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문화예술 20세기 정리와 21세기 전망 ①연극

21세기 연극의 전망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김방옥   연극평론, 청주대 교수

내년은 새로운 십년, 새로운 백년, 그리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해이다. 인류의 문화가 시작된지 고작 대여섯번 째의 천년을 맞는 셈이고 연극이 시작된 희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스물다섯번 째의 백년을 맞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같은 동양권에서 연극문화가 형성된 지는 한 천년되었다지만 현대인에게 비교적 익숙해진 서구극의 전개가 르네상스 이후 본격화된지는 불과 사백년이고 우리 한국인에게 현재와 같은 서구 근대극식 연극이 소개된 지는 불과 백년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에 올 백년을 전망해보겠다는 시도는 사실상 무모하다는 전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환경
흔히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시대는 갔고, 경제의 무한경쟁만이 기다리고 있다는데, 21세기의 경제는 재화의 생산이 아니라 사실상 문화가 창출하는 부가가치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며, 혹은 지구상에 절대빈곤이 사라지고 각국은 문화예술을 통해 경쟁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 전망이 실현된다고 해도 연극환경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연극은 영화처럼 자동차 몇백 만대의 수출가에 달하는 외화를 벌어들일 문화산업의 대열에 끼여들지도 못하며 이미지조작을 통한 상품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극의 이런 운명은 이미 20세기 초에 발터 벤야민이 현대는 영화나 사진, 음반과 같은 대량 복제예술의 시대라고 말했을 때 이미 예측된 것이었다. 상업적 자생능력을 갖춘 대중극으로서의 연극은 서구의 경우 16세기에서 싹이 돋아 19세기로 끝났으며 전세계적으로, 뮤지컬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고 상황은 오히려 악화될지도 모른다. 21세기는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발달로 인해 영상과 사이버 공간의 문화가 사람들을 빨아들일 것이며 자본주의적 조작에 의한 이미지 산업은 여전히 범람하며 사람들을 도취시킬 것이다. 아마도 연극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기술문명이나 공허한 기호의 조작에 항거하는 인간적 가치의 회복에 의해서일 것이다.
기술문명의 발달과 물질적 탐닉에 어지럼증을 느끼고 소외된 인간적 가치를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인간이 많아질 때 그들의 그리움의 언덕에 연극은 비비고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은 본질적으로 물질적 포화와 공존할 수 없다. 우리 주변의 풍경을 보더라도 요즘의 연극인들과 극단들이 타락한 자본주의의 악취를 피해서, 경제적 압박을 견딜 수 없어서, 혹은 보다 신선한 공기와 영혼을 숨쉬기 위해 이미 적지아니 동숭동을 탈출해 혜화동으로 미아리로 장충동으로 홍대앞으로 혹은 경기도로 옮겨가고 있지 않은가. 미래의 구체적인 연극공간을 말한다면 지금과 같은 과시형의 대형 다목적 건물보다 작고 따뜻한 연극만의 공간이 전국 곳곳에 들어서야 한다. 또한 이미 몇 몇 극단이 실천에 옮기고 있듯이 때로는 때묻지 않은 자연환경 그 자체도 인간적 예술로서 연극이 돌아갈 한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극담당자

이처럼 연극환경이 위협 당하고 위축당하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이 연극예술을 맡아 담당해 나갈 것인가?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연극하는 사람들의 숫자와 열정은 적어도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고 본다.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연극예술은 그 어느 다른 예술 장르보다도 연극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어떤 기질적, 심리적, 실존적, 문화인류학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도 명예도 없는 연극계에 항상 몇몇 사람들은 모여들고 존재하며 남아있다. 우리 사회에서 연극인의 숫자가 당분간은 줄지 않으리라는 예상에는 또 다른 구체적 이유가 있다. 즉 최근 5년간 우후죽순처럼 불어나는 연극영화과의 숫자가 그것이다. 물론 연극을 지망하는 학생들 모두가 순수 연극인을 희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 영화 TV 스타나 모델 가수 개그맨 등 대중연예인을 꿈꾸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지의, 허구적 기호조작의, 이 불안정한 욕망의 사회에서 스타가 되려는 청소년들의 숫자가 줄지 않는 한 아이러니컬하게도 연극은 그 가장 강력한 경쟁분야의 하부구조로서도 기본적인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 연극인이 줄지 않으리라는 또 하나의 이유로서 보다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것은 신세대들의 가치관의 변화이다.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좋아지면서 예전과 같은 높은 보수나 명예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면 훌륭한 요리사, 미용사, 오지 탐험가, 배우, 연출가로서 일생을 보내고 싶어한다. 혹은 미래사회에서 기술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노동의 양이 줄어들면서 자신의 본래의 직업 외에 또 하나의 직업으로 또는 일종의 아마추어로서 자신이 열정을 바치고 싶어하는 연극에 뛰어들 인력들도 출현할 수 있다. 최소한의 연극환경만 갖춰진다면 이들 미래의 연극인들 중 상당수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지니고 새로운 감각으로 연극에 헌신할 것이다.


작품경향

예술과 연극은 그 시작이래 두 개의 상반적 경향을 축으로 그 양자간을 오갔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대체로 현실인정적인, 아폴론적인, 이성적·합리적인, 사실적인, 재현적인 축이고 나머지 하나는 현실초월적인,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적인, 본능적인, 시원적인, 반 사실적인, 비재현적인 축일 것이다. 지난 연극사를 돌아볼 때 어느 시대의 연극이나 대체로 한 쪽에 기우는 경향을 보여왔다면 지난 20세기의 연극은 이 양축 모두에 속하는 연극들이 공존하고 서로 대립하며 절충하는 양상을 나타냈다고 하겠다. 르네상스 이후 18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극에 달한 사실주의적 연극과, 사실주의와 비슷한 19세기말 20세기초에 시작된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등의 반 사실적 연극들, 1920, 30년대에 재현적 연극에 반기를 든 극장주의와 아르토의 제의적 잔혹연극, 그리고 아르토의 뒤를 이은 그로토우스키와 50~60년대의 미국 실험극들, 사실주의와 비사실주의적 특성을 절충한 20세기 중반의 희곡작품들, 마지막으로 대개 60년대 이후 전시대의 모더니즘을 부정하며 재현과 비재현의 경계에 형성되어 우리 나라에서는 90년대 이후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세기의 연극은 어떤 흐름으로 전개될까? 백년까지의 앞을 감히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화예술 전반의 경향이 전반적으로 현실과의 참조관계를 떠나 사이버 공간의 자기증식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탈이성과 감각만능이라는 패러다임을 지속할 것을 고려한다면 연극 역시 당분간 언어를 통한 현실재현이라는 정통연극의 축으로부터는 멀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전반적으로는 현실의 재현보다는 연극을 통해 또 다른 연극적 실재를 창조하는 비재현적 연극이 주조를 이루게 될 것이다. 다만 살아있는 인간의 행위를 전제로 하는 연극예술의 경우 사이버세계의 가상현실에 대한 반동으로서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 만남과 현장감이 더욱 강조되는 연극, 가상세계 속의 화려한 만능 이미지에 대한 반동으로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인간적인 에너지에 가득찬 연극이 빛을 발할 것이다. 또한 예술에 의한 삶의 재현이라는 의미가 퇴색하면서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에 위치하며 행위자의 행위 자체와 그 과정을 강조하며 관객의 적극적 참여와 그 공연의 유동적 결과에 주목하는 퍼포먼스 계열의 공연이 타장르까지를 통합하며 때로는 축제나 이벤트의 형태를 띠며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 나라에도 지방자치 시대를 맞아 작고 큰 축제들이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현재로서는 대부분 문화관광상품개발의 의미를 띠는데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한편 20세기 이후 예술의 다원성과 절충주의가 대세로 자리잡았으며, 예술의 역사가 항상 전시대에 대한 반동으로서 형성되어 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어느 시점에서 다시 일상과 언어가 중심이 되는 그런 조용한 연극이 소수의 관객들 사이에서나마 다시 사랑 받게 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이미 부조리극이나 하이퍼 리얼리즘 혹은 일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드라마에서 이미 나타났었듯이 현실의 충실한 재현으로서의 일상이나 언어가 아닌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상이나 언어의 연극이 또 하나의 작은 흐름을 이루게 될 것이다. 물론 연극계에서도 일각에서는 대중을 겨냥한 상업주의의 욕구가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뮤지컬이 그것이다. 그 명칭과 스타일은 조금씩 달라질 지 모르나 어쨌든 대중적 호소력이 있는 유행적인 음악과 춤과 스펙타클을 곁들인 오락으로서의 공연이 계속 관객의 주머니를 공략할 것이며, 이런 공연도 허구적 문학성의 비중보다는 감성과 감각에 더 큰 비중으로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퍼포먼스의 경향을 더 짙게 띠게 될 것이다.이러한 양식이나 표현미학의 문제 외에 내용적 면에서 미래의 연극은 어떤 주제를 다루게 될 것인가? 지난 세기말 무렵에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일단 수그러들면서 당분간은 인간의 일상 속에 감춰진 존재의 의미나 기술문명속에 함몰되어 가는 인간의 절망을 다루는 연극, 혹은 인간의 구원을 다루는 연극이 대두되지 않을까 전망해본다. 또 정체성 identity의 문제 역시 21세기 연극의 주요 논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 민족 나름의 오랜 전통연희와 연극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근대 연극은 식민통치자 일본을 통한 서구 근대극의 유입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본과 서구 근대극에 훼손 당한 우리연극의 정체성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1970년대 대학극 및 기성 연극인들에 의해 일어났고 이런 움직임은 서구 근대극에 회의를 느끼고 그 미학을 해체하려던 당시의 세계적 연극미학의 흐름과 맞물려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반적 경향으로 흡수되었다. 근대서구의 로고스는 더이상 세계연극의 중심이 될 수 없고 그 한 예로 90년대 이후 번역극과 창작극의 구분 자체가 무화되기 시작했다. 외국의 작품들은 더이상 불가침의 경전이 될 수 없었으며 우리의 젊은 연출자에 의해 우리 것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다국적 자본의 세계정복과 통신정보망의 발달과 함께 특히 청소년 중심의 소비적 대중문화의 경우 세계는 하나라는 글로벌리즘이 일반화되었으며 이는 문화예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소위 세계화와 민족적 정체성 사이의 패러독스가 그것이다. 모든 문화권의 문화는 각자 동등한 가치와 차별성을 지닌다는 전제하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문화상호주의 아래서 각국의 문화적 정체성은 새로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문화상호주의란 애초에 민족적 정체성 같은 것이 없었던 미국적 분위기의 개념이기는 하지만 이제 영원히 고정불변한 민족의 정체성만을 지키는 일은 어렵다는 뜻인데 이런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는 글로벌리즘이 더 구체화될 21세기에도 뜨거운 이슈로서 계속될 전망이다. 다음 세기에는 실현될 가망성이 높은 남북 통일도 역시 내부적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우리가 당면한 과제이나 이 지면에서 간단히 다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관  객

대중적인 연극의 시대가 일단 끝났으리만큼 당분간 대량의 연극관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지난 20세기에도 매우 제한된 숫자의 연극관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음 세기에도 상황은 더욱 악화될지도 모른다. 일반대중들은 더욱더 영상매체나 비디오게임 등으로 몰릴 것이며 뮤지컬을 제외한 순수연극은 소수의 열렬한 연극매니아적 관객들에 의해 유지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일종의 '언더그라운드'나 소위 '인디컬쳐'의 형태가 그것인데, 연극을 만드는 사람 못지 않은 열정과 관심을 지닌 연극애호가들이나 동호인들이 연극문화의 주요요소로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난 세기에 수동적인 관객으로 그쳤던 것과 달리 미래의 연극관객은 보다 적극적으로 연극문화에 참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어떤 종류의 퍼포먼스에 있어서는 더 적극적 방식으로 공연 자체에 참여하게 될 것 같다. 이런 이벤트 형식의 공연에서 관객의 숫자는 일시적으로 늘어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연극의 수동적인 관객으로 머물지 않고 연극을 본격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미래에는 다양한 종류의 아마추어 연극이 성행하게 될 것도 전망해볼 수 있다. 인간회복의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적 유대를 회복하기 위한 이상적인 방법의 하나로 연극을 택하는 모임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이다. 입시경쟁이 약화되면서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아마도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서 연극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예측해볼 수 있는데 이는 연극문화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문화정책

다음 세기에서 문화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문화정책의 중요성도 아울러 부상되지 않을 수 없다. 서두에 지적했듯이 문화산업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일종의 수공업인 연극의 입장에서는 문화정책의 보살핌이 더욱 절실해지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후반 이후의 어느 사회에서든 순수 공연예술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으며 미래사회에서의 연극은, 극단적으로 비유한다면 사라져가는 희귀한 식물이나 무형문화재처럼 정책적 차원의 특별한 배려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원은 지금 당장의 작품당 지원이나 골고루 나누기 식보다는 연극이 살아남기 힘든 시대에 연극문화가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소위 인프라를, 네트워크를, 인력기반을 구축하는 사려 깊은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 문화정책은 연극이 인간회복의 예술이며 대량으로 마구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한 올 한 올 직접 짜낸 그런 귀중한 그 무엇이라는 철학에 바탕한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