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영화
 

한국문화의 대변인이 되어야 할 한국영화

유지나 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1998년 12월 한 달 영화계 달력은 스크린쿼터제(한국영화 의무상영 일수)사수 투쟁일지로 덮혀있다. 아시다시피 이 논란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한미투자협정에서 한국측 통상본부장이 스크린쿼터제를 양보(축소내지 폐지라는 뜻이다)하려하자 영화인들은 지난 7월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를 했다. “정부의 공약이고 지킬 것”이라는 국민회의쪽 입장표명으로 일단락되는 듯 하던 스크린쿼터제가 다시 미국측의 강력한 주문과 문화관광부의 92일 축소안으로 더 심각한 양상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영화인들은 비상대책회의를 구성해 12월 초에 몇차례 거리집회를 가졌고 심지어 명동성당 텐트에서 철야농성까지 벌였다. 영화전공 학생들도 한국영화죽이기 음모에 반대하며 거리로 뛰쳐나오는 와중에 필자같은 사람도 비상대책위원회에 끼어 밤새 토론하고 거리로 나가면서 지난 한 달을 스크린쿼터제와 한국영화의 함수관계를 푸는 문제로 보내게 되었다.
처음에 스크린쿼터논쟁은 경제논리 대 문화논리라는 축에서 경제관료들의 무지한 문화인식을 비판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통상실무자들의 영상산업에 대한 경제논리까지 공격하게 되었고 이제는 국회와 청와대 측의 지지입장을 확인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언론에서는 스크린쿼터제가 한국영화의 경쟁력를 떨어뜨리는 보호막에 불과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시론이나 논평이 등장하고 있다. 영화를 잘 만들면 되지 왜 스크린쿼터제같은 자유시장에 위배되는 제도를 고집하느냐는 전제가 이런 입장에는 깔려있다. 게다가 지금은 고통분담을 해야할 경제위기가 아닌가. 영화인만 뭐라고 밥그릇 싸움을 하는가라는 질타의 시선도 은연중에 깔려있음직하다. 나 역시 그저 순수한 관객이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영화산업 구조를 알게되면, 게다가 청와대에서 「쥬라기공원」의 수익성과 현대자동차 150만대 수출액이 비교되는 나라, 「타이타닉」 수익과 국민의 금모으기 총액이 비교되는 나라, 모든게 돈으로 계산되어 가치등급이 매겨지는 나라에서 다른 면을 생각한다면 이런 자유시장원리의 헛점을 깨닫게 된다. 6~7억원을 들인 국내시장용 한국영화와 100배 이상을 들인 800억원대 헐리우드영화와 같은 가격을 받고 경쟁을 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이례적으로 거품낀 「고질라」를 (통상교섭본부장의 말처럼) 이야기 구조는 허술해도 사회적 컨텍스트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여고괴담」이 이겼지만 그건 일년에 한번 일어나기도 힘든 일이다. 강력한 국가지원과 문화자긍심이 강한 프랑스에서 「뮬란」과 「아마겟돈」이 프랑스영화 점유율을 30%대에서 27%로 만들 정도로 헐리우드 영화의 경쟁력과 국제시장 배급망은 강력하다.
영화산업은 제작, 배급, 상영 세가지로 구성된다. 다른 나라는 대충 제작중심으로 영화산업을 꾸려온 반면, 헐리우드는 1920년대 중반부터 배급중심으로 영화산업을 일궈온 데서 그 강력한 힘이 있다. 영화를 잘 만들면 된다는 생각, 「아름다운 시절」처럼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해외수출을 하면 된다는 생각은 국제영화산업의 구조를 무시한 이야기이다. 해외의 유수한 잘만든 영화들,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한 소위 예술영화라는 것들이 수입되어 창고에서 썩고 있다. 배급망이 없이 영화를 만들고 사는 것은 영화산업의 흐름을 거스리는 일이다. 물론 그런 영화가 일년에 한두 편 있을 수는 있지만 모든 영화가 그런 운명에 놓이면, 그러니까 스크린쿼터제가 없어지거나 축소되자마자 극장이 한국영화를 안받게 되면 제작편수가 더 줄어들고 마침내 한국영화산업 붕괴까지도 예견하게 된다.

한국영화인이 사회적 책임감을
깨닫는 의미심장한 자리


청와대에서 영화 한편의 부가가치와 자동차 수출액이 비교되면서 그것이 마치 대단한 예인듯 문화상품론의 장미빛 청사진으로 각색된 것부터가 불길한 일이었다.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문화와 영상을 지원하겠다는 문화산업론 발상은 얼마나 비문화적인가? 게다가 한 편의 영화가 주는 총체적인 정신적 가치와 자동차가 주는 편리함의 가치가 매출액 비교로만 축소되는 것은, 수출이 많이 되어 달러를 벌어들인 영화가 최고의 영화라는, 장기적으로도 실천할 수 없는 한국영화산업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공식은 헐리우드 밖에서는 증명되기 힘든 공식이다. 헐리우드영화라는 강력한 오락상품과 자유경쟁을 벌여 이길 영화는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가망성이 없다. 이건 단순한 패배주의가 아니라 엄밀한 영화산업구조 분석과 강자위주의 시장경쟁 논리에서 확인된 결과이다. 그리하여 헐리우드를 제외한 나라들의 영화산업은 모두 헐리우드의 융단폭격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대한 전략과 정책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극장 전산망이 아직도 정비되지 않았고 제작, 배급, 상영시스템의 투명한 위계질서가 안잡힌 한국에서 그나마 스크린쿼터장치는 유일하고 지속적인 영화정책이자 토대가 되어온 셈이다. 물론 이건 구차하고 저급한 정책이다. TV나 여타 영상매체와 연계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영상산업으로서의 영화산업이라는 새로운 구조에 뒤쳐진 것이며, 자국영화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국수주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영화산업의 수준인 것을. 만일 이런 점들이 문제라면 현재의 제도를 보완발전시켜야 되는 것이 문제해결의 방향이지 일단 일수부터 축소하는 것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번에 관객의 전폭적 지지를 단번에 얻어내지 못한 한국영화인도 한나라 문화로서의 영화를 한다는 공인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다지는 계기

로 이번 투쟁을 되새겨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거리집회에서 자신의 영정을 든 배우들, 특히 여배우들을 보면서 그들이 영화 속에서 왜 이렇게 당당하고 감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했는지에 대한 울분이 치밀어 올라왔다. 순정파 매춘부로, 영악한 악녀 섹스광으로, 현대여성으로, 베드신에서 예술의 이름으로 섹시함을 팔던 그 여배우들, 그러다가 부자와 결혼하면서 그때까지 그녀를 키워준 대중의 지지를 현모양처론으로 박살내는 이 여배우들의 당당함을 단지 시위 선전효과를 위해 그들을 전면에 내세운 남자감독과 제작자들이 거리에 선 비참하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영화에 살려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영화는 한국인의 삶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 관객이 자긍심을 갖고 지지하게 될 한국문화의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 영화가 경제논리에 이용되자마자 곧 희생되려는 위기의 순간, 영화인 집단이 최초로 본격적인 정치세력화되는 이번 스크린쿼터제 사수투쟁은 한국영화인이 영화를 지키며 사회적 책임감을 깨닫는 의미심장한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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