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미술

 
광고의 마케팅, 그리고 전시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예술이 상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식상한 지적이지만, 그것이 신성한 상품으로 축성되는 과정은 여전히 신화적이다. 그러나 들여다보자. 이 신화(혹은 기적)의 내부에서는 감성의 기술적 지배, 즉 '상품미학'이라는 것이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본래의 사용가치 대신 그것의 교환가치에만 주목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고(사용 가치의 미적 약속), 판매와 이윤확대를 위해 상품 자체와 그 외관을 분리하는 것으로 발전한다.(미적추상) 이러한 미적 추상의 다음은 대중들을 개별적인 수용자로 분리해내고(미적 혁신), 종국에는 독립적인 판단과 결정의 마비라는 ‘감성의 정형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브랜드화와 유행, 즉 마케팅은 따라서, 오늘날 진정한 예술사회학이다.
 로뎅 갤러리의 오프닝 세레모니에 누군가는 돌을 던졌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이야기인 즉은, 서울의 중심인 충정로에 시민의 문화 휴식 공간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로뎅인가? 서울시민이 왜 로뎅의 발 밑에서 휴식을 얻어야 하는가? 모더니즘이라면, 예컨대 이중섭이나 박수근은 안식의 은총을 위해선 너무 왜소하거나 지엽적이라는 말인가? 그렇긴 하다. '글로벌 삼성'에는 '글로벌 로뎅'쯤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색이되, 로뎅의 사색쯤은 되어야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우리의 사색은 언제나 졸렬할 뿐이니까)

보급과 전파의 논리가 예술의 생명을 좌우
 나는 그들을 나무라는 대신, 차라리 그 영악함에 '갈채'를 보내고 싶다. 사실이지 그들은 신국제주의 하에서의 시민취향을 잘 존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을 뜨고 보자. 오늘날 세계시민들은 더 이상 작가의 특이한 감수성이나 작품의 미학적 질 따위와 만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단숨에 그 정체를 간파할 수 있는‘유일한’ 단서인 그것들의 '유명세', 즉 브랜드화 된 명성과 만날 뿐이다. 대중매체의 시대에 좋아한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비평적 관점은 이미 본 것인가 아닌가의 구분에 거의 전적으로 종속된다. 에드가 모랭(Edgar Morin)을 듣자. 작품의 질은 이제 몇 번을 보았는가(들었던가)의 문제로 대체된 것이다. 수 백번 본 것은 한 두 번밖에 못 본 것에 비해 수백 배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즉 더 비싼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보급과 전파의 논리가 예술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고, 유감이지만 작품의 내적 가치는 무의미해져 버렸다.
 우리는 자신의 재능이 ‘공증되는’ 순간까지 많던 적던 자신의 삶 동안 고통을 경험하고 산고를 치렀던 많은 예술가들을 안다. ‘스타’신화의 최초의 장본인인 피카소만 하더라도 자신의 고객들이 정착되기 전에 (대수롭지는 않더라도)무명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자신의 고객을 찾는데 평생이 모자랐었던 고호와 견주자면 상황은 호전되었지만, 초기 아방가르드의 시대만 하더라도 인정에 30 년 혹은 40년의 세월은 족히 요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떻든, 이들은 자신의 생전에 미디어의 스타들이 되는 경험을 누릴 수 있었다.

메커니즘과 마케팅의 전략
 절정에 달한 시장 메커니즘과 마케팅의 전략들로 오늘날의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관객과 컬렉터들을 찾는 기간은 점점 더 단축됐다. 성공의 가속도는 적지 않은 작가들이 출발과 동시에 성공의 경험을 누리게 했다. 적절한 재능을 입증하는데 성공적이기만 하면, 즉 비엔날레나 국가 규모의 콩쿠르에 입상하거나 하는 따위의 몇몇 과정이 순조롭기만 하면 미술학교를 갓 졸업한 화가가 가을엔 이미 문화부 장관이 그 이름을 알 정도로 되는 것이다. 세계를 단 하나의 공간과 시간 속에 묶어버린 놀라운 문화보급능력의 도움만 가능하다면 그 거대한 시스템의 은총으로 화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순간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예술의 공급자인 큰 규모의 겔러리스트들은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의 명단을 구비하고 마케팅의 모든 전략을 동원해 그들을 '민다.' 다원화되고 복잡해진 소비구조, 그리고, 대규모화가 심화된 시장 구조 속에서, 중개인은 가장 고도의 전문지식을 갖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직업이 되었으므로, 미술가는 일보후퇴를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왜소해진 자신을 통찰할 줄 아는 한, 위풍당당한 시장과 미디어 관계자들 앞을 당당하게 지나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억울해 할 일도 아닌 것은 그들도 공범이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수준에 와 있는가를 맑은 정신으로 파악할 수조차 없어져 버린 작가, 미디어의 평가에 의해 전적으로 고무되거나 절망하는 미술가. 지나치게 가혹한가?
 어떻든, 우리는 지금 브랜드의 효용기간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 좋은 예술은 시대를 호흡한다고 했던가? 유래 없이 놀라운 효율의 물류시스템에 의해 바로 어제 공장에서 찍힌 생산품이 오늘 국제 시장의 진열대에 놓인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예술 보급의 논리라 해서 놀랄 일도 아니겠다.

광고의 역할과 중요성
 이 생산과 분배의 시스템에 어떻게 안착하는가가 때로는 작품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리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자. 보급의 공정이 출발되기 전에 디자인적으로 잘 고려된 광고가 가해지고, 단 몇 분이라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삽입될 수 있다면, 질과 무관한 성공이 보장되는데, 여기에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남아 있을까? 광고를 우습게 볼일이 아니다. 오늘날 광고는 예술 이상으로 하나의 문화며 우리 일상의 실체인 것이다. 광고인 필립 미쉘(Philippe Michel) 은 자부심에 차서 "광고는 더 이상 팔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되며 삶의 태도를 창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예술 고유의 규준적 지위와 휘어잡는 힘 역시 광고로부터 분출된다. 그만큼 많이 광고되고, 유포되었으므로, '로뎅'하면 이미 만사가 형통되는 것이다.(로뎅을 모셔놓고, 자신의 성공을 자축하는 것은 그러므로 넌센스다. 성공의 제 조건은 이미 로뎅에 있다) 광고는 오늘날 미술시장의 활성화에 필연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 상상력과 집단의 신화적 군집력 까지도 담보한다. 위력적인 것이다.
 전시의 광고효과를 높이는데, 혹은 오프닝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들이 기꺼이 수용된다. 포스터와 비디오, 작가의 이력을 입증하는 각종의 증빙서류, 호사스런 팜플렛, 지불된 서문.... 텔레비젼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더 할 수 없는 행운이다. 작가에게 반가운 방문객은 단연 저널과 미디어 관계자들이다. 위등의 과정이 누락된다면, 결과는 실망스러울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조차 자신의 작품이 지니는 예술적 가치들이 그것이 얼마나 인쇄되는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눈에 띠기 위한 노력은 절망적이고도 감동적이다. 때로는 전시의 거대한 규모로 이를 보증하려든다.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면, 몸으로라도 때워야할텐데 자신조차 견디기 어려운 특이성을 생각해볼 일이다.

전시보다 미디어의 관심을 끌어야....
 시대가 변했고, 게임의 법칙도 이를 따른다. 화가와 조각가들은 해야 할 일이 훨씬 많아진 반면 더욱 나약해졌다. 어떻게든 지면을 뚫고, 미디어의 관심을 끌어야 할 일이다. 미디어가 아니고선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란 없으므로. 세기말의 미술은 완전히 미디어 논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어떻든, 전시는 더 이상 예술을 논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아니다. 여전히 전시를 말하고자 하는가? 그렇더라도, 전시의 고전적인 의미, 즉 작품과 관객의 공간적인 만남은 이미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말자. (극소수를 제외하면)대부분은 엽서나 미술서적, 미디어를 통해 작품과 만나고, 이 때 이것들의 효과는 사전에 행해진 광고의 그것에 의해 상상 이상으로 통제된다. 따라서 우리는 한 작품의 생산으로부터 전시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 즉, 사진찍히고 촬영되며, 평문을 달고 일간지의 문화면에 뜨고, 라듸오나 프레스 텔레비젼의 순환을 거치는 과정에 관해 말이다. 역사의 현장은 바로 이곳이니까.
 단지 예술이 소비되는 형태에 관한 것이지 예술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러나, 광고가 판매를 주도하고, 판매의 여부가 생산량과 품목에 재투여된다는, 소비와 분배의 논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렇게 뱃속 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반대로 알고 있다. 유행이 판매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판매량이 유행을 선도하는 것이다. 관념이 도구를 바꾸지만, 도구가 바뀌면 관념도 바뀌는 것이다. 전시회의 화려한 세레모니들이 공허에 가치를 부여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격식을 갖춘 의식, 미술 조합원들의 반가운 해후, 예술적 소사건들로 차고 넘치는 기념식장, 기자들의 출현, 술렁거림....최근에는 각하와 영부인도 자주 어슬렁거린다.

살아있는 표현의 양식
삼성-로뎅-영부인-장관들-수행원들..... 눈물이 날 지경이다. 여기에 출동된 카메라들과 현란한 조명들이 엄숙한 격식만큼이나 덧없는 행사를 망각하도록 효과적으로 돕는다. 내용이 빈곤할수록 격식이 더 중요해지는 것, 숭배의 대상이 불투명해질수록 숭배의 형식이 엄숙해지는 것이라고 해두자. 진리를 탐색하는 논의의 형식들의 세련화는 이미 그 진리가 미궁에 빠졌다는 반증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렇더라도, 분위기는 정말이지 순수하다. 정작 우리는 우리가 기념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단지 어떻게 보내야할지 잘 모르는 남아도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기념식의 분위기가 풍기는 묘한 언짢음과 불길함, 불안과 어떤 유사한 기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문화적인 무기력증과 목적 불명인 '시스템의 논리'가 확증될 뿐이다. 하긴, 이와 같은 풍경이야말로 오늘날 유일하게 가능한 '살아있는 표현'의 양식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