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제48회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모두에게 열린' 예술의 축제마당
                                  
-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 개막

이혜경(본지담당)

 

'물과 예술의 도시' 베니스는 지금 한창 축제 무드에 잠겨 있다. 제48회 베니스 비엔날레미술전 개막식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는 6월 9일부터 3일간 전세계 미술관계자들과 취재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를 갖고 개막식이 열리는 6월 12일부터 11월 7일까지 약 5개월 동안 펼쳐질 베니스 비엔날레미술전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미술전으로 세계 현대미술계에서 독자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도시국가로서 오랜 전통을 지닌 베니스시가 1895년 이탈리아 국왕 부처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한 미술전시회가 모태가 된 베니스 비엔날레는 이후 격년제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특색
 베니스 비엔날레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시관의 운영을 국가가 주관하는 행사로서 각 출품국가의 정부로부터 선정된 작가의 작품을 국가관에서 전시하는 것이 특색이다. 즉 다른 국제전의 경우처럼 맘모스 전시장 내에 각국관이 파티션으로 구획되지 않고 독자적인 건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행사에 참여하려면 독립된 국가관을 건설해야 한다. 현재 본 행사장인 자르디니공원 내에는 이탈리아관을 포함하여 25개의 국가관과 베니치아관이 있다. 독립된 전시관이 없는 국가는 시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임시전시장을 빌려서 전시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도 우리 나라는 지난 95년부터 독립된 전시관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의 휘트니 비엔날레, 브라질의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단연 독보적인 국제전으로 통한다. 앙리 마티스, 토비 베크만, 포크리에 등 현대미술계의 거장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한 베니스 비엔날레의 권위는 이 행사의 수상작가는 물론 작가를 배출한 해당국가까지 문화예술의 선진국 대접을 받을 만큼 정평이 나 있다. 또한 별도의 전시관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하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가늠케 하는 하나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우리 나라는 지난 95년 세계 25번째로(동양에서는 두 번째. 그 동안 일본만이 독립된 전시관을 갖고 있었다) 국가관을 열고 전수천(95년) 강익중(97년) 등이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잇달은 쾌거를 이룸으로써 당당하게 문화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관
 베니스 비엔날레 창설 100주년을 기념하여 설립된 한국관은 중국 아르헨티나 등 23개국이 독립관 건립을 위해 30년 동안이나 치열한 로비를 벌였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실제로 전시관이 없는 나라들은 이탈리아 정부가 세운 임시전시장에서 그림 2~3점을 걸고 곁방살이를 해야 하는 문화후진국의 설움을 맛보아야 한다. 해마다 40~50여개 국에서 참가신청을 하는데 전시관은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독립관 확보를 위한 각국의 경쟁 열기도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한국관 개관에 얽힌 우여곡절도 만만치 않았다. 사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관이라는 엄청난 기념비적 사건 뒤에는 93년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백남준은 한국관 설립의 아이디어에서 로비활동에 이르기까지 숨은 일꾼 노릇을 톡톡히 해냈고 여기에 당시 문체부를 비롯한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가세해 95년 6월 7일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이 정식으로 개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해에 한국 국적으로는 처음으로 전수천의 설치작품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 그 한국인의 정신'이 특별상을 수상하기까지 했으니 우리로선 경사가 겹친 셈이었다.(93년 45회 행사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백남준은 한국 국적이 아니었다) 또한 2년 뒤인 97년 47회 행사에서도 우리 나라의 강익중이 잇달아 특별상을 거머쥐는 등 베니스 비엔날레 사상 드물게 한 국가에게 2년 연속 특별상이 돌아가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아울러 그것은 우리 미술의 세계적 위상을 한 단계 높이는 뿌듯한 성과로 기록되었다.

제48회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이제 48회 베니스 비엔날레 개막을 앞두고 우리 문화예술계에 다소 들뜬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바로 지난 4년간에 이룩한 놀라운 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주제는 이태리어로 '모두에게 열린'이라는 뜻을 가진 'APERTO over ALL'.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행사는 세계각국 문화의 다양성과 작품의 독창성에 주목할 것으로 보인다.
 베니스 비엔날레 협회전, 미술전의 총감독,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40여개국의 전시관 대표자 및 커미셔너들이 참석한 대표자 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최근 10년간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작가, 특히 여성작가들의 참여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본 전시에는 현재 5개 대륙 약90명의 작가들이 선정되었으며,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장들의 작품전시와 35세 이하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를 구분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자국 내에서도 개별적인 전시공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젊은 작가들에게 거장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장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모두에게 열린' 전시주제의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회의 총감독으로는 지난 97년 제2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로도 활동한 바 있는 스위스 출신의 헤럴드 제만이 선정되었다. 우리 한국측의 커미셔너로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성신여대 송미숙교수가 선정되었으며, 여성 조각가 이불과 남성화가 노상균이 한국관 전시작가로 작품을 출품할 예정이다. 이들 두 작가 모두 국내외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려온 젊은 작가라는 면에서 이번 출품에 갖는 기대 또한 크다.

인터뷰

 한국관 커미셔너 송미숙교수 - 신선하고 독창적인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주목하였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로서 출품작가 선정을 담당한 송미숙교수가 작가 선정에 앞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 전시공간의 취약성을 최대한 극복할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비엔날레 한국관은 항구도시 베니스의 특성에 초점을 맞춘 설계로 건축조형물로서는 가치가 있지만 전시공간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실제로 현지답사를 해본 결과 협소한 공간을 지나치게 세분화한 내부구조가 아무래도 미술가나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보면 불만의 요소가 적지 않았다.
 "물론 바다에 면해 있는 전시공간의 주변환경을 염두에 둔 듯한 배 모양의 구조물은 건축미학적으로나 베니스라는 항구도시의 지역적 문맥과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작품을 전시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내부구조가 여러 가지 제약으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유일하게 작품을 걸 수 있는 큰 벽면은 파도처럼 휘어지게 설계되어 있고 천장을 포함한 나머지 삼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작품을 어떻게 전시해야 할지도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명, 또는 2명의 최소인원으로 작가 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이불과 노상균이 그 물망에 올랐다.
 "처음에는 좀더 원로급에 해당되는 작가를 고려해보기도 했지만 한국관의 '포스트모던'한 공간적 성격에 역행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에 제외되었고, 그보다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작품성이 엿보이는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상균과 이불은 각자가 독특한 작품세계를 갖고 있지만 오늘날 대중문화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키치적 요소나 레디메이드 재료를 활용하여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실제로 이번 행사에 전시될 이불의 '노래방' 캡슐과 노상균의 시퀸 패널은 관객의 참여가 절대적이다. '노래방'은 관객의 참여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아울러 전시관의 벽을 다 채울 때까지 끊임없이 돌고 도는 노상균의 시퀸은 보는 이의 신체를 벽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밀어내는 듯한 착시효과를 통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현대사회의 혼돈을 경험하게 한다. 또 한가지 커미셔너로서 송교수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의 상호이질적인 성향들을 이 두 작가에게서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노상균과 이불은 공통점과 상이성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노상균의 섬세한 시퀸 작업들이 수동적이고 명상적인 삶의 단면을 조명하며 '여성적'인 감성을 전달하고 있다면, 대형 CD스크린을 포함한 이불의 '노래방' 캡슐은 물리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원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적'인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노상균의 작품세계가 50년대의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모더니즘 개념의 칸트 식 자기비판을 소재로 한다면, 이불의 퍼포먼스나 설치작업들은 데뷔 초기부터 지금껏 포스트모던 계열의 페미니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작가의 이렇듯 독특한 작품세계는 인간의 내면적 가치체계의 양면성과 모순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무대에서도 충분히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송교수는 두 작가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전시공간을 둘로 나누고 좀더 큰공간은 여성 작가인 이불에게, 그리고 이보다 약간 작은 부수공간은 남성 작가인 노상균에게 할당하였다.
그것은 현대한국사회의 특징적 변화인 남근 중심의 가치체계에 둔 전통의 붕괴, 혹은 역행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95년부터 현재까지 호암미술관 전시기획 총지휘를 맡고 있는 한편 바우하우스 화가들(96), 구겐하임걸작전(96) 등 굵직굵직한 전시회를 국내에 선보인 기획사답게 이번 행사에서도 작가 선정은 물론 조명 하나에서부터 바닥 장치에 이르기까지 단연 그의 치밀하고도 꼼꼼한 성격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는 정평이다.


 한국관 전시작가
이불 - 이미지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킨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최근 10년 동안 국내에서보다는 국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이불(35)은 일찍이 관습화된 아카데미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퍼포먼스와 인스톨레이션, 오브제조각과 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서 광범위한 포스트모던적 이슈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왔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가로는 국내 최초의 여성작가인 그가 국제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97년 한국작가로는 최초로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어 98년 뉴욕구겐하임미술관이 시상하는 휴고보스상 후보에 오른 데 이어 올해는 일본 시즈오카, 스위스 베른에서 각각 전시회를 열었고, 오는 6월말에는 오스트리아 빈미술관에서 개인전을, 2000년 1월에는 미국 워터아트센터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폐막식을 갖는 'Let's Entertain'전에 세계적 작가들과 함께 참가하는 등 국외에서의 활동만으로도 일정이 빠듯할 지경이다.
 그는 특히 뉴욕현대미술관 초대전에 썩어가는 생선을 출품했다가 악취 때문에 작품이 무단 철거되는 사건으로 전세계적인 관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었다. 소위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라는 곳에서 한 예술가의 작품을 단지 다른 작품전시에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작가의 허락도 없이 전시기간 내에 철거해버리는 비상식적인 처사는 전세계 미술관계자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91년부터 시작한 '생선 작업'은 시각의 절대우위성을 전복시키기 위한 의도로 후각을 끌어들인 작품이었습니다. 즉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이상화된 자연의 상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자는 것이었지요. 아마도 그러한 시도가 그들에게는 낯설고 불쾌한 체험으로 받다들여졌을 테지요."
 결국 사건은 미술관 측으로부터 공개사과와 함께 후원금 2만달러를 돌려 받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는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으로 문제의 '생선 작업'과 '사이보그', 그리고 신작인 '노래방 작업'을 같이 내놓기로 했다. 특히 본 전시에 출품된 '노래방 작업'은 한국적 삶의 단면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벌써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가 작품을 제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객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
 "내 작품을 보고 관객이 어떤 느낌을 갖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고, 어쩌면 작품 자체를 즐길 수도 있겠지요. 나는 다만 인간과 삶의 양면성을 제시하고 관객은 그것을 어떤 형태로서든지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일정한 작업스타일에 자신을 묶어두기를 거부한다. 삶은 변화의 연속이고 그가 예술의 주요테마로 삼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 또한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그는 생명과 죽음의 미학적 개념을 뒤엎고 상식과 비상식의 가치를 부정하며 끊임없이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작업으로 일관해왔다. 그에게 변한 게 없다면 그것뿐이다. '모두에게 열린' 이번 전시의 주제는 아마도 그가 이제껏 해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켜갈 예술가로서의 지표가 될 것이다.


 한국관 전시작가
노상균 - 침묵으로 환원되는 생명과 죽음의 메시지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미국 프랫대학원을 졸업한 노상균(40)은 주로 생명과 죽음의 신화적 상징인 물고기를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연관시킨 시퀸작업을 통해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추구하였다.
그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형상화할 수 있는 일종의 상징적인 대상물로서 화려한 여성복이나 무대의상을 장식하는 데 자주 쓰이는 시퀸을 '발견'한 것이다. 광선의 각도와 변화에 따라 반짝거리는 이 투명한 플라스틱 재료는 물고기의 비늘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명의 서술적 묘사와 예술의 본질에 대한 해답을 현재진행형으로 제시하는 '발표된 오브제'로서 활용되고 있다.
 92년 뉴욕 히긴스홀갤러리 개인전을 계기로 화단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그가 데뷔 직후부터 지금까지 집요하게 기용하고 있는 시퀸은 자신의 체험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어린시절,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 나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그러니까 한낱 물고기처럼 아무 희망도 목적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채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비늘이 물고기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물감은 캔버스라는 '신체'를 커버하는 것이다. 그는 비늘 하나하나의 기하학적 단위와 그것의 반복에서 오는 패턴구조를 모든 자연현상을 형상화할 수 있는 그림의 기호로서 파악하였다. 회화구조로서의 비늘이 갖는 잠재력, 그리고 회화의 평면성과 비늘의 표피성이라는 유사성 외에도 그림에서의 빛의 변화에 따른 색채 변화는 물의 깊이와 빛의 굴절 방향에 따라서 달라지는 비늘 표면의 변화와 동일하다는 회화적 '발견'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비늘을 대체하는 사물로서 시퀸이라는 기성의 소재를 과감하게 회화적 요소로 끌어들었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보여지는 사물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는 시간에 내던져진 '침묵'입니다. 나는 그것이 사물로서의 페인팅의 속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물속에 잠겨 있는 물고기의 느낌이 그런 속성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지요."
 일련의 '물고기 작업'을 통해 그가 새롭게 발견해 낸 시퀸의 매력은 그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을 품는 과정에서 터득한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확실히 시퀸이라는 소재는 캔버스의 물감과 물고기 비늘의 적절한 대용물이다. 동시에 플라스틱 재료가 갖는 가벼움, 현란하게 모습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은 색채, 깊이가 없이 즉발적이며 대담한 자기노출과 공격성, 그리고 현시성에 강한 현대적 감수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주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세기말적 감수성을 은유하는 물질에서 오히려 그 반대의 속성을 발견함으로써 역설적 미학의 세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즉 비늘을 상징하는 시퀸의 연속적인 반복을 통해 물고기의 미끌거리는 물질적 속성을 추상적 화면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물고기는 사물로, 사물은 침묵으로, 침묵은 다시 그림으로 환원된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인 시퀸작업은 방 전체를 상아핑크 색채의 시퀸으로 덮어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운데 그보다 약간 진한 광택의 시퀸으로 장식된 등신대 사이즈의 레디메이드 불상을 방 입구에 전시함으로써 관람객을 방으로 끌어들이는 기능을 한다. 불상이라는 신앙적 숭배의 대상에 천박한 장식물을 부여함으로써 상업화되어가는 종교의 역기능을 고발하고, 아울러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불상의 표면을 통해 우주와 인간과의 끊임없는 불협화음을 이미지화하는 그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엄청난 혼돈을 경험하게 한다.
 관객은 무심코 그의 작업 속으로 끌려들어왔다가 곧 폐쇄공포증 같은 혼돈을 경험하며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어한다. 삶이란 것 자체가 무질서와 혼돈의 영역이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계적 일상 속에서 갈수록 초라하고 위축되어가지만 스스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다. 노상균은 바로 그 유쾌하지 못한 삶의 단면들을 제시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영혼의 통증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퀸이라는 물질의 가볍고 현란한 느낌이 시각적 착시효과를 주기 때문에 관객들은 망막이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혼돈의 질서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1세기의 한국화단을 이끌어갈 동량답게 삶에 대한 폭넓은 통찰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