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 21세기를 향한 우리의 건축문화 
 
 

20세기 말에 짚어보아야 할 건축의 합리성, 역사성, 고유성

 
 

주건영  (주)건축사 사무소 기산소장

 체계적인 건축물 속에 드러난 합리성
 
  한국에서는 건축이라는 어휘가 별볼일 없게 쓰인다. 기껏해야 가장 안전한 재산보존 수단으로서의 부동산이 연상되거나 날마다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지저분한 공사장의 이미지, 아니면 돈 많은 부자가 호화스럽게 멋부리는 건물의 이미지가 떠오를 뿐이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세뇌되어 있는 서구학문, 또는 서구적 합리주의, 철학, 형이상학에서 건축이라는 어휘가 폭넓게 그리고 깊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진상을 알게 되면 건축가 여러분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예컨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이성은 본성상 건축적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이성의 산물은 건축적이란 말이고, 그 산물중의 하나인 건축은 본성상 가장 이성적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만드는 건축은 인간의 이성을 본질 그대로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칸트가 얘기하는 건축은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즉물적인 구체적인 형태는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성이 본성상 ‘체계를 구성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체계라는 것은 단편적이고 다양한 인식을 하나의 이념 밑에 조직하는 형식이며 이것이 가장 건축형식과 비슷하기 때문에 칸트가 인간의 이성은 본성상 건축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건축의 모습은 가장 체계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만들어 볼 수 있다. 또 같은 맥락에서 건축은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성적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합리적이란 뜻은 어떤 부분이던지 하나의 체계 속에서 이율배반에 빠지지 않고 서로간에 위계적 질서를 갖춘다는 의미이다. 건축물에서 이런 합리성이 드러나 있을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전통안에서 존재하는 건축의 본질
 
  그런데 이러한 체계의 형성은 머릿속에서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체계가 닦아놓은 기초와 남아있는 흔적 위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체계의 역사성이다. 칸트는 이 역사성을 부분적으로만 암시했다. 칸트를 이어받아 이성의 역사성을 체계 자체의 핵심요소로 승격시킨 사람은 헤겔이다. 칸트가 체계를 건축이라는 구조체로 표상한 것과 같이 헤겔은 체계를 식물이라는 유기체로 표상했다. “꽃봉오리는 꽃이 피어나면서 사라져버리고…. 꽃은 열매에 의해 그 식물의 오류적 현존태로 설명되고, 그 식물의 진리로서 꽃의 자리에 열매가 들어서는 셈이다.” 이 유기체는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그 다양성은 모순에 의해서 설명된다. 모순이라는 변화의 씨앗 때문에 변증법적 역동성이 생겨난다. 갈등과 대립이 변증법적 지양에 의해 시간(역사)속에서 새로운 통일성을 실현한다. 그러나 헤겔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서 체계를 설명하고 있지만, 유기적 구조체라는 점에서는 아직도 건축적 표상은 살아있는 셈이다. 또 합리적 사유를 고집하고 있는 점에서 체계론은 아직 유효하다. 한마디로 헤겔은 체계 안에 역사성을 내면화시켰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를 이성적 체계로부터 해방시킨 최초의 투사는 니체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성전이 건축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의 성전이 파괴되어야 한다. 이것이 법칙이다.” “니체가 말한 것은 새로운 전환의 필요성이었고 이 전환은 역사가 체계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칸트와 헤겔에서처럼 역사성이 체계의 굴레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계의 굴레 밖에서 마음대로 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니체는 현대적 해체론의 출발점이 된다. 이제 합리적 체계는 역사에 대한 통솔력을 상실해 버렸다. 역사는 건축적 이성을 무시해 버리고 제멋대로 아무대로나 굴러갈 수 있게 되었다. 이성에 기반을 둔 철학과 과학이라는 보편 타당한 합리적 개념적 체계는 감성에 기반을 둔 디오니서스적인 해체론에 파괴되었다. 권력의지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실존에 의해 광기는 폭발되었다. 이것이 나치즘의 반지성적인 본질을 설명한다. 인류는 비참한 재난을 겪었지만, 마치 광란의 밤을 보내고 아침에 참담한 후회를 하는 것 같이 때는 늦었다. 지금의 세상도 비슷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듯 싶다. 인간이성의 제어능력을 초월한 금융자본의 광기는 폭발되었다. 이것이 글로벌리즘의 반지성적인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인류는 다시 비참한 재난을 겪을 것이다. 미래건축과 한국건축이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 해체론적 광기이다. 이 광기는 인간의 광기를 뒤집어 썼지만, 사실은 자본의 광기이다. 우리는 다시 이성을 되찾아야 하고 합리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 건축의 역사성을 다시 수립해야 한다. 건축도, 이성이 그러하듯이 본질적으로 전통 안에서 존재한다. 건축도 이성도 기존체계(개념이건 형태이건 간에 상관없이)의 잔해와 파편을 재구성함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의 체계가 닦아 놓은 역사적 터전과 거기에 남아있는 유산’ 위에서 시작될 수 있을 뿐이다. 일정한 법칙에서 이성이나 건축은 전통을 계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의 역사성이고 건축의 역사성이다. 우리가 건축문화의 해를 맞이하여 제일 시급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가 바로 이 합리성과 역사성이다. 이것은 인간이성의 본성이며 또 동시에 건축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합리성과 어떤 역사성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어볼 것이다. 나는 간명하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치경제학적 합리성과 역사성이라고.
 
건축은 사물의 본래적인 것을 추구하는 작업
 
  건축과 정치경제학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리스어 어원을 보면 건축의 발생은 정치경제학적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집의 기원은 살림과 소유 그리고 축재와 분배, 한마디로 정치경제에 있다는 것이다. 경제만이 아니고 정치경제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물질적인 측면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사유의 고유성에 대한 살림과 소유 그리고 축재와 분배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형이상학적 재산의 개념, 즉 고유성에 대한 집착이 정치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오이코스 OIKOS ’와 ‘오이케이오스 OIKEIOS ’ 즉 ‘집’과 ‘고유한 것’사이의 상호관계를 데리다는 밀접한 친족관계로 보았다고 한다. ‘오이케이오스’란 원래 누군가의 집에 속한다는 뜻이며 이것이 좀더 추상화되어 어떤 사물의 ‘고유한 것’ 또는 ‘본래적인 것’을 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건축(집)의 기원은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살림’이기에 정치경제학적 욕구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시짓기를 집짓기로 풀이할 때 정신적 ‘살림’이라는 점은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시를 짓는다는 것은 그 고유한 의미에서 거주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주지에 이르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인가? 건축을 통해서이다. 거주하게 한다는 것으로서의 시짓기는 집짓기다” 하이데거의 집짓기 비유를 우리 건축가들은 시짓기 비유로 환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집짓기(건축)는 시짓기와 같은 의미를 지니며 그것은 어떤 사물의 본성에 맞는 본래적인 것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즉 고유성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건축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건축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유의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기 고유의 것에 대한 집착과 타자를 자기 안에 내면화하려는 욕구, 나아가서 귀속과 배당 그리고 잉여의 재생산으로 향하는 충동이 집짓기와 시짓기 나아가 철학, 정치경제학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모른다. 글로벌리즘의 홍수와 같은 세찬 물결은 은둔자의 골짜기까지 휩쓸어 버린다. 20세기를 끝내는 시점에서 건축문화의 해를 맞이하여 한국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근본문제를 새삼스럽게 다시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근본문제가 합리성, 역사성, 그리고 고유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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