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문화예술 20세기 정리와 21세기 전망 ①연극 |
원로에게
듣는다......김동원
연기자의 고향은 역시 “연극무대” 그
고향 지켜낸 연기자 중의 연기자 만난사람
이혜경 연극평론가, 국민대 교수 이혜경: 먼저 선생님께서 지나온 여정을 함께 돌아보고 싶은데요, 처음 연극을 하신 것이 언제입니까? 김동원:1932년 배재고보 시절 유치진 선생 연출로 유진 오닐의 「고래」와 창작극 「바보치레」를 한 것이죠. 배재고는 미션스쿨이라 학교에서 후원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이: 32년에 연극을 시작하시고, 유학을 떠나신 게 34년이시죠? 김: 그렇습니다. 그때 일본유학생들 중에는 특히 보성전문이나 연희전문에서 학생극 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유치진 선생과 함께 동경에서 연극반을 조직했었습니다. 이: 당시 일본에서 서양희곡의 공연은 많이 보셨나요? 김: 「햄릿」, 「안나카레니나」, 「파우스트」 등 웬만한 번역극은 다 보면서 우리끼리 합평회를 하곤했지요. 특히 축지소극장에 새로운 레퍼토리를 올렸다하면 모두 보러갔는데 그 사람들 참 진실하게 잘 했고, 축지소극장 마크가 포도송이었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포도는 여러 송이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단결을 상징한다고 하던 말이 기억에 남는군요. 이: 그 당시에는 서양의 대본을 일본어에서 우리말로 重譯하는 경우가 많았을텐데요. 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가 워낙 일본을 통해서 서양 연극을 접할 수 밖에 없 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작가의 양심에 맡기지만 일본말을 많이 참고했을 것입니다.. 이: 처음 접하는 서양의 연극양식이 낯설지 않으셨어요? 김: 아니, 그때만 해도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해서 신파 연극이 왕성한 한편, 극예술연구회를 통해 해외 문학하는 분들이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열연했던 연극인들이 ‘연극동맹’에 들어가서 모두 좌익극을 했답니다. 그래서 우린 ‘극예술협회’를 조직해서 유치진 선생의 「자명고」등을 공연하면서 대항했지요. 하지만 공산당이 이북에 오면 ‘인민배우’ 대접을 해준다는 등 감언이설을 하니까 ‘연극동맹’ 회원들이 하나 둘 월북해서 결국 신파가 자연적으로 없어졌던 것입니다. 이: 6.25때에는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요? 김: 나도 서울에서 납치되어 38선을 넘어 끌려가다가 탈출했지요. 이: 연극인인걸 알고 납치한 것인가요? 김: 물론입니다. 당시 북한은 명동성당에 무용인, 음악인, 연극인, 영화인 등을 모아놓고 세뇌공작을 했지요. 특히 난 좌익연극에 저항하고 싸웠기 때문에 다 알려져 있었습니다. 처가 에 숨어 있다가 답답해서 잠깐 나온 틈에 연극동맹원한테 잡혔던 것이지요.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나자 모두 집합시켜 북으로 끌고 가는데 나는 탈출할 기회만 엿보다가 9월 어느 날 유엔군 공습이 있을 때 논두렁에 죽은 듯이 엎드렸다가 밤에 도망해서 유엔군에게 투항했지요. 그 때 최일선에는 흑인들이 서고, 제2선에는 국군이, 그리고 제3선에 백인 군인들이 배치되었는데 그 중 한국 중위 한 사람이 「원술랑」 등 내가 나온 공연을 다 보았다고 하면서 알아보아서 살아났답니다. 이: 현재 연극계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요즘 신파극이 많이 공연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그건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너무 경제적인 면만을 생각해서 관객을 끌려고 하기 때문인데, 신파가 다시 연극계에 뿌리를 내릴 거라고 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그런가하면 젊은 연극인들 사이에서는 실험적인 양식들이 많이 연구됩니다. 선생님께서 어떤 양식을 특히 선호하십니까? 김: 나는 리얼리티즘을 상당히 좋아하고 그것만이 영원한 연극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너무 실험적인 연극이 많이 나오더군요. 또 관객들도 과거에는 부부들이 많았는데 근래에는 대학생만 있어서 극장이 완전히 대학강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영화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김: 나는 그 원인을 레퍼토리에 있다고 봅니다. 극단 책임이지요. 그리고 전통연극, 리얼리즘 연극을 해야 보는데 실험연극을 하면서 보는 사람도 모르고, 하는 사람도 모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즘 소극장이 너무 많아요. 이건 글자 그대로 ‘소극장’, 즉 안방 만한 데서 무대도 없고 시설도 신통치 않은 데서 하니까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지요. 연극이 신비스럽고 환각적이어야 하는데 소극장은 연기자와 관객이 코가 맞닿을 지경이니 연기자가 배역에 몰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객도 환각적인 세계로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우와 관객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프로세니움 아취 무대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연극은 역시 ‘막’이 있어야 합니다. 막을 가려놓아야 관객들이 ‘저 안에서 어떤 연극이 기다리고 있을까’하는 그런 기대감이 있을 텐데, 요즘 소극장은 처음 부터 모든 걸 열어놓고 하니까 신비감이 없는 것이지요. 또, 배우들이 분장을 하면 조명이 미화시키는 기능이 필요한데 미화되지 않으니까 걸러지지가 않는 것이지요. 연극은 미적이고, 신비하고, 환상적이어야 합니다. 이: 지금까지 보신 공간 중에 이상적인 소극장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일본 동경의 축지소극장입니다. 이 극장은 공간을 반으로 잘라서 반은 객석으로, 반은 무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연극도 구애받지 않고 공연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국에서는 어느 곳이 공연에 적합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문예회관이지요. 소극장으로선 국립극장 소극장이 있지만 거긴 객석이 너무 적습니다. 이: 요즘은 고전을 재해석하는 여러 가지 공연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그런 시도들은 마음에 안 듭니다. 특히 햄릿같은 작품은 불후의 명작이기 때문에 제대로 살려야 합니다. 색다르게 하려면 직접 새 작품을 쓰지 왜 남의 작품을 그렇게 훼손합니까? 이: 재해석을 시도한 공연 중에서 선생님 마음에 든 작품은 없었나요? 김: 얼마 전 국립극장에서 한 「파우스트」를 보았는데 특히 메피스토펠레스가 더러운 상소리를 하는게 아주 불쾌습니다. 또 원작에서는 유머러스하게 농락하는 관계인 마르타와 메피 스토펠레스가 정사하는 장면을 무대 위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런 공연이 흥행이 됐 다고 좋아하는 게 못마땅합니다. 극단 ‘유’가 하는 「햄릿」도 봤는데 배우들이 마치 서커스처럼 하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더욱이 아버지의 망령이 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다 이야기하고 햄릿은 그것을 가지고 고민해야 하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 이야기가 중간에 나오니까 원작과 많이 다르더군요. 이: 연출자들이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시각적으로 강렬한 공연을 하려다 보니까 그런 것은 아닌가요? 김: 왜 배우들이 연출자 말만 그렇게 듣나요. 원작에 충실해야지요. 연극은 배우의 예술입니다. 이: 최근 국립극단이 함세덕의 「무의도기행」을 공연했는데 격세지감을 느끼지는 않으세요? 김: 시대가 그만큼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프롤로그는 공연히 붙였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서툰 일본말로 하는 게 무척 어색하더군요. 함세덕하고는 개인적으로 잘 알았는데 함세덕은 다른 작품에서 따오는걸 좋아했어요. 「무의도기행」도 이번에 보니까 내가 일본에서 본 「天優丸」이란 번역극 냄새가 많이 나더군요. 또 함세덕의 「낙화암」에는 얼굴이 이뻐서 그렇다고 인두로 지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일본의 오꾸도또 사사키라는 대중소설에서 차용한 것 같습니다. 이:
선생님은 언제부터 국립극단에 계셨나요? 이: 그런 공연들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간섭을 안 받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요즘 국립극장 민영화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민영화는 말만 그렇지 어려울 겁니다. 문제는 돈인데 그걸 어떻게 지탱해나갈 것인가요? 이: 그렇다면 연극에 대한 궁극적인 후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 연극이 발전하고 연극인이 살려면 재벌들이 스포츠에만 투자하지 말고 극단을 좀 살려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안되요. 이: 작가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작가가 너무 없지 않습니까? 창작극이 좋은 게 없으니 번역극을 많이 하게 되고요. 그 러나 작가들 입장에서는 먹고살 길이 없으니까 자꾸 TV 드라마를 쓰게됩니다. 여러모로 재정적인 후원이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이: 그렇다면 연극이 어떻게 대중매체와 경쟁할 수 있을까요? 김: 우선 작품이 좋은 게 나와야합니다. 우리 나라에 세익스피어같은 작가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젠 연기술에 대한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신극을 할 당시 우리 나라에 적합한 화술이 없었을텐데 어떻게 개발하셨습니까? 김: 나 개인으론 일본배우들의 화술을 많이 본받았습니다. 일본말하고 한국말 하고 순서가 같아서 억양이나 호흡 등이 어느 정도 비슷했습니다. 이: 요즘엔 안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연극을 하실 때는 서양인처럼 분장하고 번역극을 했을텐데 그 캐릭터가 충분히 마음에 들어오던가요? 김: 사실은 일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흉내를 낸 것이지요. 이: 한국말 하면서 외모는 서양 것을 흉내냈으면 어색하지 않았나요? 김: 그러려니 하고 보니까 어색하진 않았어요. 그렇다고 또 너무 그냥 한국이라고 한국 사람 그대로 하는 것도 우습고. 이: 영화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김: 영화이야기를 하면 외도를 한 것 같아서 아직까지 부끄럽습니다. 이: 아마도 「햄릿」을 영화로 만들어서 선생님이 거기에 출연하셨다면 아마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영화라는 게 당시만 해도 너무 상업적이고 작품성이 없었으니까 괜히 생계를 위해서만 하신 것 같으신가 봅니다. 김: 그랬어요. 사실은 외국의 예를 들면 로렌스 올리비에, 알렉 기네스 등이 모두 연극 배우입니다. 연기자는 뭐든지 해야 합니다. TV시대니까 TV연기하는 것도 좋구요.그러나 연극을 잊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나는 영화 할 때도 언제든지 연극으로 돌아간다고 다짐했고 결국은 돌아와서 연극무대에서 은퇴했습니다. 이: 같이 활동하셨던 유치진, 이해랑 선생님들은 여러 가지 활동과 제자들로 한국 연극계에 확실한 족적을 남기셨는데 선생님은 특별히 아끼시는 후배라든지 제자가 있으신가요? 김: 나는 학교에 나가 강의할 틈도 없었고 연기하기에만 바빠서 좋은 배역은 모두 해보았지만 제자는 없어요. 이:
선생님이 연기하신 역할 중 특히 기억에 남은 배역은 무엇입니까? 이: 처음에 세일즈맨의 죽음 대본을 받았을 때 감이 오던가요? 그때는 우리 나라가 아직 산업화가 안됐을 때인데요 김: 그래도 그 월부 인생 그런 게 감이 오더군요. 그 작품을 하면서 실제로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이: 어느 대목에서 가장 눈물이 나오던가요? 김: 죽기 전에 큰아들과 언쟁하는 장면이었어요. 또 그 작품으로 새로운 스타일로 연기를 해보겠다는 야심도 있었지요. 그때는 극장이 영화관 공용이어서 음향 때문에 배우들의 발성이 제대로 잘 안됐어요. 그런데 유치진 선생께서는 “배우들이 발성을 잘해라. 작가들은 몇 날 몇일을 고민해서 대사 한마디를 쓰는데 너희들은 그냥 막 흘려버리면 안 된다. 연극의 생명력은 연기자가 대사전달을 하는데 있다”고 하셨어요. 자연스럽게 하려면 TV드라마 같이 대화하는 식이어야 하는데 무대에선 톤을 높이니까 부자연스러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 때 나보고 결점이 대사가 부자연스럽다고 했어요. 그래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할 때는 내가 욕을 먹더라도 톤을 낮추고 아주 심리적으로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첫날 첫 공연에 객석 에서 “크게 해라 안 들린다”하더군요. 그래도 다짐했답니다. 넘어가지 말자고. 그대로 밀고 나가니까 관객들이 조용히 듣게 되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어요. 이: 관객들은 그 작품을 잘 이해하던가요? 김: 좋았습니다. 신상옥감독은 프레드릭 마치가 나온 영화를 보고 프레드릭 마치보다 내가 더 잘했다고 해서 자부심을 갖고있답니다. 이: 선생님은 어떻게 희곡 속에서 인물을 만들어내십니까? 김: 배우들이 모여서 소리내어 대본을 자꾸 읽어야합니다. 읽는 중에 창작해 나가는 것이지요. 이: 선생님은 배우로서 자유롭게 사시면서 많은 분들의 부러움을 사셨는데 배우라는 직업을 택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아무 후회도 여한도 없습니다. 하고싶은 것 다 했고 깨끗하게 은퇴했으니까요. 더 이상 욕심이 없기 때문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여생을 편히 지낼 수 있습니다. 이: 선생님 말씀이 앞으로 연극활동을 하는데 많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후배 연극인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요. 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정리하고 싶군요. "잠시 다른 길을 걷다가도 언젠가는 다시 연극이라는 고향으로 돌아오란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 선생님 건강하시구요. 젊은 연극인들 활동하는 모습 잘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