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뷰 - 문 학


 비평의 위기, 위기의 비평
「현대문학」지의 '죽비소리'에 대한 단상

 

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학교 교수)

 

 문학 월간지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하여, 5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현대문학}지에는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형식의 서평란이 자리하고 있다. '죽비소리'이다. '죽비소리'라는 서평란은 사실은 여타의 신문, 잡지에 실리는 서평 형식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나, 한 가지 점에서 여타의 서평란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현재 한국문학 전반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하며 그를 위해 비록 제한적이지만 글쓰는 사람의 익명성을 보장한다는 것. 이러한 독특한 기획 때문인지는 몰라도 '죽비소리'는 시작 이래 줄곧 문학판에 뜨거운 화제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이 '죽비소리'가 이번 5월로 어느덧 3년째를 맞는다고 한다.
 {현대문학}지의 '죽비소리'라는 서평란이 화제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회자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죽비소리'에 실린 서평들이, 이 서평란의 기획 의도처럼, 현단계의 문학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밀도 있게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비소리'의 서평들은 대부분은 몇몇 비평가들에 의해 혹은 수많은 독서대중들에 의해 우리 시대의 문제작으로 공인된 작품들의 맹점들을 낱낱이 해부하고 그를 전면에 드러냈다. 그렇게 비판적으로 다루어진 작가들만 하더라도 이인화, 이문열, 황지우, 은희경, 신경숙, 윤영수, 한강, 배수아 등이니 우리 시대의 문제작가로 한결같이 떠받들어졌던 작가 대부분이 비판의 자리에 서게 된 셈이다. 이렇게 '죽비소리'는 현단계 문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으며,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죽비소리'의 서평을 문학비평 전반에 새로운 활로를 제공하는 중요한 계기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문학비평에 가해지는 강한 비판
 그러나 {현대문학}의 '죽비소리'는 우리 문학비평 전반에 대한 경멸이자 조소이며, 따라서 우리 문학비평의 슬픈 자화상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죽비소리'는 현단계 문학에 대한 비판을 유도하기 위해 저자의 익명성을 제한적이지만 보장한다. 저자의 익명성이 보장되어야만 한국문학에 대한 올곧은 비판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자의 이름이 밝혀질 경우 어떤 작품에 대한 비판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죽비소리'의 편집자의 태도에서 우리는 현재의 문학비평에 대한 불신의 정도가 어디까지 이르렀는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전에도 문학비평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의 비판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한 불신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최근 문학비평에 가해지는 비판은 문학평론의 진정성 자체를 의문시하고 부정한다. 문학비평 전반이 출판자본에게 자신의 고유한 영혼을 팔아넘겼다든가, 아니면 철저한 권력에의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든가 하는 것이 문학비평에 가해지는 비판의 골자인 바, 이를 정리하자면 문학비평에서 문학의 논리는 사라졌으며 그 텅빈 자리를 문화산업의 논리 혹은 권력에의 의지가 대신 채워버렸다는 것이다.
'죽비소리'의 저자의 익명화는 문학비평에 대한 이러한 불신의 집약적 표현형식이다. 저자의 익명성이 보장되면 문화산업의 논리나 권력에의 의지가 들어설 여지가 제한되고 따라서 문학의 논리가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하는 셈이니, 이러한 판단만큼 현단계 문학비평에 대한 강한 불신의 태도도 없을 터이다.
 그렇다. 최근의 문학비평에 대한 불신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깊으며, '죽비소리'란의 저자의 익명화는 바로 이러한 불신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이정표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하나의 평론이 씌어지기까지 개입하는 여러 요소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재 우리의 평론 전반이 서 있는 위치를 다시한번 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하기에는 충분하다.

우리의 문학비평은 어디쯤 위채해 있는가
 일찍이 벤야민은 논평(Kommentar)과 비평(Kritik)를 구분하여 사용한 바 있다. 그리고 각각을 논평은 작품 속의 단어와 그 해석에 매달려 작품의 내용을 확정짓는 글쓰기라면, 비평은 작품 속에 은폐된 진리의 세계를 읽어내 진리 내용을 드러내는 글쓰기로 규정한다. 논평이 사실내용(Sachgehalt)의 확립을 그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면, 비평은 진리내용(Wahrheitsgehalt)의 정립을 그 최종의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이 작품을 매개로 해서 초월적인 진리내용을 향해 나서는 글쓰기인 비평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음은 물론이며, 벤야민 특유의 도저한 비평체계는 비평적 글쓰기의 실천적 결과물임은 물론이다.
 이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문학비평은 어디쯤 위치해 있는가. 실제로 어느 시기부터인가 우리의 문학비평에서 분명 작품 속에 은폐된 진리내용을 찾아나가는 열정도, 자신의 고유한 진리를 타자에게 전이시키기 위해 행해야 할 위신투쟁의 열의도 찾기가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진리를 증명하기 위한 위신투쟁의 열의가 옅은 만큼 당연하게도 현재 존재하는 그릇된 경향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사이비 우상과의 결연한 대결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작품의 내용을 확정짓는 고단한 노력도 없이 다른 곳에서 유행하는 담론에 맞게 작품을 자의적으로 해체하거나, 아니면 한 작품의 발생론적 조건이나 계보학을 정립하려는 노력은 물론 앞선 시대의 성과와의 비교도 없이 한 작품을 평가하기에 급급한 양상이 펼쳐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을 매개로 초월적인 진리내용을 드러내기는커녕 거의 모든 작품을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노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내용을 찾아내려는 열정의 회복
지금, 이곳의 문학비평은 '수사가 뛰어난 독후감'이나 소위 '덕담비평'(?)으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으며, 그래서 현단계의 문학비평에서는 문학외적인 요소 혹은 비평가의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할 소지가 많아졌다. 한마디로 현단계 문학비평의 비판적 태도가 사라진 궁극적인 요인은 결국 우리의 문학비평이 작품 속에 은폐된 진리내용을 찾아내려는 열정이 현저하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현단계 문학비평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문학작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아니라 비판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자세이다. 다시 말해 문학작품 속에 은폐된 진리내용을 찾아내려는 열정의 회복이며, 그리고 이러한 열정의 회복은 각각의 문학 주체가 자신만의 고유한 진리를 모색하고 그것을 증명하려 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죽비소리'의 저자의 익명화는 재고되어야 할 터이다. 저자의 익명화는 한편으로는 현단계 문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가능하게 할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유한 진리를 증명하는 작업은 뒤로 한 채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의 문학비평은 분명 하나의 작품, 그리고 한 명의 작가, 그리고 하나의 경향을 역사적인 문맥 속에 위치시키려는 치밀함과 그것을 매개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진리내용을 정립하려는 열정이 절실한 시점에 와 있다. {현대문학}지의 '죽비소리'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고 모처럼 문학비평의 비판적 성찰을 마주하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현단계의 문학비평에서 더욱 필요한 것은 이름을 숨긴 비판이 아니라 이름을 당당히 내세운 진리를 찾아나가는 열정이다. 이번 5월로 {현대문학}의 '죽비소리'란 이 여러 사람들의 관심 속에 3년째가 되었다고 하고, 앞으로도 이 형식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불현듯, 저자의 이름이 명기된 '죽비소리'를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