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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영화
생명과 연관된 섹스철학 없는 섹스담론들
유지나 영화평론가, 동국대교수
요즘 들어 한국영화의 정체성 문제가 유독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영화가
다른나라 영화들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한국영화만의 고유한
속성이 있긴 할텐데 그게 무얼까? 이런 질문은 늘상 있던 것이다. 그러나 유독 이
시점에서 한국영화를 둘러싼 정체성 문제가 집중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일련의
사회적 정황이나 영화문화와 관계를 맺는다.
부산과 부천 등에서 열리는 세계영화제에서 이전보다 다양한 나라의 영화들을
보게 된 영화관객층의 형성, 게다가 곧 일본영화가 시장에 들어온다는 기대와
우려… 이 모든 상황들은 이제 한국영화를 아시아영화와 세계영화 속에서
자리매김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이런 국제화 감각은 다시 역으로 최근의
한국사회의 변화와 관계를 맺는다. 경제위기에 대한 좌절감이 민족주의적 분노와
단결로 변형되면서 모든 차원에서 한국적인 것이라는 가치에 매달리거나
미국주도의 국제질서에 독립해서 한국만의 무엇인가를 발견하거나 정립시켜야
한다는 강박증은 영화에서도 이어진다.
한국영화의 특성처럼 보이는 섹스담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근 개봉된 일련의 한국영화들 「처녀들의 저녁식사」,
「정사」, 「키스할까요」, 「파란 대문」을 보면서 나 역시 한국영화의 정체성
내지 속성이란 실마리를 풀어내고픈 욕망에 사로잡혔다.
추석부터 시작해서 한 달 안에 개봉된 이 영화들은 모두 남녀상열지사에 주목하는
공통점을 갖는다. 물론 어느나라 영화이든 대체로 남녀의 연애담을 다루니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남녀애정담이 한국영화로 넘어오면 로맨스보다는
본격적인 성관계나 섹스담론으로 과잉 포장되고 전개되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래서 한국영화들을 계속 보다보면 남녀관계의 몸의 부딪침을 적나라하고
끈질기게 반복적으로 구성해 내면서 전 영화의 섹스담론화같은 상징적 그림을
얻게 된다. 오히려 이런 측면이 최근(아니 아마도 오래 전부터) 로맨스와 정서가
사라진 연애담의 섹스담론화에 쏠리는 한국영화의 속성 내지 특성처럼 보일
정도이다.
섹스담론화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영화는 단연코 「처녀들의
저녁식사」(임상수 연출)이다. 제목에 들어간 ‘처녀’란 말은 처녀성을 말하는지
미혼을 말하는지 모호한데, 영화에 따르면 세 여주인공 중 둘은 처녀아닌
처녀이고 모든게 섹스로 모아지는 데서 내러티브의 욕망이 나온다. 영화는 이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노골적인 섹스담론과 각자 치루는 섹스행위에 대한 묘사로
반복적으로 순환된다. 그 섹스담론이 한국영화의 관습적인 남성주도가 아니라
여성 캐릭터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에서 굳이 신선함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의
대화나 각자의 섹스장면을 화면화하는데서도 남성의 시선을 벗어나려고
의도적으로 애쓴 흔적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시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방황하는 카메라의 시선이나 남성성애의 성기중심적 사고에 여성을
대입한 흔적이 역력하다. 성교육이 안된 그리고 성지식이 없는 관객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호기심을 갖고 이들을 엿듣고 훔쳐보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섹스행위 자체에만 초점이 맞춰져 지겨움을 유발시킨다.
그에 비하면 「정사」(이재용 연출)나 「키스할까요」(김태균 연출)는
섹스자체보다는 상대적으로 연애의 정서상태에 집중한다. 유부녀와 그녀
여동생의 약혼자 사이의 불륜 애정담을 다룬 「정사」는 섹스만큼이나 정서적
파장에 초점을 맞춘다. 여주인공 역의 이미숙이 오랜만에 스크린에 등장해서
보여준 성숙한 성격연기와 이재용 감독이 구사하는 구도와 색채미 조명에 심미적
쾌감을 얹은 화면구성은 질척거리는 이탈적 연애담을 세련되게 포장해 낸다.
「키스할까요」는 한국영화의 연애담치고는 가장 순진무구한 형태를 보여주는
로맨틱 코메디이다. 키스도 못해본 잡지사 취재기자와 사진기자 사이의 자존심
싸움과 서툰 연애담은 기존의 캐릭터를 희화화한다. 전혀 꾸미고 다니지 않는
여자와 겉으로 야한 이야기를 큰소리로 떠들어대지만 실은 연애에는 쑥맥인
남자라는 설정은 여우같이 내숭떠는 여자와 늑대처럼 음흉한 남자라는 관습을
애교있게 비튼다. 그 대신에 조연급으로 나오는 유부남 편집장과 야한 기자사이의
불륜의 관계가 가장 노골적인 섹스담론을 대행한다. 결국 영화는 얼떨결에
이루어진 막판의 감동적인 키스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파란 대문」(김기덕 연출)은 한국영화의 단골 주인공인 착한 매춘부를 정점으로
내러티브를 풀어간다. 내러티브 욕망은 매춘여관집 대학생 딸(이혜은)과 매춘부로
막 고용되어 온 진아(이지은)의 관계방식을 통해 전개된다. 신분과 성격은
다르지만 나이가 같은 이들이 차이와 반목(딸에 의해 주도되는 일방적인
것이다)을 넘어 같은 젊은 여성으로서 인간적 유대를 형성하는 감동적 장면을
결말로 선사한다. 당연히 매춘부가 등장하는 풍경화답게 여러번에 걸친
섹스장면이 반복된다. 매춘부를 등쳐먹고 사는 건달 기둥서방의 횡포가 곁들어진
섹스행위, 곰같은 여관주인집 남자와 아들과 번갈아 섹스를 하는 장면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이제는 진부해져 버린 물고기 메타포도 여러번에 걸쳐
등장한다. 대학생 딸의 심리변화, 그러니까 그동안 매춘부에 대한 혐오증을
인간적 이해로 변화된 것을, 그녀대신 매춘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대단한
결론이다. ‘너도 매춘부, 나도 매춘부, 진정한 여자는 다 매춘부’라는
매춘부여성론이 다시 한번 한국영화에서 공언되는 순간이다.
로맨스도, 사랑의 정서도 없는
섹스파티 영화들
물론 이 네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고 ’98년 한국영화의 정체성에 관한 단언을
내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주종을 이루는
연애담이나 삶의 풍경화는 남녀의 전면적인 인간관계보다는 섹스장면과 성관계에
대한 호기심과 훔쳐보기 묘사로 과잉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남녀관계,
그중에서도 성관계는 인간 존재의 탄생과 쾌락의 근거로써 중요하다. 그렇지만
작금의 한국영화에서는 후자의 측면만이 부각된다. 로맨스도 사랑의 정서도
생명과 연관된 섹스철학도 없는 섹스파티 영화들을 만든 이들은 마치 그런 표현이
관습파괴적이고 이탈적인 대단한 것인 양 스스로 자위하는(이런 영화들을 만든
감독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금새 알 수 있다) 현상은 낙심스럽다. 관객에게
스크린으로 성교육을 시키기 전에 폭발하는 사춘기적 성욕망에서 여전히
몽상하는 영화창작 주체들부터 성욕의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성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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