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산책


7월의 문화인물

조선초기 음악의 기틀을 완성한 청백리

고불 맹사성


  

고불 맹사성(孟思誠)은 고려 공민왕 9년(1360)년 7월 17일 송도(지금 개성)에서 아버지 맹희도(孟希道)와 어머니 홍향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자(字)는 자명(自明)이요, 이름은 사성(思誠)이며, 호는 고불(古佛)이다. 맹사성은 조선시대 초기 교육입국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한 유학자인 권근에게서 수학하여 생원 진사 초시 복시를 통과하였다. 맹사성이 태어나던 때는 공민왕의 실정과 섭정 신돈의 횡포로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였던 중국의 혼란이 고려에까지 미쳐서 더욱 더 국가의 쇠퇴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태어난 맹사성은 불과 10세 때에 어머니를 잃었다. 또한, 이성계의 조선혁명과정에서 이부상서이던 조부가 서두문동 72현으로 순절하여 시신도 못 거두고, 수문전 제학이던 부친 맹희도는 동두문동에 숨어 있다가 태조가 건국하자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학하던 맹사성은 25세에 뒤늦게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한 뒤 27세 때에 문과전시(文科殿試)에 장원급제하였다.  1386년 (우왕 12년)에 춘추관 검열로 벼슬길에 오른 맹사성은 1435년(세종 17년)까지 49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면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는 물론이고 각종 부직을 거치면서 이질고 온후한 성품과, 청렴결백의 표상으로서 관리들의 귀감이 되었다. 맹사성이 사헌부 대사헌 재직시,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이 무고한 군인을 시켜 발병범궐(發兵犯闕)하는 모사를 꾸며 이를 사전 발견 처결한 것처럼 공을 세우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그가 비록 온후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는 하였지만 이를 취조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왕권침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세종 때에는 왕이 친히 태종 실록의 편찬과정을 보기 원하자 "실록이란 것은 모두가 당시의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였다가 후세에게 보이기 위하여 이룩한 것인데, 이제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시고 고치시면 후세의 임금님도 이것을 본받아 행할 것이요, 그러면 사관들이 두려워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 것이니 이 점 굽어살피소서" 하고 간곡히 만류해 세종의 뜻을 꺾도록 하여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에 왕이 간여하지 않는 전거(典據)를 남기는 등 꿋꿋한 선비로서의 면모 또한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판서를 4조나 역임하면서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돕느라 변변한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채 비가 새는 집에서 살 정도로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부모님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에 아버지 맹희도와 고불이 나란히 실리는 전에 없는 사례를 남기기까지 했다.

 

 고불은 문신으로서 육전수찬, 고려사개찬, 태종실록편찬, 팔도지리지편찬 등에 참여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하여, 강호사시가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고불은 당대의 음악가 박연과 더불어 조선초기 음악의 대가로 불렸으며, 피리의 명인으로 그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특히 당악에 대한 연구는 고불이 유일하였고,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음란한 가사와 곡조를 지닌 후전진작(後殿眞勺)의 가사를 전부 바꾸고 곡조는 신명나는 향가조로 바꾸는 등 조선초기 음악의 기초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불은 음악이론, 악기제조솜씨 또한 뛰어나서 음악에 관한 일화도 수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태종과 세종대를 거치면서 49년 동안이나 벼슬을 지냈던 고불은 76세 되던 해에 세종에게 모든 벼슬을 내놓고 쉬기를 청하여 벼슬을 마감하였으며, 79세 되는 1438년(세종 20년)에 서울에서 세상을 마감하였다. 서울에서 본가인 온양으로 시신이 이동하던 중 잠깐 쉬는 동안에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명정이 날아가 지금의 산소자리인 광주군 광주읍 직리 해좌(亥坐)에 착지하자, 세종이 "이는 국풍이다. 그곳이 길지이니 그곳에 장례를 치루라"고 명하시고 사패지지를 하사하여 해좌(亥坐)에 고불 맹사성의 묘를 쓰게 하고, 그에게 〔文信接禮曰 文, 淸白吏守節曰 貞〕이라 사시(賜諡)하여 생전에 청백하고 온후하던 선비정신으로 귀감이 되던 고불의 덕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