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예술을  찾아서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특유의 공예품

- 한국의 전통칠기

 
 

임영주 경기도 문화재위원

  (漆)은 본래 ‘옻칠’을 말한다. 칠의 성분은 옻나무과의 수액(樹液)으로 『설문해자』에 의하면 나무 즙의 이름을 ‘칠(漆)’이라 하였고, 원래 ‘칠(漆)’자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또 칠은 ‘물’ 이름이라 하였다.
칠은 나무진 속의 칠산(G14 H18 O2)이 공기 속의 산소와 접촉하여 칠(G14 H18 O3)로 변화한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나무진은 원래 유백색으로 수분 25% 내외, 순옻(라카성) 65% 내외, 그밖에 약간의 고무 성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성이다. 칠은 옻나무진과 생칠(生漆), 정제칠(精製漆), 화칠(火漆)로 구분되는데, 1차 가공된 것을 생칠, 2차 가공된 것을 정제칠이라 한다. 생칠과 정제칠은 다같이 옻칠로 사용된다. 특히 정제칠은 무기성 안료인 단청 물감과 배합하여 여러 가지 채색안료의 접착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옻나무는 옻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학명은 Rhus verniciflua Stores이다. 높이는 12m, 지름 40cm까지 크며,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강원도 원주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동남향의 산록지, 하안, 밭뚝 등이 적지이다. 표고 900m까지도 재배가 가능하다. 옻나무에는 유독물질인 우루시올Urushiol이 있어 옻을 유발 시킨다. 우루시올은 락크효소Laccase의 작용에 의하여 공기중의 산소를 흡수하여 검은 수지 모양이 된다. 한방(韓方)에서는 옻칠을 약재로 사용한다. 옻나무를 발아시키는 일은 조금 어려운데 가을에 익은 열매에 붙은 납을 제거하여야 하며 열매를 절구에 넣고 가볍게 찧은 다음 다시 정미기에서 씨앗의 껍질을 얇게 갈아서 노천에 매장 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파종한다.
칠기는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공예품으로, 중국 은대(殷代)의 유적인 하남성 안양현 대묘(大墓)에서 발견된 큰 북을 받쳤던 기둥에 녹색의 채색 무늬와 자개장식 주칠무늬(朱漆紋)가 있는 자료가 발견되었으며, 주(周)나라 때의 유물로는 호북성에서 칠잔이 발견되었고, 호남성 협현 분묘에서 칠반(漆盤)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성남리의 청동기시대 말기 유적에서 칠기의 잔편이 발견되었고, 또 황해도 서흥군 천곡리와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등지에서 역시 옻칠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상남도 의창군 동면 다호리 유적에서 여러종류의 다양한 칠기가 발견되어 귀중한 칠기자료로 주목되고 있는데, 그 종류를 보면 용기류로는 원형의 고배(高杯), 장방형의 고배, 통모양의 칠기 등이며 목심칠기(木心漆器), 남태칠기(藍胎漆器) 계통의 것이다. 또 문방구류로서 붓자루, 옻칠한 부채 손잡이 등의 생활용구가 출토되었고, 또한 옻칠한 쇠도끼자루와 낫자루, 다비자루 등 도구들과 칼자루, 칼집, 활[弓] 등 무기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물에서 옻칠한 자료가 밝혀졌다. 이 때 사용된 칠은 산화철이 함유된 검은칠(黑漆)과 특히 산화철이 함유된 안료와 경면주사를 배합한 채색칠을 사용한 예가 밝혀져서 청동기시대 말기에서 초기 철기시대 무렵에 이미 독자적으로 완전한 정제칠을 개발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강서 우현리 고분에서 발견된 건칠관(乾漆棺)이나 채화칠기 잔편이 발견되었고, 서울 석촌동 백제 고분군에서 발견된 목칠관, 칠궤 및 톱니무늬가 그려진 칠반으로 추정되는 그릇은 주칠 바탕에 톱니무늬를 그린 것인데 청동기시대 유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무늬이다. 그리고 공주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발견된 목관, 채화두침(베개), 채화족좌(발받침) 등은 삼국시대의 발전된 옻칠공예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는 목심흑칠(木心黑漆) 접시가 발견되었다.
신라시대 유물 중에는 칠기 자료가 상당수 발견되었는데, 특히 금속제품에 옻칠한 경우는 조양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자료를 비롯하여 5세기 이후 부터는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 목심칠기가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 경주 안압지에서는 발굴 당시에 발견된 꽃모양 칠장식품, 명문(銘文)이 새겨진 칠합(漆盒) 등 주칠과 흑칠한 목심칠 대접, 목심칠 벼루 등 일상생활 칠기용품이 상당수 발굴되었다. 문헌을 통해서 보면 신라시대는 칠기를 관장하는 칠전(漆典)이라는 관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출토유물은 그러한 기록을 반증한다고 하겠으며, 이 때에 국가에서 대규모의 옻칠 생산체제 아래 칠기 제조가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삼국시대의 그러한 옻칠 생산기술과 제작기법이 한층 발전하여서 자개를 옻칠에 박아 장식하는 나전칠기(螺鈿漆器)가 매우 발달하였다.
고려시대 공예는 나전칠기를 비롯하여 금속 입사공예(入絲工藝), 그리고 도자상감기법(陶瓷象嵌技法) 등이 발전을 보면서 대표적인 공예품으로 등장하였다. 고려 나전칠기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동국문헌비고』 등의 기록이 있으며, 유물도 상당히 전해지고 있어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동국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 문종(文宗) 때 이미 고려에서 요(寮)나라에 나전칠기를 예물로 보낸 기사가 보이고, 인종(仁宗) 1년(1123) 때 송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에는 고려 나전칠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세밀하여 귀하게 여길만 하고 나전이 장식된 말 안장도 매우 정교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국가 국영 공예품 제작소라 할 수 있었던 중상서(中尙署)에서 화업(畵業), 소목장(小木匠), 위장(韋匠), 마장(磨匠), 나전장(螺鈿匠) 등의 나전칠기 제작과 관련된 장인들에 의하여 양산된 사실이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간행되면서 그 경책을 보관하는 나전경상(螺鈿經箱) 등을 제작하기 위하여 이를 담당하는 관청이 있었는데, 원종(元宗) 13년(1272)에 「나전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이 조성되었다. 이 당시 만들어진 고려시대 나전칠기가 일본을 비롯하여 유럽 등 여러 나라에 소장되어 있다. 즉 우리나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흑칠나전포류수금문향상(黑漆螺鈿浦柳水禽文香箱) 외 4점을 비롯하여 일본 도쿠가와 미술관에 있는 합과 다이마데라(當麻寺)에 있는 대모염주함(玳瑁念珠函), 미국 보스턴 미술관의 경상(經箱), 영국 대영박물관의 경상, 독일 쾰른 동양미술관 소장의 나전상자,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동양미술관에 있는 경상 등이다. 이들은 모두 흑칠나전으로 국당초문 등을 유려하게 장식한 격조있는 세계적인 작품 들이어서 고려시대의 칠기공예의 세련됨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궁중이나 귀족사회에서 옻칠한 기물을 즐겨 사용하여 많은 칠기제품이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조선조 초기인 15, 16세기의 나전 의장은 고려시대의 여운을 남기고 있으나 연당초문, 쌍봉문, 쌍용문, 보상화문 등은 고려시대의 섬세했던 도안이 조방해지고 아울러 표현이 대담하며 활달하다. 17, 18세기경에는 전기의 기법이 다소 쇠퇴하면서 점차 매화, 화조 등의 그림이 두드러지게 많아지고 점차 사군자나 십장생 등 문인화풍의 문양이 성행되었다. 말기인 19세기에는 나전칠기 기법에 ‘끊음질’이 성행하여 고려시대 경상에서 볼 수 있었던 문양이 재현되었고 한편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화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어 십장생무늬와 산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조선시대 말엽에 오면서 관공장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칠기공예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간신히 그 명맥만 이어오게 되었다. 1908년 조선 왕실은 일본인 실권자들에게 거금을 투자하여 ‘한성미술품제작소(漢城美術品製作所)’를 설립하였다. 그 취지는 전통공예의 계승 및 진작을 기본 목표로 한 것이다. 그 기술고문 자격으로 일본인이 관여 하였으나 운영권은 왕실에 있었다. 이를 모체로 하여 한일합방 이후에는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가 설립되었는데, 나전칠기, 목공, 도금, 도자, 입사, 염직 등등이 있었다.
근래에는 경남 충무지방에서 나전칠기가 활발하게 전승되어 왔는데 그곳은 1919년 「통영칠공주식회사(統營漆工株式會社)」가 설립되어 그 공장장으로 활동하였던 전성규로 인하여 김봉룡, 송주안, 민종태 등이 배출되어 1960년도에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에 이르렀으며, 한편 서울에는 심부길이 끊음질의 보유자로 인정되어 후계자를 양성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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