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출판-저작권 보호와 출판문화
 
김기태  /출판평론가,혜천대학 출판학과 겸임교수

최근 새 학기를 앞두고 우리 학술출판계는 책의 무단복제가 성행함에 따라 이른바 ‘위기상황’을 넘어 아예 ‘출판중단’이 불가피하다는 선언을 한 바 있다. 특히 대학가에서는 기업화한 복사업체를 통해 대량으로 무단복제가 성행함으로써 교재로 쓰이는 학술도서들이 전혀 팔리지 않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어느 대학에서는 수강생이 200여 명인 강좌에서 정작 교재는 단 1권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단다.
엄연히 ‘저작권’이라는 권리가 존재하며, 이를 어겼을 때에는 민사상, 형사상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기엔 후안무치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출판은 저작자와 출판자, 그리고 편집자를 커뮤니케이터로 삼아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문화사업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아 저작과 출판 및 편집에 종사하는 이들이 각자의 업무에 종사하면서 지속적으로 ‘저작권’을 의식하는 일은 드물다. 완성된 원고를 출판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계약을 맺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저작권적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경우에도 일반적인 관행의 수준에서 의논하는 것으로 계약은 성립되게 마련이다. 
원고를 취급하는 출판실무자들 역시 일상적인 순서에 따라 편집 및 제작단계를 거쳐 책을 발행하는 데에 이르면 새삼스럽게 저작권  따위를 염려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인 듯하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서 계약사항의 이행에  따른 불만이나 원고내용의 수정 또는 인세나 원고료 등에 관한 이견이 생겼을 경우, 혹은 애써 출판한 책의 중복출판이나 무단복제 등이 문제될 경우에는 저작자나 출판실무자 모두에게 저작권은 심각하게 다가온다. 그제서야 우선 급한 마음에  주변에서 저작권법 조문을 구해 읽기 시작하는데, 그 문구만 보아서는 도무지 해답을 찾기 힘들다. 그 다음으로 저작권법에 관해서 해설해 놓은 전문서적을 구해 보지만, 아무리 이론적으로 뛰어난 연구서라 할지라도 당사자들이 직면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해당 연구서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법규와 실무  사이의 적용 문제가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 
특히 곤란한 경우가 저작권 또는 출판권 침해사건이 생겼을 때 그 부당성을 판별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하는 때이다. 그러한 판단이 곤란할 때에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의 ‘조정제도’를 이용하거나 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법원을 통해 ‘판결’을 받아내는 것인데, 그럴 경우에도 가해자 및 피해자 쌍방이 저작권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정확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 전통사회의 통념상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라는 속설이 용인되는 분위기 속에서 글 도둑 또한 도둑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고, 설혹 자기 글이 도둑맞은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체면상 드러내놓고 싸우는 것을 피하여 법정에까지 가서 흑백을 가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울러 재판을 하게 되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데다 명예와  직결되는 지적 소산인 저작물을 금전적으로 파악하고 싶지 않다는 의식도 작용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저작권 관련 분쟁이 적극적, 법률적 해결이 아닌 소극적 항의나 합의에 의하여 해결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등 저작자별 권익단체들이 생겨나고, 이 단체들이 저작권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집중 처리하기 시작함에 따라 저작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관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작권을 침해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걸까? 
우선 저작권 또는 저작권법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침해의식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태연히 침해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지식인, 문화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저작권에 관해서 조금은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저작물을 자기가 이용하는 것은 침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타인의 저작물을 자기의 저작물에 이용할 때 처음부터 ‘인용’이라고 정해 놓고 무단으로 써먹고는 태연히 지나가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저작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인용의 조건을 모르고 있으며, 그러한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저작권 침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저작권’은 양심을 위한 권리
마지막으로, 저작권 또는 저작권법에 관해서 일단 이해의 폭이 넓고, 침해란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버젓이 침해행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의 침해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뻔뻔스러움이 강해서 만일 침해사실이 드러나더라도 당당히 싸운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저작물을 도용하여 어구와 표현에 조금만 손을 가하는 것으로 침해에 해당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사례는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많고, 이른바 지식인 또는 문화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보이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저작자나 출판실무자들에게는 저작권에 관한 이해와 함께 법규에 관한 지식, 그리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추상적이고 애매한 규범들을 급변하는  현실 속에 응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책을 무단복제하는 행위는 분명 범죄이며, 그런 일이 만연하는 나라는 문화적으로 후진국임에 틀림없다. 나날이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지적재산권, 특히 저작권의 보호야말로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모든 이들의 ‘양심’을 위해 반드시 지켜져야 할 권리임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