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출판
 

빌려보는 만화에서 사서보는 만화로

김호운 소설가, 도서출판 ECP 대표


출판계 전반이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만화 출판 분야가 새로운 발전 산업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 배경에는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일본 대중문화 수입 개방을 공표한 데서 기인하고 있다. 우리 나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우방이면서도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로 인하여 일반 국민의 정서에 민감한 영화, 만화 등 일본의 대중 문화 상품만은 수입을 봉쇄해 왔다. 이제 일본 대중 문화 수입이 개방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제일 먼저 만화가 우리 출판계의 관심을 고조시키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 현실적으로는 일본 만화가 우리 출판계에 유통된 지는 오래되었다. 정식 수입 절차를 거친 것도 있고 불법 유통된 것도 많다. 수입 절차를 밟은 것보다 오히려 수입 금지된 ‘불법 만화’가 더 많이 유통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업계에서는 국내 유통 만화의 약 70% 정도가 일본 만화라고 할 정도이다.
이러한 현실만으로 보면 일본 만화가 들어온다고 해서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불법으로 들어오느냐, 합법으로 들어오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 시장 변화에 있어서 크게 달라질 게 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다. 일본 만화 수입은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에서 한국 만화 시장에 주는 파장이 상상 이상으로 크기 때문이다.

다품종 소량판매에 매달리는 한국만화시장

우리 나라의 만화 유통 시장은 크게 세가지 형태로 나눠 볼 수가 있다. 만화방이라 불리는 대본소, 도서 대여점, 그리고 서점 유통이다.
이 가운데 서점 유통은 사실상 거의 이용하지 않다시피 하는 게 현실이다. 만화는 ‘돈주고 사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와, 서점 유통 구조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다. 만화 출판은 초기 투자가 높은 사업이다. 이에 비해 서점 유통은 자금 회수가 느리고 높은 광고비까지 투자해야 한다. 자금 회수 과정도 보장이 되지 않고 불안하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하여 만화 출판사들은 대량 판매가 기대되는 서점 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대본소 대여점 유통은 현금 회수율이 빠르고 광고비 부담이 거의 필요치 않다. 일정한 초두 공급량 이외의 판매 부수가 늘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만화 출판사들이 이 유통을 선호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시장 특성으로 한국 만화 시장은 ‘소품종 다량 판매’보다, ‘다품종 소량 판매’에 매달리고 있다. 최종 소비자인 독자가 만화를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서 보는 소비 형태에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출판사와 작가는 한 작품이 지속적인 판매가 이루어질 수 있게 질적인 향상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 끊임없이 다양한 종류의 만화를 생산해 내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만화 공장’ 형태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출판사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 만화 시장은 ‘빌려 보는’ 것이 아니라, 판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대량 판매를 위해 독자의 구미에 맞는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 만화를 대하는 국민의 정서 또한 우리와 견줄 수가 없다. 일본은 우리보다 3배나 많은 인구를 가졌고 전 국민이 만화를 즐길 만큼 생활화 되어 있다. 1백여 개의 만화 전문 출판사가 연간 약 3백여 종의 만화를 출판하고 있어 가히 만화의 홍수를 이루는 나라다.
여기에 비해 우리 나라는 아직도 만화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고, 청소년 보호법과 각종 시민단체의 감시 아래 표현의 제약을 받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로 만화를 공개적으로 보기보다는 만화방을 이용하거나 대여를 하여 혼자 즐기는 문화로 인식되어 왔다. 그 동안 일본 만화가 여러 경로로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제한된 환경 안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판매를 위한 유통구조 구축해야

지난 12월 3일 프레스센터 19층에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주관으로 ‘일본 대중 문화 개방과 만화 산업의 발전’이란 주제로 세미나가 있었다. 일본 만화 수입에 대비한 우리의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필자가 느낀 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만화의 ‘심의 제도’가 국내 만화 산업을 지키는 보루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그 동안 만화 심의 제도에 대해 업계에서는 끊임없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해 왔다. 청소년 보호라는 명제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확대 적용함으로써 한국 만화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심의 제도가 수입 개방에 앞서 한국 만화 산업을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일본 만화를 한국 만화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형평에 맞는 제약을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동안 한국 만화는 청소년 보호라는 사회적 정서로 인하여 여러 가지 표현의 제약을 받아왔다. 그 장치로 ‘심의 제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제 일본 만화가 자유로이 들어오게 되면 이 ‘심의 제도’가 완화되거나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표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고 발행하는 일본 만화가 무제한적으로 유입되면 심의 제도를 거친 국내 만화가 발붙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목검을 들고 진검과 싸운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만화 출판사들도 이젠 시각을 넓혀야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궤변에서 벗어나, 다양한 유통 경로를 이용해서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유통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원가 절감과 질적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빌려 보는 만화’에서 ‘사서 보는 만화’로 전환해야 하며, 대본소나 대여점이 공존하더라도 저작권 보호 차원에서 로얄티를 지불하는 형태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일본 만화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한국 만화계의 자생력을 키우게 된다.
또한 우수한 만화 작가를 양성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만화 작가는 스토리 작가와 작화(作畵)자를 통틀어 정의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우리 나라에서는 만화 작가라면 당연히 작화자를 말한다. 지금은 스토리 작가와 작화자를 구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스토리 작가는 작화자에게 소재 정도를 제공하는 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풍토는 우리 만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물론 훌륭한 스토리를 끊임없이 개발하는 뛰어난 작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만화의 발전 이면에는 바로 이 우수한 스토리 작가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만화에 대한 국민 정서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 만화 산업도 언제까지나 대본소 대여점 중심으로 갈 수는 없다. 그 해결책은 유통 구조와 국민 정서의 변화, 그리고 시장 논리에 따른 양서가 많이 생산될 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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