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인 물


조선말기의 유명한 학자, 시인, 우국지사   매천 황 현
 

  매 천 황현 선생은 나라가 망하자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황현의 자(字)는 운경(雲卿)이요, 그의 선대는 장수(長水) 사람이다. 무민공(武愍公) 황진(黃塵)의 후손으로 호는 매천이다.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라 노사 기정진(寄正鎭) 선생을 찾아보았을 때 선생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서울에 올라가 영재 이건창(寧齎 李建昌), 창강 김택영(倉江 金澤榮) 같은 문인들과 사귀었다.
   고종 25년(1888)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담론(談論)을 잘하고 역사를 좋아하였으나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자 집으로 돌아와 시와 글에 전념하여 훌륭한 작품을 지어내고,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융희 4년(1910년) 8월 3일 합방령(合邦令)이 군청을 거쳐 마을로 반포되어 내려오자 그 날 밤 아편을 먹고 이튿날 운명하였다. 이 때 그가 남긴 유시(遺時) 네 수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난리 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그 동안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게 되었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치는 도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자리 옮겨지더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해만 길구나
이제부터 조칙(詔勅)이 다시없을 것이니
옥같이 아름다웠던 조서(詔書)에 천가닥 눈물이 흐르는구나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낯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하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 위해 한 일 조금도 없는 내가
다만 살신성인할 뿐이니 이것을 충(忠)이라 할 수 있는가
겨우 송나라의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다.
송나라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부끄럽도다

매천 선생은 「매천야록」을 써오시다가 미처 다 끝맺기도 전에 나라가 망했다는 비보를 듣고 자결하셨던 것이다. 위의 간략한 매천 일대기는 선생의 문하생인 고영주가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매천 선생의 일대기를 좀더 자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매천은 1855년(철종 6년) 12월 11일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서석촌(全南 光陽郡 鳳岡面 西石村)에서 부친 황시묵(黃時默)과 어머니 풍천 노씨 사이에 큰아들로 태어났다.그 뒤 아우 황연(黃璉)이 1862년(철종 13년)에 태어났으나 일찍 죽고 막내 석전(石田)이 원(瑗)이 1870년(고종 7년)에 태어났다. 후술하겠지만 매천과 아우 석전은 나이 차이가 15세나 되었다.
그래서 매천은 어린 아우 원을 매우 사랑하였고 동생 또한 시문(時文)에 뛰어나 형을 몹시 따랐다. 아우 원이 형을 따라 8·15 광복직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반대하여 자결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한 집안에 두 열사가 난 셈이다. 이제 이렇게 열사를 두분이나 낸 매천의 가문은 어떤 집안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매천과 석전의 선조를 보면 시조(始祖)는 신라의 시중(侍中, 즉 국무총리)벼슬을 지낸 황경(黃瓊)이다. 고려 때는 별로 인물이 나지 않다가 조선조에 와서는 청백리의 대명사로 이름난
황희(黃喜)정승이 나왔고, 임진왜란 때는 충정병사로 무공을 세우고 진주성 전투에서 1593년(선조 21년) 6월 28일 이마에 적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한 무민공 황진(黃進)장군이 나왔는데 매천의 10대조였다. 또 8대조로는 병자호란때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전과를 거둔 황위(黃暐)가 있다. 그러나 그 뒤 집안이 어려워져 가난하게 연명하여 오다가 조부때 갑자기 집안이 넉넉하여졌다. 누구보다도 매천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조부 황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황씨 일가는 병자호란 이후 전북 남원에서 세거(世居=대대로 살다)하여 왔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매천의 할아버지는 가난에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1천석의 재산을 모으기로 결심하고 어느 날 홀연히 장삿길에 나섰는데, 당시 양반 집안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무릅쓰고 악착같이 장사로 돈을 모아 수년 뒤 재산이 7백석에 이르렀다. 모두 후손을 위한 축재였으나 큰아들이 죽자 이에 실망한 매천의 할아버지는 당초 목표했던 1천석을 채우는 것을 포기하고 재산을 작은아들인 매천의 아버지에게 물려주었다. 이 때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재산은 손자 공부하는 데만 쓰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집안의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 이야기야말로 매천이 3천권이나 되는 장서에 둘러싸여 시를 쓰고 불후의 명저 「매천야록」을 남기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매천과 그 아우 석전 두 형제를 애국열사로 만든 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