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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프로그램 / 21세기를 향한 우리의 건축문화
도시(都市) 아닌 도시(濤時)를 꿈꾸며
이일훈 건축가
인류가 이룬 가장 훌륭한 업적
인류가 이룬 가장 훌륭한 업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도시를
떠올린다. 유구만 남은 폐허의 도시도 떠오르고 혼돈 그윽한 현대의 도시도
생각난다. 도시는 그 자체로서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했으며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룬 사회는 어떤 것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역사를 통해 기억되고
길이 이어갈 정신과 물질의 성취가 많지만 대부분 그러한 성과의 주체는 개인인
반면에 도시는 개인에 의존한 흔적이 아니라 사회성을 근간으로 한 집합의
흔적이다. 그 집단을 통해 영위된 흔적은 사회성, 공동의 가치, 삶의 방식, 시대적
기술수준 등을 증거하며 인류가 만든 최고의 예술로 꼽히는 데 주저함이 없다.
특히 도시는 그 자체의 구조와 체계유지를 통해 끊임없이 성장과 퇴화를 반복하는
거대한 인간이 만든 유기체라는 점에서 어찌보면 또다른 자연인지도 모른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꿈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신도시의 건설이다. 이른바
산업도시로 불리우는 현대의 도시들. 21세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지난 세기의
치적중에서 가장 문명의 부정적 문제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급조된
신도시들일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많은 도시들이 갖고 있는 수백년의
역사적 흔적과 새로 만드는 도시의 공학적 방법이 충돌한 예가 많아 한층
비관적이다. 도시 만들기는 새로운 도시와 오래된 도시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새도시 만들기의 방법에 치중한 후유증을 걱정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아니 그 염려는 벌써 우리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전국 어느 도시든
특색이 없다거나 가는 곳마다 비슷비슷 하다거나 하는 투정들은 벌써 도시의
매력이 상실되어 가는 정도가 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말한다. 새로운 세기에 가꿀
도시는 어떤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자.
신도시 만들기를 헌도시 고치기로
우선은 ‘신도시 만들기’를 ‘헌도시 고치기’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새로
만드는 방법은 이제 그만 멈추고 헌물건 고쳐 새로 쓰듯 도시도 헌도시를 새롭게
고칠 생각을 가져야 한다. 새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손 때 묻은 오래된 물건을
애지중지 하듯 도시를 보는 사고를 전환시켜야 한다. 세계적으로 오래된 흔적을
간직한 카이로, 로마, 이스탄불, 북경을 둘러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문화재를 가꾸는 안목을 부러워하면서 왜 우리는 있는 것도 부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도시는 기반시설 위에 결국 건축물로 채워진다. 하나 하나 들어선
건물들이 결국 도시의 전체를 결정짓는다. 그러니 개체가 없이 전체가 이루어지지
않듯이 건축없이 도시를 말하기는 어렵다. 살고 싶은 도시를 꿈꾸려면 살고 싶은
건축을 실천하고, 건강한 도시를 꿈꾸면 건강한 건축물을 세우면 된다. 그 바탕에
염두에 둘 일이 때려 부수고 새로 만드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자꾸 고쳐 짓는
건물로 도시를 채우는 것이다. 이때 조심할 일은 고칠 때 잘 고쳐야 한다. 고치는
시대의 기술과 재료를 잘 활용하고 정신을 차려 ‘지금’ 고친 것임을 확실히
드러내야 한다. 어설픈 향수에 빠진 조상 흉내내기는 아주 금물이다.
세상과 인간을 향해 열려있는 도시 건축해야
그 다음 ‘열린 건축’의 실천이다. 건축과 도시가 만나는 접점은 결국 길이다.
순환도로, 자동차 전용도로, 고속도로, 지하차도 모두 길이다. 길이라 부르면
다정하고 도로라고 칭하면 썰렁하다. 그것은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쓰임의
문제이다. 길의 주체가 사람에서 차량으로 바뀐 탓이다. 사람이 빠진 길은 유령의
길이다. 사람이 빠진 건축은 유령의 건축이고 사람이 빠진 도시는 유령의 도시다.
유령의 도시를 사람의 도시로 바꾸려면 사람이 걷고 싶은 길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묻는다. 당신의 집에서 직장까지 연결된 길은 걷기에 편한가.
걷고 싶은가. 안전한가. 쉴 수 있는가. 천천히 걸으며 생각할 수 있는가. 아마
대답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사람의,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길을 만드는 것이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데 으뜸이다. 도시의 공공녹지와 휴식시설과 박물관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나. 연결된 길이 없으면 액자속의 풍경일 뿐이다. 그것을
바꾸는 데 길과 만나는 건축물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길가에 면한
건축물은 소유권은 사유이지만 기능은 공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러한 개별
건축물들은 시민을 위한 시설의 설치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 한
점의 조각, 한 뼘의 쉼터를 제공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열린
건축’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좋은 도시에 대한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시를 향해 열려 있는 건축이 많을수록 좋은 도시이며, 그 열려있는 건축의
마음은 결국 인간의 자세이다. 그 닫힌 회로의 건축으로 가득한 도시는 결국 닫힌
도시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향해, 인간을 향해 열려있는 도시는 열린 건축으로
가능해진다. 그래서 뒹굴고 싶고 머무르고 싶고 살고 싶은, 아니 차라리 내 뼈를
묻고 죽고 싶은 도시. 그 열린 시민의식을 도도하게 드러내는 도시를 위해 건축은
봉사해야 한다. 건축의 문은 도시를 향해 열리고 담장은 낮아 도둑이 숨을 데가
없고, 집안 식구들이 잠들어도 골목을 위해 하나쯤의 외등을 밝히는 봉사하는
건축이 이제 도시의 건축으로 말해져야 한다. 길과 함께 열린 건축.
밀도는 낮고 효율이 높은 도시
또 있다. ‘작은 빈터가 많은 도시’다. 현대사회의 미덕은 생산과 소비의
확장으로 오해되어 왔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그것도 모자라 의사소통의 방법도
매스미디어에 의존한다. 앞으로도 그럴까.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 말하는데 더
정밀하게 보면 선택의 세기이다.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우선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정보도 선택하고 작업공간도 선택하고(재택근무는 그
한예이다), 거주공간도 선택한다(지금처럼 아파트 분양을 위해 줄 서는 일은 없고,
환경과 디자인이 형편없는 아파트는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의 도시는 꽉
채워진 도시보다 느슨하게 비워져 있는 도시가 삶의 질을 높게 보장할 것이다.
비워져 있되 빈터로 균형있게 채워진 밀도는 낮고 효율이 높은 도시는 생각만
해도 즐겁다. 이런 일도 있을 것이다. 어떤 기업에서 사회를 위해 문화적 투자를
하려고 할 때 도서관을 지을까 병원을 지을까 검토하다가 도심 한복판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조그만 숲을 만들자, 빈터를 만들어 사회에 기증하자하는 그런
비움을 통해 도시를 살게 하는 공익사업도 설득력이 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어쨌든 더함의 방식보다는 뺌의 방식이 살기 편한 도시를 가꾸는 데 필요하다.
무언가를 자꾸 만들고, 채우고, 규제하고, 넓히고, 높이는 그동안의 사고방식은
더이상 권할만 하지 않다. 전통적 모습을 회복시키려면 전통을 자꾸 만들려고
하지 않고 전통 아닌 것들을 없애 버리고 남는 것이 전통이듯이 건축도 도시도
마찬가지다. 지난 시대의 ‘하면 된다’의 슬로건은 전형적인 +적 사고표현이다.
그것은 아주 획일적인 채움의 방식이다. 이제는 섬세한 살핌이 따르는 적
사고가 필요하다. 도시를 가꾸는 데 필요한 자세는 ‘하면 된다’ 보다는 해서는
안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보다 큰 실천이다. 대량의 시대에 걸맞게 대극장,
대운동장, 대공원이 만들어졌지만 문화수준이 대거 높아지지 않았듯이 대량의
해법이 반드시 도시와 건축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은 것의 미학에
주목하고 생산성 높고 삶의 질이 좋은 소도시의 탄생이 다음 세기의 기대를
부풀게 된다.
'인간의 도시’가 넘치는 도시를 기다리며
도시를 말하면 종국엔 사람을 말하게 된다. 도시에서 삶이 빠진 지경을 상상할
수 없듯이 현대사회 생활에서 도시를 뺄 수 없다. 현대인에게 도시는 사냥터이며,
농장이며, 교회이다. 정보통신 방법의 발달로 더해지는 인간소외 현상은 오히려
풍요로운 도시의 표정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환경의 문제이다.
풍요와 윤기가 흐르는 숨쉬는 도시냐, 아니면 질식하는 생존의 황무지인가의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바라지 않지만 세기의 재앙이 온다면 그 진원지는 그렇게
우리가 몰두했던 ‘도시’가 될 것이고, 그 구원 또한 ‘인간의 도시’일 것이다.
이제 도시를 위한 도시 통제할 수 없는 비 인간적 모습을 사람을 위한 도시로
바꾸는 일에 머뭇거릴 이유가 조금도 없다. 우리가 사람인 이상, 번잡과
혼돈까지도 녹일 수 있는 시(詩)가 넘치는 그 물결을 헤치는 사람의 힘, 그 도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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