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리뷰-영화

 

영화는 인권차원에서 보호받아야 한다

 

양윤모  영화평론가


사회적으로 공진협의 검열로 등급보류를 받은 영화 「노랑머리」(김유민 감독, 픽션뱅크 제작)를 논하기 위해 두 번 보았다. 첫 번째는 MBC-TV PD 수첩에서 취재코자 시사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객관적인 견해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평론가 5명과 일반 관객 5명이 초대되어 나왔다. 그런데 평론가와 관객은 하나같이 이 영화의 극장상영을 금하는 '등급보류'에 대해 비판했다. 오죽하면 담당PD가 당신들은 모두 '자유쥬의자'인가 하고 되물었을 정도다. 이것이 개방화, 민주화, 시민사회의 대중의 흐름인 것이다. 그들은 전혀 「노랑머리」와 이해관계가 없다. 단지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의 볼 권리와 비판할 권리를 주장했다. 그런 다음에 작품성에 대해 본격적인 비평이나 도덕성에 대한 논의의 과정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진협의 등급보류 판정은 시민사회의 성숙을 따라잡지 못한 닫힌 시대의 유물과도 같다.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다시 본 것은'젊은 영화비평집단'회원들이 이 사회적 사안을 전문적인 견지에서 검토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마련한 자리에서다.

   등급보류 판정, 닫힌 시대의 유물과도 같아
  「노랑머리」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 선 이후 영화검열 파동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진흥공사 판권담보 융자에 당선되어 제작된 일종의 3억 5천만원짜리 저예산 영화다. 등급 보류된 영화는 극장상영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작품은 사장되고 제작자는 막대한 재산상의 손실을 입게 된다. 관객에게는 새로운 영화에의 접근이 금지되며, 예술가는 표현과 창작의 자유에 좌절을 느끼며 상처를 입게된다. 물론 3개월 후에 재심의를 청구할 기회가 없는것은아니나 어떤 형태로든지 작품은 훼손될 것이 뻔하다. 시사회가 있은 후, 이번 '공진협'의 처사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항상 강하다는 이중적인 가치관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었다는 점이다. 왜 이런 정도 표현의 내용물을 갖고 심의위원 6명 전원일치로 등급보류를 내렸는지 의심의 눈초리가 쏠렸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① 과도한 섹스 ② 트리플 섹스 ③ 동성연애 ④ 간접적으로 표현된 남자 주인공을 죽이는 장면은 이미 한국의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한 영화와 외국영화의 수입공개 등으로 관객들의 눈에 익을 대로 익은 내용들인 것이다.
  가령 과도한 섹스노출은 이미 임권택 감독의 「노래하는 계집, 창」(태흥영화사 제작)에서 그 수위가 제시된 바가 있다. 트리플 섹스에 대한 묘사는 미국 영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에서 다뤄졌을 뿐만 아니라 5월 1일 개봉을 앞두고 최근에 심의를 통과한 「비지니스 플레져」에서는 더 과격하게 묘사되고 노출시간도 길다. 그런가 하면, 여성간 동성애적 관계는 지난해 개봉된 미국영화 「바운드」와 몇 년전에 공개된 바 있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도 보여진 바 있다. 인격을 경시한다고 지적된 부분만 보더라도 이보다 더 잔혹한 영화는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공진협은 원칙성의 결여는 물론 상호 형평성의 논리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쇼비니즘과 식민지 시대의 악령을 재현하고 있다. 더욱이 제작자에게 소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한마디로 영화에 대한 폭력, 그 자체다.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영화 「노랑머리」

「노랑머리」에서 그려진 남성과 여성의 현실관계에 대해, 유심히 살펴보면 남성의 거세된 현실적 억압이 느껴진다. 이때 남성에 있어 거세된 위상이란 곧 가부장적 사회의 권위 상실과 자기 변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퇴출된 IMF적 상황이 빚어낸 인간형으로 자기 역할 또는 남성적 역할이 무의미해진 존재를 말한다.
  남자 주인공 영규(김형철)는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핵심이랄 수 있는 증권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한때 잘 나가던 시절, 부하 직원이나 다름 아닌 은미(김희옥)와 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직으로 인해 삶의 보금자리인 일자리와 사랑마저 잃게 된다. 지금 그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성의 유희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두 여성, 유나(이재은)와 상희(김기연)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동거의 불확실성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옛날 한때를 회상하거나 옛 사랑의 동료 은미를 그리워하며 모성애를 희구하는 제한적인 만남에서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며 동정심의 발로여서 정상적인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는 '의탁'에 지나지 않는다. 영규는 영화의 출발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지로 실존하는 것이 아닌 규제 받는 대상, 요즘 남성상의 한 형태로 다뤄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운명은 타인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만다. 한국영화에 있어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역할관계가 반전된 캐릭터는 좀처럼 등장하기 어려운 경우다.
  이같은 현실을 토대로 전개되는 트리플 섹스, 여성간의 동성애, 남녀간의 성행위는 고독의 극점에 와 있는 현대적 인물의 현실과 감정을 투영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표현에 있어 다소 자극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관객의 섹스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한 계산된 장치라고만 보기 어렵다.
  이 영화의 설득력은 기존 문법에 의한 복선과 논리적 전개를 펼쳐 가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독특한 코드 나열에 의해 읽어야만 하는 새로운 영화의 범례를 제시하는 측면에서 해석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해부족만을 이유로 모럴파괴의 공작성을 핑계로 삼아 재단하거나 제도적인 규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

   영화를 보호하는  신권리장전이 만들어져야 할 때
  이제 영화와 기타 예술작품은 인간의 인격과 더불어 동격의 가치를 부여받아, 천부적인 인권의 보호법에 따라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제도의 검열과 규제로부터 입은 피해와 명예훼손에 대해 보상을 청구하고 소송하는 노력과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법률적 문제제기와 판례를 남기면서 예술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단선적이고 관례적인 차원에서 다뤄지던 소극적인 대응의 현실처방이 아닌 적극적인 차원에서 극복되어야 한다.
  이제 '영화는 곧 인격이다'라는 관점을 획득하여, 일반대중이 보고 비판할 수 있는 권리에 앞서 휘둘러지는 권력과 낙후된 제도의 관점에 의해 곡해되어 편견의 대상으로 떠올랐을 경우에 대비하는 새로운 차원의 권리장전이 세워져야 한다. 각가지 영화는 여러 인종의 형상과 맞먹는다. 따라서 개별 영화의 자유의지와 개성에 대한 제도의 딴지걸기는 곧 인종차별주의와 같으므로, 그것의 철폐운동을 전개할 필요성과 당위성이 현실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영화는 곧 인격이다. 그래서 인권차원에서 보호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