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상 교 고려대 강사
음력 정월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음식, 덕담 그리고
굿이다. 설날, 대보름과 함께 마을단위의 재수발원과 풍어를 비는 굿이
많은 것이다. 서울의 창전동, 전농동, 보광동, 홍제동 등의 굿당은
정월에 굿을 펼치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러한 전통적 모습의 굿뿐 아니라 현대문화에
적응하려는 변화된 굿도 이달에는 많다. 현대식 공연장에서 굿의 기원적
성격과 신비한 성격만을 강화한 부분적인 굿공연이 적지 않은 것이다.
지난 2월 16일(음력 1월 1일)과 17일에는 현대적 모습과
전통적 모습의 두 굿이 첨단 문명과 젊음의 상징이 밀집된 서울 삼성동과
신촌에서 있었다. 전자는 선릉역 주변 ‘서울시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내에서,
후자는 신촌의 창전동(倉前洞) 밤섬 부군당에서 행해졌다. 전자가 1시간 30분동안
현대적 시설 속에서 깔끔하고 화려한 분위기로 진행된 도시풍의 굿이었다면
후자는 창전동에 거주하는 밤섬 주민들 주관하에 11시간 동안 신성함과 흥취만발의
분위기를 조화시킨 전통의 마을굿이었다. 도심 한복판이었지만 두 곳의 굿은
성대했고 진지했다. 아마 우리 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는 굿의 생명력과
중요성을 확인해준 일이 아닐까 한다. 그 두 곳에서 펼쳐진 굿의 모습을
실연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서울새남굿
전수회관에서 2월 16일에 있었던 서울 새남굿은 17거리중
대감거리와 뒷전거리를 중심으로 덕담 성격의 공수를 두드러지게 한
공연이었다. 설날을 맞아 신년운수 대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내면 심리와 굿에
대한 흥미,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굿이 시작되기 1시간
전부터 전수회관 주변에는 자가용이 주차를 위해 꼬리를 물었다. 신년 재수굿을
보기 위함이었다. 연장은 설날을 축하하듯 따뜻한 느낌의 조명이 가득차 있었고
무대에는 굿을 위한 무복, 무구, 제수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무대쪽으로 내려가는
3면의 계단식 관람석은 노인에서부터 어린애까지 다양한 나이와 계층의
사람들이 의자와 사이사이 빈 공간에 앉고 서고 했다. 서울 새남굿은 상류층을
대상으로한 망자천도의 새남굿에 서울 경기 지역의 재수굿인 ‘안당사경맞이’가
결합된 것이다. 원래는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밤새 논다. 거리는 추당물림-부정-가망청배-진적-불사거리-도당거리-초가망거리-본향거리-조상거리-상산거리-별상거리-신장거리-대감거리-제석거리-성주거리-창부거리-뒷전거리
등의 17거리이고 아침부터 시작되는 굿은 14제차로 이뤄져 있다.
굿은 중요무형문화재 104호 서울 새남굿 예능보유자인 김유감만신을
비롯해 김춘강, 이영희(覡)씨 등이 당주를 맡았다. 부정과 청배가 끝나고 김춘강,
이영희에 의해 대감거리와 뒷전거리가 이어졌다. 무선마이크를 통해 객석
구석구석으로 전달된 공수의 내용은 국태민안, 재수발원, 부귀영화, 운전조심,
도적방지, 대학합격, 홍수(횡수)막이 등이었다. 공수 중에서 특이했던 내용은
험난한 시대인 요즘을 잘 견뎌야 한다는 것과 IMF시대 다 물러갔으니
웃고 지내자는 것, 김대중대통령을 외국에서 우습게 보지 않게 해달라는 것들이었다.
무격이 오방신장기를 든채 공수를 하며 객석을 돌 때 중년의 신사, 아주머니,
할머니, 외국사람 등은 만원권을 무격의 몸에 달아 주며 신과 접촉이라도 한
듯 겸손의 태도로 죄스러워하면서 자신과 가족의 재수를 빌었다.
공수가 원래 그렇듯 얼굴만 보고 생각없이 던지는 말인 듯
하지만, 내 감춰둔 소원과 꼭꼭 다져놓은 걱정을 쏙쏙 끄집어 내어 풀어
주는 감동이 있다. 관객 중에는 자신의 속내와 일치하여 절감(切感)하는
공수를 받은 듯 두 손을 모은 채 무격에게 비손 하듯 굽신 굽신 하는
이도 있었고 자식 대학합격시켜 준다는 공수에 어느 아주머니는 핸드백을 다시
열기도 했다. 병은 약이 낫게 하고, 대학합격은 열심히 공부해야 가능한 일일
터이나 최소 그 순간만은 그렇지 않았다. 신이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하는데 누가
감히 그 말에 의문을 품겠는가. 바로 그런 믿음이 쌓여 삶의 원동력으로 이어지는
곳이 굿판인 셈이었다. 공수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직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예정된 공연시간은 마무리 되었다.
밤섬 부군당 굿
밤섬 부군당 굿은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정상 동쪽 조금
아래에 있는 굿당에서 2월 17일 아침 10시 30분경부터 밤9시 30분까지
11시간 동안(과거에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진행 되었다.
이 굿당은 68년 밤섬 사람들이 창전동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옮겨왔다. 그 당시부터 95년까지 굿당은 현재의 위치보다 조금 위쪽에 있었는데
삼성아파트 공사관계로 현재 위치(창전동 삼성아파트 111동 앞쪽)로 이전했다.
현재의 굿당은 대들보 정도만 나무로 되어있고 나머지는 철제와 콘크리트로
되어 있다. 굿당 안 좌측에는 꽃그림으로만 된 군웅, 정면좌측에는 부군부부,
정면우측에는 삼불제석의 무도가 걸려 있다. 굿당 왼쪽에는 굿음식 준비를
위한 방과 부엌이 있고 우측에는 태극이 그려진 대문이 있다. 굿당의
마당에는 비닐천막이 쳐 있는데 이것은 원래 눈비를 피할 목적으로 설치되었겠으나
그보다 굿당의 신성함과 영험의 밀도를 높이는 데 쓰이는듯 했다.
이 굿은 밤섬 주민들로 구성된 밤섬굿 보존회가 운영하는데
형식적으로는 음력 12월 6일날 선출된 좧소임-99년 소임은 이일용(64)좩이 굿
진행을 주관하나 실질적으로는 오랫동안 굿 실무를 맡아 온 마용문(63)씨에
의해 주도된다. 마용문씨는 돼지 삶는 법에서부터 마지막의 소지 등 굿거리의
모든 진행상황에 관여 한다. 그는 이 굿을 ‘전례’라고 표현했다. 유교적 의례와
관습이 무의식과 결합된 예로 이해된다. 굿 준비 과정은 신성하고 정성스럽다.
흰털 동물은 제수로 사용하지 않으며 약과, 포, 떡 등은 매우 정성스럽게
쌓아 굿당에 바친다. 굿에 쓰이는 쌀은 완전한 형태를 갖춘 쌀이어야 하기 때문에
굿 며칠 전부터 제모양의 쌀 한 톨 한 톨을 고른다. 상을 당한 사람은
출입이 통제된다. 그날도 얼마전 상을 당한 사람이 대문 바깥에서 노래부르고
소리치다가 굿 종반에서야 소임과 무녀들의 허락으로 들어 올 수 있었다.
굿날, 주민들은 일찍부터 굿당에 들어선다. 10시가
되자 무녀와 악사, 굿을 연구하는 교수, 학생, 사진작가 등이 들어섰다. 무녀는
김유감만신을 비롯한 15명 내외의 서울 새남굿단이 맡았고 악사는 KBS국악관현악단의
김찬섭씨 등이 맡았다. 10시 반경 무녀들에 의해 술과 안주가 나눠지면서 굿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술과 안주가 나눠지는 시끌벅적한 가운데 김유감에의한 부정거리와
가망청배가 이어졌다. 잠시 쉬며 술과 안주를 나눠 먹은 다음 부군거리-말명거리-신령상산거리-장군거리-대감거리-불사거리-군웅거리-창부거리-뒷전거리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마을 대표들과 주민들이 등장하여 굿당 안과 밖에서
절을 하고 놀이를 흥겹게 이어갔다. 삼지창에 돼지를 세우는 ‘사실세우기’도
있었고 떡시루를 이고 굿당을 돌며 터주대감에 고하기도 했다. 각 거리 중간
중간에 마을 주민들은 손에 돈을 쥔채 무녀들과 춤을 추다가 무녀들이 술과
안주를 주면 돈을 내놓고 또 즐거워 했다. 그들은 난장속에서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복락을 기원하고 맺히고 저린 것들을 풀어냈다. 많은 돈을 벌게 되리라는
기쁜 공수가 있었는가 하면 “올해는 안돼. 내년이라야 돼” 하는 슬픈 공수도
있었다. 굿은 김충강, 이완분, 원옥희, 김종엽 등의 무격에 의해 진행되었다.
여느 굿처럼 무녀들은 부귀영화와 국태민안, 치병, 교통안전을 부여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러리라 굳게 믿으면서 ‘놀아보자’고 소리쳤다. 춤을 추는 주민
중에는 20대 젊은이도 있었으나 주로 50대를 넘긴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엌일을 하던 아주머니들도 춤을 추며 난장에 합류했다. 굿 중간 중간에 심우성,
이두현, 김선풍, 조흥윤 등 연구자들도 함께 어울렸다. 밤이 깊어지면서 굿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는 듯 하더니 뒷전거리가 시작되자 다시 열기는 끝을 향해
달아 올랐다. 마지막 소지를 하는 동안에도 분위기는 식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는
돈쓰는 사람들이 안왔어” 라는 노인들의 소리가 굿당 대문을 빠져나가면서
굿은 마무리 되었다.
와우산 이쪽에서 무녀가 공수를 하고 있을 시간, 와우산
저쪽 홍대앞과 신촌 일대에서는 째즈, 컴퓨터, 환락의 밀어 등이 활개를 치며
뒤엉키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창전동 밤섬 주민들은 그 시간 문화의 밤섬지대를
형성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밤섬 굿당을 모르는 저 신촌의 젊은이들이 50대를
넘겼을 때 밤섬 굿당의 존재를 알게 될까. 소임과 마용문씨의 말처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굿을 보며 확인한 점은 집단적 신명과 원형성에
대한 집착이 우리 사회에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