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예술 리뷰 - 연극
창예술적이며 교육적인 '우리시대의 연극' 시리즈
이미원 연극평론가, 경희대 교수
이번 예술의전당 ‘우리시대의 연극’ 시리즈에는 「사천일의 밤」(박상현
작·연출), 「미친키스」(조광화 작·연출) 및 「파티」(윤영선 작·이성열
연출)가 선정되어서, 연초까지 공연될 예정이다. ‘우리시대의 연극’이 ’93년
오페라하우스 개관 원년부터 매해 기획되었으나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은,
한편의 작품만을 그것도 신작보다는 최근 히트작을 주로 재공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의식한 듯 이번에는 연극제식으로 3편의 신작을 올릴 예정인데, 이는
실로 올바른 기획의 방향이다. 다수의 작품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그 공연기간이
길어져서 기획의 홍보가 널리 알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 신작으로
연극제를 올린다는 것은 일단 주목의 대상으로 급부상할 수 있다. 또한 다수의
작품중에 어떤 하나의 작품이라도 뛰어나서 그 전체를 보완할 수 있기에,
검증되지 않은 신작이라는 위험성을 최소화 할 수도 있다. 기왕에 공연된 2편의
작품만을 보아도, 이번 기획이 이미 성공적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의
작가’ 연극제와 함께 이 ‘우리시대의 연극’ 시리즈의 새로운 출발은,
예술의전당이 명실공히 공공극장으로의 예술적이며 교육적인 역할을 굳건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알렸다 하겠다.
조심스런 역사적 사실의 무대화, 「사천일의 밤」
「사천일의 밤」은 ’79년 12.12 사태로 희생된 김오랑 소령의 미망인 백영옥이,
’91년 의문의 죽음을 맞기까지의 사천일의 삶을 그리고 있다. 군인 김오랑은
위험을 감지하고도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다, 신군부 세력에 의해
살해된다. 행복했던 한 평범한 여인으로서, 남편의 부당한 죽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아내 백영옥은 절망감에 시력까지 잃게 된다. 그녀는 불교에 귀의하게
되고 제2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남편이 모시던 사령관 정병주의 죽음을 알게되자
12.12 사태의 주역들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준비하게 된다. 이 와중에서
그녀는 다시 감시의 대상으로 고통받게 되고, 갖가지 스캔들에 시달린다. 소송
준비를 도왔던 국회의원이나 마음의 지주로 삼았던 스님마저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웠음을 보며, 그녀는 더욱 술에 젖어들고 의문의 실족사를 하게 된다. 작품의
소재가 어두운 현대사의 핵심에 위치한 만큼, 사건을 재해석하든 비판하든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역사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백영옥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타살인지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다”라는 작가의 선언은 가능하지만,
작가는 지나치게 사실의 해석에 조심스럽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어두운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져간 인물의 고통과 불행에 여전히 무관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겠다”는 연출의 의도는 분명했었으면 싶었다. 한 신문기자가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식 이야기 전개에서 작가의 ‘비판의식’을 집어내기란 쉽지
않았으며, 백영옥의 멜로물적인 애정행각이 보다 쉽게 드러났다. 따라서 공연은
가까운 오늘의 이야기이면서도, ‘우리시대의 아픔’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느낌마저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아픔’으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어떤식으로든가 백영옥의 아픔에 무관심한 오늘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이
가교 역할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멜로드라마적인 바탕에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을 수용하겠다”는 연출의 말대로, 멜로드라마적 감각성이
강하게 다가오지도 못했다. 별 특기할 장치없는 무대에서 조심스런 사실의
나열로, 실로 극적인 백영옥의 삶이 오히려 절제된 듯 싶어서, 소재의
충격성마저도 최소화했다고 하겠다. 다만 백영옥 역의 이영숙이 일인극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대사를 무리없이 소화하면서, 스캔들의 여인이 아닌 섬세한 정감의
한 불쌍한 여인상을 그려냈을 뿐이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올해 돌아볼
만한 시의적절한 소재이기도 했으나, 역사적 사실의 무대화는 항시 조심스럽고
난해한 과제임을 다시금 일깨운 공연이었다.
파편화된 개인의 세기말적 사랑, 「미친키스」
반면 「미친 키스」는 실로 강렬한 감각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절규했다.
‘접촉에의 열망’이라는 부제처럼, 「미친 키스」에서는 미치도록 육체적
접촉을 시도하지만 단절의 절망만을 경험하는 오늘의 익명의 도시인을 그리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이며 흥신소 직원인 주인공 장정은 상실감과 외로움으로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의 애인 신희는 이를 집착으로 느끼며 환멸한다. 동생
은정은 수렁과 같은 무기력증에 빠져서, 접촉을 열망하며 창녀로 전락한다.
흥신소 의뢰인으로 만난 영애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고통을, 타인에게서 육체적인
굴종으로 위로 받으려 한다. 남편인 교수는 아내에게 거부당하며, 역시 창녀
은정이나 학생 신희와 육체적 열정을 추구한다. 장정은 신희의 변심에 점차
병적인 스토킹의 증세마저 보이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한편, 동생 은정의 창녀화
과정을 도청으로 일일이 감시하여 결국은 자살하는데 일조를 한다. 모두는 만남을
열망하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하며, 육체적 자극은 고독의 두께를 두껍게 할
뿐이다. 자칫 변태적인 도색으로 흐를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절망하는 소외의
고독으로 확실하게 표현했던 것은 연출의 감각이었다. 우선 노출이 불가피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노출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많은 성애의 장면들을 일종의
스타일화하여 깔끔하게 거리를 두었다. 따라서 자칫 벗은 몸이 줄 수 있었던
관능적 감각성을 배제하고, 그 이면의 고독이라는 관념을 효과적으로 부각시켰다.
“만져줘” 등 직설적인 대사의 반복이나 독백체의 대사도, 접촉이라는 가시적인
사실을 넘어서 그것은 차라리 절규하는 몸부림임을 드러냈다. 더구나 무대를
종횡하며 그 많은 독백체 대사들을 신들린 듯이 읊어낸 주인공 장정(이남희 분)의
연기력은, 다소 부진했던 여배우들의 연기를 커버하며, 작품의 고독을 압도적으로
전달했다. 한편 성애의 밀실 이미지와 전혀 상반되게, 광활하다 싶게 탁 트인 넓은
실내공간을 연출한 무대나 밝은 조명도 성애행위와 갈망의 이율배반을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뿐만아니라 극장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나아가 신세대
관객을 고려한 듯 관객석까지 새롭게 시도한 무대미술(김준섭)은, 연출의 감각과
맞물리면서 공연에 새로운 감각성을 불어 넣었다. 또한 라이브로 연주했던
아코디언의 애상적 멜로디도, 열렬한 성애의 순간마저도 묘한 서글픔을 자아냈다.
이러한 인물들이 맺어가는 성애의 고리는, 슈니츨러의 「군무 La Rond 」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독일의 독립으로 국세가 위축되어가던 오스트리아가
비인에서 마지막으로 섬세하고 세기말적 문화를 꽃피웠던 시절 쓰여졌던
「군무」는, 성애에 대한 세기말적 가벼움과 유희를 인상주의적으로 담아냈었다.
20세기말 오늘의 「미친 키스」는 그 가벼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열망으로
미쳐버린 절망적인 유희를 보여주는 듯 싶다. 오늘의 후기산업사회에서 더욱
파편화 되어버린 개인이, 마지막 광적인 에너지로 보여주는 접촉에의 열망과
좌절--그것은 「군무」에서 한 세기를 지난 오늘의 세기말적 사랑이 아닌가 싶다.
작년 「남자충동」에 이어 이번의 「미친 키스」는, 조광화가 확실하게 오늘의
대표 작가이자 연출가로 부상하고 있음을 천명했다 하겠다.
목록으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