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음악
 

목소리의 설득력이 성취한 작은 진보

이소영 음악평론가


한동안 노래 찾기, 노래성의 회복이 음악사회에서 화두가 된 적이 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운동’, ‘노래 동인’등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80년대 ‘민족음악운동’의 중심은 바로 ‘노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노래’, 우리 사회가 다시 찾아야 할 ‘노래’란 엘리트적 선민의식을 떨치지 못하는 가곡도 아니요, 한 번 쓰고 버리는 인스턴트 상품같은 가요도 아니요, 영미 나라들에 대한 동경과 문화적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팝도 아니요, 박물관의 농기구와 같은 의미로 인식되는 민요도 아닌, 이 모든 부정적 관행과 사고가 지양된 이상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래’로 표현되었던 삶과 음악의 총체적 문제는 중심이 해체되고 주변적인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사회의 포스트모던한 징후때문인지 어느 사이에 크로스오버와 대중음악의 갖가지 양식적 실험의 홍수속에 뒷전에 밀리게 되었다. 노래에 대한 통합적 실천은 이제 민요, 가곡, 민중가요와 대중음악 등 개별적 실천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하나의 계안에서도, 예컨대 대중음악안에서도 펑크록, 얼터너티브 록, 재즈, 포크가 국악에서는 전래민요와 국악가요가 서로 자기 갈길에 바쁜 형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거대 담론이 포착하지 못하는 다양성의 회복이란 측면에서 ’90년대가 이룩한 진보의 한면으로 평가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바야흐로 통합이 아닌 나눔의 시대가 온 것이다.

색바랜 컬러사진을 보는 듯한 공연

그런 맥락에서 보면 지난 12월 8, 9일에 있었던 공연, 노래모임 ‘노곳떼’의 ‘노래에서 민요로, 다시 노래에게로’는 지나간 10년전 앨범의 색바랜 컬러사진을 보는 듯한 컨셉이 아닐 수 없다. 민요, 노래 이 두 단어는 ’80년대에 우리를 뜨겁게 울렸던 만큼이나 현재, 낡고 진부해진 대상에게 주어지는 싸늘한 무관심과 냉소를 감내해야 하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이날 불려진 곡들은 현대 예술음악 작곡가들 중 그간 민족음악론에 동참해왔던 이건용, 강준일, 김대성 등의 곡과 한돌, 하덕규 등 대중음악계에서 포크적 감수성을 가진 작곡가들의 노래, 그리고 전래민요들이 불려졌다. 이렇듯 예술가곡적 어법과 포크나 발라드적인 조성적 가요어법, 민요적 어법이 공존했던 공연은 최소한 7,8년전 민족음악연구회, 노래마을, 정태춘, 민요연구회, 안치환 등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게 가능했던 시절이후 처음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런 구닥다리같은 작업을 다시 들고 나오는가?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펑크록과 키취 등에 대한 담론이 유행처럼 번지는 이때, 고색창연해 보이는 이들 노래선언은 어떤 현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이 찾고자 했던 노래는 10년 전에 찾고자 했던 ‘노래’와 별반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전래민요와 대중가요, 고급음악적 감수성의 창작가곡 등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개별들이 ‘노래’로 근거 지워지고 통일되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노래를 통해 삶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음악을 만들자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시도들이 10년 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별다른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고 오늘날 구태의연하게 비칠 수 있는 업보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전의 이슈를 다시 들고 나온 이들의 공연이 과연 어떠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날 공연의 열쇠는 전혀 새롭지 않은 이념을 어떻게 새로운 설득력으로 공명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노래’라는 본성으로 다시 피어난 진정한 통일성과 다양성

이날의 공연은 그동안 한자리에 모으는 대부분의 시도가 그랬듯이 이질적인 것의 나열로, 부조화로, 어설픈 접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노곳떼의 노래부르기(편곡과 창법과 해석)는 포크, 민요, 가곡의 기존 장르적 관행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노래’라는 본성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던가? 먼저 이들은 민요에서 포크와 예술가곡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어법이 요구하는 정서와 창법을 충실히 소화해 내었다. 단적으로 서도민요 「금다라군」을 부른 고상미와 강준일 곡을 부른 김경희의 연주는 서도창법와 벨칸토창법이라는 정통의 창법을 구사함으로써 그 노래의 태생적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창법과 양식의 대조로 끝나지 않고 가능한 그 노래의 가사가 담은 삶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그들의 살아있는 표정과 해석으로 인하여 다같이 ‘공명된 노래’로 통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해야 솟아라」와 「천덕이」 등 많은 노래들의 앙상블에서 하나의 목소리로 소리를 모으는데 기꺼이 자신의 발성적 특성을 양보할 줄 알았다. 솔로와 앙상블의 균형과 조화만큼이나 돋보였던 것은 각각의 레퍼토리와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묶여진 전체와의 관계였다. 「천덕이」, 「남누리 북누리」 등과 「여울목」, 「좋은나라」가 양식적 관점에서는 서로 다르게 비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앙상블로의 편곡과 해석과정으로 재탄생되어 결국 전체를 ‘어울리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진정한 다양성보다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기존 세력의 분열성이, 진정한 통일성보다는 억압적인 획일성이 아직도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다양성과 통일성, 개체와 전체가 균형감있게 공존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무척 기분좋은 일이다. 아무리 좋은 복음이라도 그것을 전해 듣는 사람에게 공명되지 않으면 그것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이번 공연이 우리를 공명시켰던 힘은 ‘이념의 설득력’이 아닌 ‘목소리의 설득력’이었다. 이들이 성취한 목소리의 설득력은 그날 마지막 불렀던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박노해 시, 김대성 작)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이룩한 진보는 10년 전과 다른 거창한 이슈를 내걸므로써 얻어지는 ‘커다란’ 진보가 아니라 편곡과 해석과 앙상블 등에서 노래를 노래답게 만드는 ‘작은’ 진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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