작품들의 재공연인 경우 연출의 현재적 해석과 새로운 접근이 발견되지 않으면 그 의의는 크게 줄어든다. 또한 배우들이 주축이 되어 모였다는 새로운 극단 ‘연극세상’의 「좋은 녀석들」도 관심을 끌 소지는 있지만 이 작품은 이만희의 「우린 암스테르담으로 간다」의 개작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태석의 신작 「千年의 囚人」은 오태석이 한국 연극에서 갖는 위상 때문에라도 이번 연극제 기간 동안 가장 관심을 모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千年의 囚人」은 동숭아트센터가 지난 해부터 「나, 김수임」을 필두로 기획하고 있는 ‘한국현대사 재조명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기획 의도와 오태석의 ‘우리 역사 읽기’가 맞아 떨어진 셈이고, 오태석으로서는 제작의 부담에서 벗어나 극작가이자 연출가로서만 보다 자유롭게 (중견배우들인 이호재와 전무송과 함께) 목화 사단과 작업하면서 그 동안의 관심사를 지속시키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千年의 囚人」은 백범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오태석은 단순하지 않다. 등장인물에 ‘老테러리스트’로 소개되지만 스스로 “이 나라의 초석을 깨뜨려버린 불한당 망나니”임을 자인하면서 “불사조”라 자칭하고 있는 안두희만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의 진압군으로서 뇌를 다친 국군 장병 장용구와 52년 지리산에서 체포된 후 80세가 넘도록 복역 중인 비전향복역수(非轉向服役囚)가 안두희와 평행을 이루며 등장한다. 이 등장인물들의 배치 만으로도 이 작품이 임시정부수립, 광주의거, 분단문제 등 우리의 현대사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헌데 이들은 모두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의 병실에 있다. 즉 감옥 밖에 있으나 ‘갇힌 자들’인 것이다. v오태석은 특유의 역사관과 논리를 펴기 위해 몇 가지 극적 장치와 소품을 이용한다. 극은 전체적으로 안두희가 꾸는 꿈이라는 틀거리를 가진다. 사실 현대연극에서 ‘꿈’의 모티브는 매우 광범하고 중요하게 이용된다. 왜냐하면 꿈은 발설되는 언어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비합리적인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고 극에서 비논리의 논리를 전개시킬 수 있는 테크닉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千年의 囚人」의 내용이 전부 꿈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꿈과 극적 현실이 교묘히 엮어져있다. 이 극에서의 꿈은 역사의 죄인인 안두희의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야말로 자신의 역사관을 가시화하는 극을 엮기 위한 오태석식 극적 장치로서 기능한다. 극중 장소는 이미 언급한 대로 시종 정신병원의 병실이고, 소품으로는 멈춰버린 시계가 등장한다. 이 시계는 윤봉길 의사가 일본 천황의 생신 기념식이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도시락폭탄을 던지러 가기 전 백범선생에게 주었다는 물건이다. 정신병원과 시간이 멈춰버린 시계 - 매우 진부한 모티브이다. 어찌되었든 오태석이 이용한 극적 트릭과 소품은 정상적인, 아니 상식적인 역사의 해석이나 메시지를 애초부터 차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연극의 공공성을 생각해 보면 위태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오태석의 역사관과 그 메시지는 무엇인가? 또 그것은 일반 관객들이 갖고 있는 역사 인식과 과연 가깝게 맞닿아 있는가,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어 비뚜로 보기를 통한 바로 보기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이 이 공연 관극의 관건이 된다. 극은 진짜 현실과 일치되는, 안두희의 타살을 알리는 어나운스먼트로 시작되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안두희(이 호재 분)의 악몽으로 시작되어 병실에 사식 보따리를 들고 찾아 온 부인(김남숙 분) 및 아들(손병호 분)과 미국 이민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사이에 안두희의 재판과정, 백범(조상건 분)을 저격한 당위성에 대한 그의 항변 -“오로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방아쇠를 당겼어요.”-, 또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 즉 5·16, 유신 헌법,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의 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주의거, 윤봉길 의사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한 언급 등이 꿈속으로 처리된다. 비논리적인 꿈의 속성상 역사적 사건들은 꼭 연대기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시계란 소품이 꿈과 극적 현실을, 안두희와 병사 장용구(이명호 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조사단이 도착하여 안두희와 병사를 심문한다. 심문 과정에서 안두희는 자신과 안중근 의사를 동일시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승만, 신성모를 비롯한 발포명령자들이 국립묘지에 묻혀있으므로 자신도 죽으면 그들 곁에 누워야 한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광주에서 발포하여 여학생을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장용구는 군번 이외에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다고 복창할 뿐이다. 또한 늦으막히 등장한 비전향복역수(전무송 분)는 과거 김일성 지령 하 백범 암살조의 조장이었음을 밝힌다. 이 북한 출신 인사는 미전향의 이유를 일제 때의 창씨개명 거부와 동일선상에서 설명한다. 두 번째 부분은 극적 현실로 시종일관한다. 내용의 진전은 없고 역사의 책임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된다. 거론이 아니라 실은 병사 장용구의 발작, 안두희와 아들 국보 사이의 입씨름, 병사에게 발포 책임자를 묻는 의사의 심문, 조사단의 안두희에 대한 미국 이민행 시도 추궁 등을 통해 불행했던 역사적 사건들의 책임자가 과연 누구였는지 지그재그로 질문된다. 이들은 하필 자신들이 역사의 죄인이 된 것을 원망하기도 하고 인정하기도 한다. “안두희 - 너는 진정 역사를 어지럽힌 큰죄인이다...대한민국의 모든 추악과 불행의 단초가 된 장본인이요.”라고 안두희는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가 입성하기만 하면 남북간에 혼란도 사라지리라고 확신하고 백범을 쏜” 자신의 실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책임을 지라는 아들에게 상부의 명령 수행자로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백범을 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외친다. 그러나 평생을 그늘 속에서, 죄인의 식구로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며 마치 이기붕의 아들 강석처럼 혈족들을 죽이고 자살하려 하는 안두희 아들의 항변과 “왜 나야. 내 친구들 포도 위로 저러고 바쁘게 걸어가는데 왜 나만 죽어야 돼. 불공평해 - 아 하나님, 이건 불공정거랩니다. 나 스물 두 살 사개월 짜리요.”라고 외치는 병사의 외침은 오태석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그는 인물들의 항변을 통해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게 하기 보다는 그들도 역사의 희생자임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또 안두희의 꿈으로 시작된다. 이 꿈 속에서 안두희의 부인과 아들은 신세계 미국에 있다. 이내 꿈은 극적 현실로 바뀌고 다시 등장한 비전향복역수와 老테러리스트 안두희는 어린 병사의 구명을 위한 탄원서를 작성하면서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젊은 병사는 두 사람이 모르는 사이 자객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또 한 번의 테러리즘).- 복어국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극은 끝난다. 이 부분에서 강변되는 것은 어린 병사의(실은 오태석의) 역사관이다 -“어느 테러리스트의 피묻은 회중시계가 상해로부터 서울로 보내지는데- 이것이 서울 테러리스트의 손을 거쳐 광주 테러리스트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시계가 전해진 도시 마다 비명의 죽음이 토해놓는 피가 양자강이 되고 한강이 되고 영산강이 되어 도도하게 흐릅니다.” 그렇다고 「千年의 囚人」이 역사 속의 테러리즘을 천착하는 작품은 분명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역사, 그러나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역사의 흐름과 그 귀착점을 가시화한 작품이다. 제작의도도 “우리는 이 연극을 통해 책임지지 않는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되며 계속해서 책임지지 않는 역사가 되풀이될 때, 단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재수없게 코가 꿴 피해자가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던지고자 한다”고 밝혀져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태석은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하기 위해 얼핏 비논리를 앞세울 수 있는 꿈과 극적 현실(환상)을 이용한다. 그러나 그 겉 틀의 이면에는 분명 논리적 추이가 지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놀이성과 유희성으로 포장되어 있어 이 논리적 추이와 오태석 특유의 ‘역사보기’의 핵심을 간파하는 데에는 고도의 관극술이 요구된다. 관극에 익숙하고 오태석의 특징을 아는 관객에겐 이 점이 그의 작품을 보는 묘미이지만 대본 심의에서 ‘중학생 관람가’의 판정을 받은 이 작품이 과연 나이를 불문하고 넓은 층의 관객에게 어필할 지는 의심스럽다. 수없이 많은 역사적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연루된 수많은 인물들이 연대기적으로가 아니라 꿈과 극적 환상의 논리로, 얼핏 뒤죽박죽 가벼운 터치로 중첩되어 언급되기에 이 작품이 혹여 역사 인식이 부족한 관객들에게 역사 속 죄인들의 자기 변명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그들이 단지 역사의 희생물로만 색인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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