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문화예술 20세기 정리와 21세기 전망 ①연극

20세기 우리 연극의 허와 실
21세기는 영혼을 진동시킬 수 있는 연극만이 살아 남는다
 

유민영   연극평론가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다는 말이 있다. 이런 경구를 우리의 20세기 연극 발전에 대입시켜보면 오늘의 우리 연극이 타 예술장르에 비해서 낙후된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 보면 우리 민족은 놀이(연극)를 유난히 좋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종 잡기는 문자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활발했었고, 굿놀이에서 부터 가면극, 인형극, 재담극, 판소리, 그림자극 등은 대중의 공연예술로서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문화양식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형의 연희형태를 천민의 예능으로 폄하, 소외, 박대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아무래도 유교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고 그런 잔영은 20세기를 마감해 가는 오늘까지도 짙게 남아 있다. 가령 고전문예분야에서 볼 때 연극은 회화나 음악, 문학분야 등에 비하여 질과 양적인 면에서 뒤지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놀이천시사상과 무관치 않다. 그 결과 연극분야에 탁월한 인재들이 뛰어들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그런 분위기는 20세기가 시작되는 개화기에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즉, 문학만 하더라도 육당 최남선이라든가 이광수 등이 나타나서 신문학을 주도했지만 연극의 경우는 전통극을 그대로 전수하거나 아니면 창극처럼 변형의 양식이 탄생되는 정도였고, 일본의 저질 신파극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수준이었다. 소위 신문예를 주도한 육당이라든가 춘원 등을 보면 모두가 일본 유학생인데다가 지적(知的)으로도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반면에 명창들은 오직 판소리 외에는 모르는 외곬수의 예능인이었고, 신파극을 시작한 임성구는 초등교육을 받은 범용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지적 능력을 갖춘 연극인은 겨우 3·1운동이 지나고 나서야 등장했던 것이다. 사실 연극은 여타 예술장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합예술 형태란 점에서 환경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아야 되는 숙명을 지닌다. 즉, 연극은 회화나 문학 등과 같이 개인 작업으로 끝날 수 없고 작가, 연출가, 배우, 무대미술가, 조명·음향전문가 등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극장이라는 창조공간에 모여서 만들어 내는 합동작품이다. 바로 그점에서 연극은 어쩌면 풍요하고 자유스런 사회에서나 융성할 수 있는 예술양식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20세기 우리 연극을 되돌아볼 때,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19세기말에서부터 국운이 쇠하자 일본제국주의가 침략해옴으로써 이 땅에는 빈곤과 억압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일제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근대극

연극이 융성할 수 있는 기본 환경이 송두리째 없어진데다가 탁월한 인재마저 외면함으로써 연극은 처음부터 낙후를 면할 수가 없었다.다행히 문예에 일가견이 있던 고종황제가 극장(협률사와 광무대)을 개설하도록 함으로써 전통공연예술이 현대에 계승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근대극이 싹틀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대까지만 해도 뛰어난 연극인재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연극은 시대에 걸맞는 예술양식을 창출하지 못했다. 다만 박승필(朴承弼)이라는 극장 경영자가 등장하여 쇠퇴일로에 있던 전통극과 국악을 건강하게 계승시켰던 것이다. 그가 연극사상 최초로 극장의 효율적 경영방식을 선보였고 신문화에 밀려서 어려움에 처했던 전통공연예술을 애국심으로 지켰다는 점에서 주목 받을만 하다.결국 연극의 신기운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서 부터였다. 현철이라든가 김우진, 박승희 등과 같은 선각적인 연극인들이 시대조류를 타고 등장하여 새로운 형태의 연극과 연극이론을 소개하고 또 실험함으로써 연극계도 세계인식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이때 선구자들은 이 땅에 걸맞는 새로운 형태의 연극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이식할 것인가에 대해 고뇌하면서 하나하나 실천에 옮긴 바 있다. 가령, 현철은 서구 근대극을 이 땅에 소개하면서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김우진은 대단히 앞서가는 연극사조를 이론과 창작으로 실험했으며 박승희는 극단운동으로 연극계를 변화시키려 했다.세 사람의 운동가는 모두 현실의 벽에 부딪쳐서 좌절했지만 그들이 뿌린 근대극의 태아는 1930년대에 와서 「극예술연구회」로 싹이 돋았고 연극을 운동으로 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도 무언으로 남겨주었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해야 될 것은 소위 사실주의극을 추구하는 유치진 등 일군의 본격 극작가들의 등장과 홍해성을 태두로 한 본격 연출가들이 연극계를 이끌기 시작한 점이며 동양극장이 개관됨으로써 황철 등 좋은 직업배우들이 대중 속에서 호흡한 점이라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단의 '카프' 조직과 함께 사회주의 이념극을 추구하던 일군의 연극인들이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한 대중극 붐 속에서 함몰되고 만다. 여기서 극장의 위력이 얼마나 컸던가도 나타나는데 만약 동양극장이라는 연극전용극장이 없었다면 일제의 탄압만으로 사회주의 이념극이 그렇게 쉽게 소멸될 수가 있었겠는가.그런데 30년대의 강한 연극운동도 일제의 세계전략, 즉 대동아건설이라는 큰 목표 속에서 격심한 굴곡을 겪는다. 가령 일제의 식민지 탄압과 수탈 그리고 그 속에서의 민족의 울분과 좌절을 표출하려던 저항극은 일본경찰에 의해 가차없이 짓밟히고 대신 국민극이라는 정치목적극을 하도록 강요받음으로써 우리 연극은 급속히 저급한 상업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근대극이 만신창이가 되어 흐느적거리다가 광복을 맞게 된 것이다. 해방공간의 연극은 그러한 상처투성이의 연극이 청산되기보다는 또 다시 정치권력에 밀려서 좌우이념 대결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전개와 함께 저급한 상업극이 번창하는 기묘한 현상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갈등과 상업극의 범람 속에서는 바람직한 연극이 진전되기 어려웠다. 다행히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이념연극의 첨예한 대립은 소멸되었지만 함세덕, 송영, 황철 등 유능한 연극인들을 월북으로 잃어버리게 되었다.다행히 유치진이 건재한데다가 이해랑, 김동원, 이화삼, 이광래, 이원경, 김영수 등 탄탄한 실력의 연극인들이 민족극 재건에 나섬으로써 사분오열되었던 연극계가 곧바로 정비될 수 있었다. 즉 극협, 신청년 등 극단 중심으로 연극계는 정리되어간 것이다.

연극의 세대교체

이러한 격동 속에서도 대학에서는 차세대 연극을 이끌어 갈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즉 연대, 고대, 중앙대, 서울대 등의 연극반에서 새 시대를 준비하는 신진들이 기성 연극의 갈등을 외면하고 오직 연극창조에만 열정을 쏟고 있었다. 차범석, 최창봉, 박현숙, 최무룡, 박 암, 김경옥 등이 차세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때에 연극사상 처음으로 국립극장이 설립됨으로써 민족극은 순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족상잔으로 연극기반은 하루아침에 붕괴되었다. 이때부터 연극은 대구, 부산, 서울을 오가며 방황했고 서서히 세대교체도 이루어졌다.몇 갈래의 연극흐름도 신협과 국립극장으로 재편되었고 이를 극복하려는 신진 제작극회가 등장함으로써 연극계는 리얼리즘극의 정착과 그 극복이라는 두 명제를 안고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명제는 연극 인재들의 새로운 부상과 무관치 않다. 즉, 차범석, 임희재, 박현숙 등 극작가와 장민호, 황정순, 백성희 등 신예연기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근삼, 김정옥 등 해외 유학파들이 가세함으로써 연극계는 새 바람이 불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어간 것이다. 그런 때에 현대적으로 설계된 드라마센터가 개관됨으로써 연극계는 잠시나마 국립극장과 드라마센터라는 두 극장으로 재편되기도 했다. 그러나 드라마센터가 단 1년만에 경영난을 극복 못하고 문을 닫자 연극계는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한 동인제 극단 시스템으로 전환되었다. 가령 실험극장, 산하, 민중극장, 자유극장, 가교 등 성격이 다른 여러 극단이 있었지만 공연장은 명동 국립극장밖에 없었기 때문에 연극계는 대단히 단순했고 다만, 이해랑 이동극장이 생겨나서 연극이 지방으로도 확산될 수 있었다.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연극은 유치진, 차범석 등으로 이어지는 사실주의 희곡전통에 이해랑, 이원경, 이진순 등의 연출이 보태지고 김동원, 장민호, 백성희 등의 정통연기술이 뒷받침됨으로써 리얼리즘극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형성되었다. 번역극도 이러한 기조 밑에서 주로 오닐이라든가 윌리암스, 밀러 등 브로드웨이류가 가미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근삼, 김정옥, 양광남 등 구미유학파 작가, 연출가, 배우가 등장하고 독문학, 불문학도가 몇 명 연극계에 직간접으로 참여함으로써 무겁기만 했던 연극계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자유분방하면서도 감각적이며 템포 빠른 비희극 또는 희극이 적잖게 공연됨으로써 극장가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즉, 우리 근대희곡은 어두운 시대에 시작된 만큼 진지하게 시대의 아픔을 묘사하는 비극류가 주조였는데 이근삼의 경쾌한 희극은 시대를 통렬하게 비판함으로써 젊은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프랑스류의 희극과 시적 감성으로 가득찬 김정옥의 연출은 자유극장이라는 색다른 연극기호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때 박조열, 윤대성, 오태석 등과 같은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했고, 임영웅이 「고도를 기다리며」로 우리 연극계가 전위극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객의 지적 바탕도 뒤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1970년대 유신기의 연극
그만큼 우리 연극이 근대성을 탈피하고 세계 현대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새 시대에 진입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연출상의 새 스타일은 1960년대가 저물어 가던 때에 유덕형이 소위 '연출작품 발표회'로써 신선함을 더 해주었다.소위 아르또, 그로토우스키로 이어지는 움직임 중심의 잔혹극류의 연출기법은 안민수, 오태석 등으로 이어지다가 민예극장의 전통예술의 재창조 작업 및 정치성 짙은 마당극운동과도 연결되었다. 이것이 대체로 1970년대를 전후했던 시기로서 정치적으로는 가장 암울한 유신기(維新期)였다.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각 극단들이 명동 국립극장 무대를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쳤던 점이다. 국립극장이 명동시대를 마감하기 이전에 이미 이병복이 까페 떼아뜨르를 만들어 김정옥과 함께 본격 소극장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이원경이 3·1로 창고극장을 이끌었고 실험소극장, 민예 소극장 등도 나름대로의 개성을 갖고 연극활동을 전개해 갔다. 가령, 까페 떼아뜨르는 소위 살롱 연극이라하여 전위적인 소품들을 선보였고 3·1로창고극장은 원로 이원경이 연극교육을 곁들여 아리나스테이지에 맞는 연극을 했으며 민예소극장은 전통예술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실험작업을 했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의 흥행취체규칙이라는 전근대적 악법에 바탕한 공연법이 언제나 소극장운동의 장애가 되었다. 문화계의 저항으로 그때그때 폐관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연극발전에는 적잖게 방해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그런 속에서도 운현동 실험소극장에서 「에쿠우스」가 장기공연의 새 장을 열면서 연극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연극사상 처음으로 한 작품을 한 극장에서 수개월씩이나 장기공연하는 새로운 공연관행이 생긴 것이다. 두 번째로는 수십년 동안이나 정체되었던 연극관객이 갑자기 수만명이나 늘어나는 관객확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오랜만에 연극의 직업화가 가능해졌다. 반면에 연극이 소극장 중심으로 전개되다보니 자꾸만 왜소해져갔고 관객을 의식한 감각적 번역극이 범람하는 상업주의가 급속히 확산되어가는 부정적 경향도 나타났다.


무대예술의 인프라 구축

따라서 정부는 창작극 진흥을 통한 연극 활성화를 꾀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연극제를 개최하게 되었고 거기서 윤조병, 노경식, 이재현, 윤대성, 오태석, 이강백 등 극작가들이 중요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순전히 중앙만의 연극잔치일 뿐 불모의 지방연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다름아닌 전국지방연극제였다. 이는 곧 연극제의 이원화로서 중앙과 지방의 문화 균점을 꾀한 것이기도 했다.1979년 10월 정변으로 잠시 민주화의 봄이 왔을 때 연극계에서는 전근대적 악법이라 할 공연법 개정운동을 벌였고 그 법이 1981년에 개정됨으로써 소극장 개설과 유지가 쉬워졌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소극장과 소형영화관이 우후죽순 생겨남으로써 연극은 소극장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대극장이 절대 부족한데다가 연극이 영세한 사설 극단 체제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소극장들이 대극장의 축소판으로서 본래의 실험실로서의 기능을 잃고 불건전한 상업극의 온상처럼 되어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5·6공에 걸쳐서 전국적으로 수십개의 극장(문화회관)을 개설했거나 짓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대예술의 인프라 구축이라는 점에서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었다. 솔직히 공연장 부족이 우리 연극발전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요인 중의 한 가지였다는 점에서 극장인프라 구축은 연극제 실시와 함께 대단히 미래지향적인 것이었다.한편 틀에 박힌 옥내무대를 무시하는 마당극운동이 억압적인 시대상황의 안티테제로서 대학가와 산업공단 등을 중심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군사독재치하의 저항운동의 한 방식으로 전개된 마당극운동의 주제는 대단히 이상주의적이었고 자유, 평등, 반핵, 민족자주 등 대단히 보편적이면서도 이념성이 강했다. 연극 양식은 전통문화 즉 무속으로부터 탈춤, 민요, 판소리, 민속무용, 농악 등의 표현틀에다가 피스카터의 정치극, 서사극 구조를 결합한 열린 연극형태라는 점에서 이색적이었다. 이러한 마당극은 독특한 시대양식으로 민중에 어필했고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었다.특히 1970년대 초 민예극장을 중심으로 하여 전통의 현대적 계승 및 재창조라는 큰 명제가 문화예술계의 커다란 담론으로 떠올랐던 만큼 마당극은 주목을 끌만했다. 그런데 전통의 현대적 재창조라는 명제 밑에서 새로운 연극형식을 추구하는 실험도 여러 갈래였다. 가령 허규가 추구하는 민예극장 방식과 마당극 형식 그리고 김정옥의 열린 연극 형식과 유덕형 방식 오태석의 극단 목화방식 등 다양했다.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가무를 중요 표현방법으로 삼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연극계의 경향은 브로드웨이류의 뮤지컬을 쉽게 수용하는 계기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 결과, 대극장은 가무극이 주요 레퍼토리가 되고 소극장에서는 대사 위주 연극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정통극이 가무극에 밀리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그런 때에 극단 산울림이 신촌에 소극장을 열어서 국립극단과 함께 정통극의 맥을 이었고 페미니즘 연극으로 중년 여성을 관객층으로 묶기도 했다. 그 속에서 박정자, 손숙, 윤석화 등 스타 여배우 삼총사가 각광을 받기도 했다.

현대 연극사의 중요한 전환점

현대 연극사에 있어서 1980년대 후반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서울국제올림픽이 개최된데다가 그것을 전후해서 동구권이 급격히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념을 초월하는 개방사회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동구권 연극이 초청되어 서울에서 자유롭게 공연되었고 브레히트 작품도 마음대로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솔직히 수준 높은 동구권 연극은 우리의 연극관객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던져준 바 있다. 경직된 사회주의 목적극만 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일관했던 연극팬들은 동구권 연극의 높은 예술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경직된 것은 오히려 우리 연극이었고 세계 연극 조류에 둔감했던 것도 한국 연극이었다. 동구권 연극을 중심으로 한 세계 연극을 체험한 우리 연극은 1990년대 들어서 여러가지 실험도 하고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 등 영상매체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연극은 그 뒤를 좇기가 어려웠다. 특히 배우들이 영상매체로부터 얻는 소득이 무대출연에서 받는 소득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은 왜소화될 수밖에 없었다. 각 대학에 연극학과가 증설되면서 연기자들은 급속히 늘어났지만 대학교육의 부실로 연극의 질적 향상은 이루지 못했다.유능한 배우들은 대부분 영상 매체로 옮겨가고 무대에는 미숙한 젊은이들만 남았다. 수준에 이르지 못한 젊은 연극인들이 상업주의에 오염까지 됨으로써 몇몇 소극장들에서는 ‘벗는 연극’으로 호객 행위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연극이 타락으로 치달아간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우리 연극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개방사회를 맞아서 외국 연극만 들어온 것이 아니고 우리 연극도 해외에 나가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가령 극단 산울림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세계적인 아비뇽 연극제에 출품하여 주목을 끌었고 베케트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베케트연극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 외에는 오태석의 목화극단이 일본에서 동력 넘치는 연극으로 주목을 끈 바 있고 뮤지컬붐을 타고 등장한 에이콤의 「명성황후」가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에서 장기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처럼 아시아의 선두에 선 우리연극이 세계 연극의 반열에 서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 특히 실험극 운동이 활발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치 아래 메타연극, 공동창작, 해체연극 등 다양성을 보여준 바 있다.그 중에서도 우리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노력이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희곡창작, 연출, 연기, 무대미술, 의상 등 여러 측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신극도 이제 서양 연극의 모방이 아닌 개성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특수성만 두드러지고 보편성이 약화되는 문제점을 낳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이 바로 세계연극 수준에서 밀리고 있는 원인중의 한가지라 말할 수 있다. 오늘의 연극이 투명한 미래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혼돈스러운 이유도 거기에서 찾아야 될 것 같다. 한편 여성국극이나 악극과 같은 지난 시대의 연극양식을 좋하하는 세기말의 성인층관객 성행도 주목할 만 하다.


연극계의 활성화

여하튼 한 세기동안 발전되어 온 우리 신극이 경제성장만큼이나 양적 팽창은 괄목할만하다. 초창기에 연간 기십 편의 연극공연과 비교할 때, 전국적으로 수백개의 대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작품은 거의 천여편에 이르고 연극 형태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연간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막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는 결국 외형적으로 연극이 크게 활성화되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결과적으로도 신극이래 장애요인으로 반복 지적 되어온 공연장 부족, 연극인재 부족, 창작극 부족, 관객부족, 억압상황 등이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연극을 할 수 있는 여건, 즉 환경개선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연극인들이나 극장, 극단들이 정부의 보조를 받으면서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제 강점기에 신극운동을 시작했던 선구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꿈 같은 일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우리 연극의 사회적 기능이 이처럼 왜소하단 말인가? 가령 3·1운동 직후 청년, 학생들의 전국적 소인극 운동은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토월회' 여배우의 헤어스타일은 유행의 표본이었으며 1930년대 동양극장은 대중정서의 용광로였다. 그와 비교할 때 오늘의 우리 연극은 양적 비대와는 상관없이 사회적 영향력은 보잘 것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즉 문화현상의 외적 변화와 연극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성이 그것이다.사실 사회의 다변화에 따라 지난 시대에 예측 못했던 상황이 우리의 주변을 감싸고 있다. 과거에는 애니메이션이라든가 텔레비전, 컴퓨터 게임, 비디오, 영화 등 영상매체가 우리 생활을 좌지우지한다고는 상상하지 못했고 스포츠를 직업으로 한다는 것도 염두에 두지 못했다.


정보사회로 접어들면서 연극계의 시련

특히 후기산업사회를 지나 정보사회로 접어들면서 생활패턴이 바뀌었고 풍요사회와 함께 오락의 다변화는 여행 관광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니까 극장에 가야 여가를 즐기면서 교훈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이야기이다.그렇다고 해서 연극이 다른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을 붙잡을만한 힘이 있는가.연극인들은 시대감각에 맞춰서 스펙타클한 가무극을 많이 하지만 아직 감동상품이 되지 못했고, 정통극은 대중을 감동시킬만한 기량이 따르지 않는다. 이 말은 그동안 연극인을 많이 배출했음에도 대학교육의 부실로 쓸만한 인재는 별로 키워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나마도 재능 있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으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에 연극무대에서는 미숙한 작품만 양산되고 있다. 특히 연극의 정체성을 모색한답시고 특수성만 강조하다보니 보편성이 약하기 때문에 세계연극 수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그만큼 우리 연극에는 풍부한 상상력에 입각한 독창성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연극이 표현 형태는 어떻든 보편성을 획득해야 세계연극의 반열에 낄 수가 있다.이런 소프트를 담는 그릇이라 할 공연장만 하더라도 과거에 비해서 급팽창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관립이어서 경직되어 있고 비전문가들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또 몇몇 사설극장들은 대기업의 경영방침에 따라 상업적으로만 가고 있다.이제 우리 연극은 다음 세기를 맞아서 생존의 기로에 서있다. 영상예술이나 프로스포츠 등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량을 갖추든지 영혼을 진동시킬 수 있는 투철한 정신이 있든지 어느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한다면 연극이 살아남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신극 1세기를 되돌아본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