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산책 - 12월의 문화인물 
 
 

충과 효로 점철된 민족의 표상, 성웅 이순신

 

이순신은 조선조 인종 원년 1545년 음력 3월 8일(당시 양력 4월 28일) 한성 건천동(지금의 인현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卞)씨로 수림(守琳)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 오는 전통적인 문반 출신으로 이순신은 그 12대손이 된다. 특히 조선 개국과 더불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5대조인 변(邊)은 영 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낼 정도로 번창하였고 증조부 거(   )는 병조참의를 지냈다.
그러나 할아버지 백록(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한 후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이순신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충남 아산으로 내려온 것은 그의 외가가 아산고을 백암리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탄생과 관련하여 어머니의 꿈에 참판공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여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5남매 중 3남이었다. 위로 희신(羲臣)과 요신(堯臣) 두 형이 있고 아래는 우신(禹臣)이 있었다. 이들 4형제의 이름은 중국의 고대 3황 5제에 속하는 복희씨와 요임금, 순임금, 그리고 우임금을 따서 지었다. 아들에 대한 남다른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누이는 변기(卞騏)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의 아들 변유헌(卞 有憲)은 군중에서 공사간에 이순신 장군을 많이 도왔다.
이순신은 문반가문 출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전쟁놀이를 즐겨했다. 어릴 때 같은 마을에 살았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순신은 어릴 때부터 얼굴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받지 않으려 했다. 다른 아이와 놀면서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또 자라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고 무과에 급제하여 출세하려 하였다.”라고 했다.
이순신과 서애와의 어릴적 사귐은 훗날 임진왜란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천만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서애가 없었으면 이순신은 제대로 발탁도 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는 전쟁에서는 물론 영웅이었지만 평소에는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선비형의 장군이었다. 진중시(陣中詩)에서 보이는 그 섬세함과 애절함이란 문학적으로 어느 시에도 비길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지은 시로는 잘 알려진 ‘한산도가(閑山島歌)’를 포함하여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서해어룡동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 등 여러 편이 있다.
‘한산도가’는 이 가운데에서도 우리 민족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시이다. 그런데 이 시와 관련하여 최근에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먼저 이 시는 을미년 8월 15일 한산도 본영에 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임진왜란중 이순신이 약 3년 8개월간 머문 곳이 한산도이므로 으레 시 제목에서와 같이 그 곳에서 지었을 것이라는 선입관에서 비롯됐다.
『난중일기』에서 시 내용과 비슷한 상황의 일기를 찾아보면 모두 20여 군데가 나오는데 노산 이은상 선생은 이중에서 「한산도가」 가 지어진 시기를 을미년 8월 15일, 장소는 한산도로 단정지었다. 『난중일기』에서 그 날짜의 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날 밤,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는데, 잠을 들지 못하고 시를 읊어 긴 밤을 새웠다.”
(是夜 微月照樓 寢不能寐 嘯詠永夜)
그러나 앞의 원문에서도 나타나 있지만, 을미년 8월 15일의 일기에는 ‘微月’이라 하여 해석도 분명히 달 밝은 날이 아니라 ‘으스름 달빛’으로 되어 있다. 「한산도가」에 보이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더욱이 을미년 8월 1일부터 18일까지는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거의 비가 계속 오는 상태였다. 또한 그 시를 읊은 장소를 한산도라 단언하는 것도 단지 추측일 뿐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한산도가」를 을미년 8월 15일에 한산도에서 지었다고 하는 통설엔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평가한 자료는 내외 문헌에 허다하지만 그 대표적인 예로는 당시에 장군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공을 평하여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해를 다시 손 본 공로다.”(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란 짤막한 글은 너무나 유명하여 자고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찬양하는 문구로 인용하고 있다.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이순신을 흠모한 정조대왕이 직접 지은 「어제상충정무지비」(御製尙忠旌武之碑)의 한 구절을 보자.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의 비명을 짓는다 하랴.”
정조는 이 비문의 글씨를 왕희지체 묘비문에서 집자하도록 하는 특별한 성의를 보였으며 신하에게 명령하여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를 간행토록 하는 한편 그를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어진 임금이 역시 어진 장군을 알아본 것이다.
한편 이순신의 충(忠)이 세간에 많이 알려진 데에 비해 효(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예로부터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라(求忠 臣必於孝子之門)’는 말이 있다.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난 뒤로 어머님을 여수 본영 가까운 곳으로 모셔와 계시게 했는데 일기를 보면 그의 효심이 하늘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중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어머님을 그리고 문안하고 소식만 들어도 반기고 몇 날만 막히면 걱정하던 그의 일기 구절 구절이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이순신 장군의 전 생애는 한걸음 한걸음 그 모두가 충(忠)과 효(孝)로 점철(點綴)된 이 민족의 위대한 표상이었다. 우리는 ‘만고의 충신’, ‘천하의 명장’ 이순신이 있음을 온 인류의 자랑으로 삼는 바이며 이러한 장군의 명성은 두고 두고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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