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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연극
눈부시게 성장한 뮤지컬 시장의 한국적 대안찾기
김승옥 연극평론가
연말 극장가를 석권하는 것으로 주가를 올려왔던 뮤지컬이
최근들어 전천후 연극으로 급부상하면서 계절에 관계없이 관객 동원에 성공하고
있다. 여타의 연극무대가 사회 제반 문제에 짓눌려 침체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는 가을 극장가를 장식하고 있는 「드라큘라」,
「의형제」, 「하드록 카페」, 「유랑극단」과 국내 최다 공연 기록을 보유한
「아가씨와 건달들」 등에 몰리는 관객의 발길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는 국내
초연의 번역극 「드라큘라」, 번안극 「의형제」를 통해 한국 뮤지컬의 지향점과
한계를 점검해보기로 한다.
우리 정서에 맞게 재구성하려는 노력
돋보인 「드라큘라」
극단 갖가지의 창단 공연 「드라큘라」는 영 미 뮤지컬에
익숙해져 있는 국내 관객들에게 동유럽 뮤지컬이 처음 소개되어 관심을 끈 경우이다.
1995년 프라하의 콩그레스 센터에서 초연된 이 뮤지컬은 체코의 음악적 전통과
정서를 바탕으로 영 미 뮤지컬이 석권하고 있는 세계 뮤지컬 시장에서 문화적
긍지와 자부심을 심은 작품이다.
체코의 그래미 음악상과 골든 디스크상을 휩쓸며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은 이 작품에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드라큘라가 절규하듯
열창하는 서정적 멜로디의 주제음악을 포함해 40여 개의 뮤지컬 넘버가 대사없이
전개된다. 클래식한 선율, 팝과 록이 적절히 조화된 음악적 성취가 이 뮤지컬의
성공을 보장하고 있었다.
중세기 흡혈귀 전설의 형식과 의미를 시대에 맞게 수정해
과학문명의 절정기인 현대에도 빛을 발하게 만든 것도 관객의 흥미를 끌었다.
이 연극은 이교도들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심정적 동정을 끌어내고 기독교에
승리를 안겨줌으로써 중세적 가치관에 부응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또한 악에
대한 선의 승리라는 교훈적 도덕관을 만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작품 전면에
흐르는 정서는 엄청난 에너지의 에로티시즘과 파괴력을 내포하고 있다.
표면적 스토리를 보면 드라큘라 백작은 기독교도를 핍박하고
사제를 살해한 댓가로 영원히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신성을
모독하고 그 자리를 인간의 욕망으로 대신하려는 인간 무의식의 메카니즘이
만들어낸 신화이다. 즉, 영생을 향한 인간 욕구와 공포의 투사라고 볼 수 있다.
드라큘라는 이를 상징적으로 가시화한 인물인 것이다. 이는 권력과
부, 그리고 성에 탐닉하는 드라큘라의 행적에서 극명하게
표출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큘라는 깊은 회의에
빠진다. 생명력의 고갈로 신음하는 그에게 영생은 오히려 축복이 아닌 저주로
다가 온다. 이 지점에서 그는 다시 영원한 구원의 여성인 아드리아나의 사랑을
희구하게 된다. 사랑만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임을 알지만 아드리아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연극은 여기서 아드리아나를 대체할 인물을 설정하게
된다. 그녀를 외형상 빼닮은 산드라가 등장해 드라큘라의 마음을 흔들자 로레인과의
사랑마저 금이 간다. 그러나 모든 사실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드라큘라에게 살해당한
영혼들이 나타나 그를 정죄하자 고통에 몸부림치며 용서를 구하게 되고 신의
은총을 입어 죽음의 안식에 이른다. 그러나 작품의 결구에서 드라큘라의 회개가
제대로 표출되지 않아 구원의 의미가 희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서
가죽옷 차림을 한 현대적 복장의 산드라를 정점으로 드라큘라와 로레인이 구축해
보인 삼각구도는 쾌락지향적 오락성이라는 숨은 의도를 노출시키고 있어 오히려
작품성을 깍아내리고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중세의 수도원과 드라큘라의 웅장한
성을 재현한 세트, 21세기 런던의 환락가와 거리풍경을 리프트를 활용해 신속하게
변환시키고 있는 장면도 볼거리이다.
조명과 분장도 환상적 분위기 조성에 일조하고 있다. 수차례의
장면전환이 매번 암전 상태에서 처리되어 극의 신속한 진행을 방해하는 것은
보완해야 할 문제이다.
타고난 서정적 음색의 박철호는 잔인한 흡혈귀를 소화하기
위해 저음에서 힘을 넣고 있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구축하는 데는 못미치고
있다. 광대, 집사, 의사의 1인 3역을 소화해낸 남경읍이 날렵한 몸동작과 여유로
무대를 지키고 있다. 스티븐(조승룡)의 가창력도 돋보인다. 흡혈귀 요정들의
삼중창도 극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은 배우들의 합창과
군무도 수준급이다.
한국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현지 스텝들과 국내 스텝의
협업으로 단순히 외국 작품을 직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정서에 맞게
재구성하려고 노력했지만 복제의 수준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민족자존의
정신과 예술적 역량을 결집시켜 뮤지컬의 민족음악화에 성공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체코 뮤지컬은 브로드웨이풍의 뮤지컬에 경도되어 있는 한국 뮤지컬계에
도전이 되고 있음에 분명하다.
사회문제에 다가선 뮤지컬 「의형제」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 등의 번안 뮤지컬을 통해
지속적으로 한국적 대안 뮤지컬 찾기를 시도해 온 극단 학전은 「의형제」를
통해 또 다른 가능성에 접근하고 있다. 국내 관객들에게 「리타 길들이기」
「셜리 발렌타인」 등으로 익히 알려진 영국의 극작가 윌리 러셀Willy Russel
원작의 뮤지컬 「Blood Brothers」를 번안한 작품이다. 영국에서는 1983년 비틀즈의
고향인 리버풀에서 초연된 이후 현재까지 런던 웨스트 앤드에서 최장수 뮤지컬로
손꼽히고 있다. 국내 무대에는 ’92년 한양 레파토리의 창단 공연 「핏줄」로
소개되었다.
1970년대 항구도시 리버풀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원작은
세계적 불황과 정리 해고와 대량 실직이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 쌍둥이 형제와
그 어머니의 삶에 드리우는 비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혀 상반된 가정적·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란 쌍둥이 형제는 자신들의 관계를 모르는 채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이는 비극에 도달하게 된다. 이들 형제가 처한 비극적 국면을 통해 공멸을
자초하고도 진상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절망적 생존 방식에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우화적 성격이 짙다.
김민기의 번안 뮤지컬 「의형제」는 소외된 계층을 위한
연극에 관심을 기울여 온 윌리 러셀의 지향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부산의 피난 시절부터 1970년대 유신말기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해 놓고 서로 판이한 성장 과정을 겪게 되는 쌍둥이 형제 현민(김학준)과
무남(권형준), 그들의 생모 간난(배해선)의 삶을 통해 한국적 절망을 잉태한
원인을 점검하고 시대를 반성하며 그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공감대를 찾고
있다.
런던 뮤지컬 양식을 답습하지 않고 한국적 색채를 띠도록
구성한 「의형제」는 한국적 뮤지컬 실험의 한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몇 가지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드라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한국적 현실을 대입시키려 하였으나 사건 전개가 작위적이고 비약이
심하다. 도입부의 개연성에 비해 후반부로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전반부에서 쌓아올린 긴장의 축이 맥없이 풀리고
감동이 반감되는 것이다.
나레이터(장현성)를 등장시켜 인생패배자들의 운명을 예언적
기록으로 전달하고 있는 방식은 공연에 균형과 활력을 주려는 시도로 읽힌다.
그만큼 비중있는 역할임에 비해 무게 중심으로서 제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뮤지컬의 삼요소 가운데 춤이 취약하다. 어린 시절의 전쟁놀이를 춤으로
형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드라마가 지닌 한계를 다소 미숙하지만 성실한 연기와 음악이
보완해 주고 있다. 어린 시절의 재현은 실감나고, 동네 개구장이들의 전쟁놀이는
중년의 관객들에게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 간 어린시절의 꿈과 낭만을 떠올려
미소짓게 만든다. 자칫 무겁고 음울하게 느껴지는 주제를 반짝이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대사, 그리고 대중적인 음악에 담고 있어 관객에게 친밀감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뮤지컬 전용극장의 면모를 갖추고 깨끗한 음향과 음색으로 귀를
즐겁게 해주어 호감을 준다. 부산 피난민 시절과 서울 이주 시절, 현민과 무남의
빈부
격차를 보여주는 이층집과 판자촌 그리고 감옥과 거리 등
소극장 공간을 다양하게 구획해 기능적으로 활용한 무대미술이 돋보인다.
현대인은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사실주의 기법으로 심각하게
전달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극단 학전이 뮤지컬 양식을 빌어 사회 문제에 다가들려는
시도는 시의적절하다. 노래와 춤을 전달매체로 하는 음악극이야말로 고달픈
삶을 의욕적 삶으로 환치시키는 유일한 연극 양식이기 때문이다. 상업성 짙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길들여져 가는 관객들에게 소극장 뮤지컬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해 보여주고 있는 극단 학전의 지속적 노력을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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