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혜 연극평론가 한양대학교 교수
미아리고개 정상에 지난해 3월 개관한 소극장 활인(活人)이
있다. 작지만 천장이 높고 콘크리트 구조물이 서있는 오픈 스테이지를 제공한다.
그 구조물 앞이든 어디든 연기구역이 될 수 있다. 고정 좌석도 없어 자유로운
무대 변형이 가능한 실험적 작품을 공연하는데 적합하다. 또한 이 극장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가 있어 운치가 있고 아픈 우리 역사의 한 장을 되돌아
보게 하는 어떤 엄숙함도 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방음이 완전하지
않아 미아리고개를 힘겹게 넘어가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가끔 공연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활인은 성북구청 소유로, 본 구청의 문화 사랑방 정책의
일환으로 옛 조선조의 국립 재활원이었던 ‘동활인서’터에 설립된 극장이다.
소유주는 성북구청 이지만 민간 위탁으로 운영되고 있다. 본 극장에서는 지난
해 11월 말경부터 올해 2월 중순까지 좥98~99 우리시대의 젊은 연극展좦이 벌어졌다.
보다 폭넓은 관객을 수용하고자 전문성 있는 공연을 위한 터를 마련하려
한 운영팀의 기획이었다. 지난해부터 여러 기획물에서 ‘젊은’이란 형용사가
자주 눈에 띄고, 연출자들과 배우들의 세대교체가 차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감지되는 추세이기는 하다. 그러나 참가팀들의 젊음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본 극장의 오픈 스테이지에 적합한 작품들을 유치하고 싶었다는 것이 기획팀의
말이다.
본 연극전에는 4편, 즉 극단 동숭무대의 좥오델로, 피는
나지만 죽지 않는다좦(셰익스피어 원작·박근형 연출·각색), 극단 청우의 좥종로
고양이좦 (조광화 작·김광보 연출), 그룹여행자의 [대지의 딸들] (양정웅 작·연출),
극단 비파의 [변신] (프란츠 카프카 원작·스티븐 버코프 각색·성준현·홍주영
연출)이 참가했다. 앞의 두 작품은 기 공연으로 기획 연극전의 참가작으로서는
신선감이 떨어졌다. 그러나 본 연극전은 [대지의 딸들]만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 공연은 그 수준도 높았지만 활인극장이 지니고 있는
빈 공간의 활용도와 매력을 십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오픈 스테이지에 적합한 작품들을 유치
지난 해 결성되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독특하게 해석한
제의적 공연으로 관심을 모았던 그룹여행자는 이번에 또 한번 제의성 짙은 공연을
보여 주었다. [대지의 딸들]은 이 세상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이 주제이다.
생명을 잉태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대지의 주인이었던 여성은 어느덧 남성의,
사회적 관습의 피억압자로 전락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직관적으로 떠오른
자유스러운 연상들의 모티브”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물론 일관된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각각의 장면들은 독립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여성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거칠게 연결된다.
[대지의 딸들]은 모두 14개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들은 이미 몸을 풀고 있고 관객들은 삼면을 둘러싸고 자리한다.
이내 “그대는 땅 속에서 태어났고 땅 속으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해설이
극의 시작을 알린다. 첫 장면 ‘최초의 무덤’은 딸들의 탄생을 보여준다. 리차드
셰크너가 이끈 퍼포먼스 그룹의 [디오니소스 69]가 연상되지만 극 속에 몰입하기
시작하는 배우들의 몸뚱이들이 관객 또한 극 속에 몰입시키는 힘을 지니기 시작한다.
‘어머니’, ‘가슴 - 관능과 성(性)’, ‘폭력’등의 장면들에서는 피억압자인
여성의 현실이, ‘선전’, ‘빨래터’, ‘어두운 동굴 -욕망’에서는 여성의
본성과 일상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이제 그녀들은 ‘피의 결혼’, ‘디오니소스
- 주연(酒宴)’, ‘동등’등의 장면들에서 자유를 위한 시작을 알리고 드디어
“자유를 꿈꾼다”.
그룹여행자의 연습이 아우구스또보알의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의 테크닉과 메소드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대지의
딸들]은 배우들의 연습을 통해 완성되어 가는 공연이다. 최종의 산물 product이
아니라 과정 process에 중점을 둔 점, 관객을 직접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지만
관객과의 교감 communion을 시도한 점 등 매우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이다. 우리의
본능 속에 잠재해 있는, 그러나 잊고 있는 요인들을 일깨운 거친 공연방식은
아르또에 가깝기에 제의적이다. 여성의 현실과 일상을 그리는 장면들에서 너무
현실적인 모티브와 표제어들이 진부한 감을 주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연을 접했다. 귀를 울리고 폐부를 찌르는 음악(편집·박환) 또한
작품의 제의성에 일조했고 현실적으로는 극장 밖의 자동차 소음을 차단해 관객으로
하여금 극의 현실에 몰두할 수 있게 해 주는 역할도 했다.
마지막 참가작인 극단 비파의 [변신]은 어느날 아침 벌레로
변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떻게 표현될 것인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중 어디에 촛점이 맞추어질 것인지 등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이었다.
1924년에 세상을 떠난 카프카는 무엇보다도 인간 현존의
부조리성을 일찍이 간파한 지극히 현대적인 작가이다. 극단 비파의 젊은 단원들이
주축이 된 공연은 카프카의 원작이 아니라 스티븐 버코프 Steven Berkoff의
각색본을 근간으로 했다. 연출자들(성준현·홍주영)은 주로 혈연으로 맺어진
게마인샤프트 Gemeinschaft인 가족도 기실 이익집단 Gesellschaft과 크게 다를
것 없이 경제적 측면에 좌지우지된다는 유물론적(보다 좁게 말하자면 맑스주의적)
현대의 구조에 천착한듯 싶다. 즉 주인공 그레고르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이었을 때에만 그의 가족들에게 그 존재의미가 있음이 원작에서도
드러나고는 있지만 경제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현재의 우리 상황을
너무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본 [변신]에서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이 많이 약화되었다. 실직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의류외판원으로 실질적
가장인, 너무도 평범한 일상인 그레고르가 왜 갑자기 벌레로 변했는가? 그는
상궤의 일상과 무거운 현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이제 인간에게서
소외된 벌레로서 비로소 인간들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가지는가?
그 여유 속에서 그는 자신과 연계된 가족 및 바깥사회를 냉철히 바라보고는
결국 인간의 무서운 현존에 전율하며 죽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본 공연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공연은 원작이 소설인 때문인지 해설과 배우들의 신체를
활용한 마임적 요소로 이루어졌다. 등장인물들을 축소하여 단순화하고 소도구마저도
지극히 경제적으로 사용한 점, 특별한 캐릭터를 지니지 않는 단순한 외부인들인
지배인과 하숙생을 한 배우(홍준모)가 이중역으로 해낸 점,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별다른 분장 없이 인간의 모습이고, 그의 가족들(아버지·고기혁, 어머니·문준희,
누이동생·박수미)이 다족류의 벌레를 신체로 묘사함으로써 기실 누가 인간적
존재이고, 누가 벌레 같은 존재인지를 분명히 한 점 등은 높이 살만 했다. 무대는
기존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십분 활용했고, 철근 구조물로 감옥같은 주인공의
방을 암시한 점은 좋았으나 이 공간이 가족들의 활동영역에 비해 너무 넓게
할애된 감이 없지 않았다. 또한 펑크족의 분장에 강시 걸음을 걷는 하숙생의
표현은 그 의도가 불분명했다. 카프카의 [변신]이 현대적 작품임은 분명하나
이런 외형적 표현이 작품의 현대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