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운 연극평론가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가? 항상 집으로.” 이
말을 빌려 말하면, 연극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가? 항상 희곡으로. 틀린
말이 아니다. 한국연극은 아주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다. 희곡과
멀어진 채 연극을 했다. 희곡은 연극의 지정학적이며, 공간적인 고향이다.
희곡의 역사는 희곡을 통하여 자기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연극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연극은 희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희곡
속에 있어야 하고, 희곡을 누려야 한다. 연극은 더 이상 문학의 말단이
아니며, 희곡은 연극의 들러리가 아니다. 극작가와 연출가가 연극의
헤게모니를 위하여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연극을
만드는 작가일 뿐이다.
사람은 고향을 떠나면 그리워 하지만 한국 연극은
고향을 잃고 순례자로 떠돌며 살고 있다. 연극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고향인 희곡을 부정해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 도망자의 자유를 허락한
실향의 결과는 비참했다. 희곡이 없는 대신 테크놀러지와 같은 요소들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었다. 연극은 극장 공간이 지닐 수 있는 상상력을
중요하게 여겼고, 문자와 말보다는 이미지와 오브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하여 연극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수 있었지만, 소리와 문자의 울림 그리고
몸의 움직임과 같은 고유한 모습을 잃어버려 자기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한국연극의 중심지’라고 하는 동숭동은, 비유하자면
연극의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실향민들의 거주지이다. 여기서는
낡은 연극이 아니라 새로운 연극만이 살아 남는다. 낡은 연극은 가계와
혈통이 드러난 연극이고, 새로운 연극이란 존재가 추상화된 연극일 터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러한 연극들이 엎치락 뒤치락 할 뿐이다. 한국연극의
근대화는 이렇게 계속된다. 연극의 근원이 사라짐으로써 연극의 망각에
이어 상실의 위기를 낳았다. 연극은 희곡으로부터 멀어져 소외된 존재가
되고, 희곡은 고독한 존재로 전락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희곡없이도
연극을 할 수 있다고 믿고, 희곡을 부정하면서 연극을 해야 한다는 뒤틀린
의식을 지닌 연출가들이 한국 연극을 장악하고 있었던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예언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히브리 격언처럼,
과연 그들은 연극의 예언자였던가?
말들의 현상학 - 희곡
연극에서
희곡의 몫이 커지고 있는 것과 더불어 영화에서도 세익스피어가 부활하고
있다. 왜 다시 세익스피어인가? 세익스피어는 곧 고전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희곡의 고전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희곡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시대가 오고 있다는 증좌
이다. 연극을 위하여 고전희곡을 처음부터 다시 읽자. 예를 들어 체홉의
「벚꽃 동산」에서부터 「곰」과 「청혼」, 입센의 「페르 귄트」, 몰리에르의
희곡들을 찾아 읽으면 글과 더불어 말들이 조금씩 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말들은 때로는 뜻으로, 때로는 소리로 와닿는다. 말들의 현상학이
희곡 속에 있다. 희곡은 읽을수록 분석하기보다는 외우고 싶어진다.
대사를 소리내서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희곡 속의 말들의 소리와 의미를
음미하게 된다. 그것은 배우처럼 딕션과 인물의 성격과 상황에 걸맞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로 발화하여 그 울림을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희곡을 눈으로 읽는 것과 소리내 읽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눈으로 다 읽었다고 말하는 것과 읽어 암기하는 것은 또한 다르다.
희곡을 읽으면서 지니게 되는 문제는 외국 작품인
경우 번역에 있다. 아직도 고전 작품인 경우, 세로쓰기를 한 일본어판
번역이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번역본들은 문체가 조악할
뿐만 아니라 원본을 생략하기도 했다. 인쇄된 글씨는 작아 오랫동안
볼 수가 없다. 인정받는 훌륭한 번역본이 없기 때문에 읽으면서 우리말
번역본이 정확한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고전 희곡을 읽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원본을 읽어야 할 때가 많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인 경우,
번역본이 많지만 터무니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필자는 영어본으로
읽기 어려워 불어본으로 읽는다. 반면에 라신느와 같이 프랑스 고전
희곡인 경우에는 불어가 어려워 영어본으로 읽는다. 이런 고통은 우리
나라 고전을 읽기 위해서도 치러야 한다.
고전 희곡들의 공통된 특징과 필요성
연극을
공부하는 학생들조차 「심청전」이니 「춘향전」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
알고 있는 내용들은 원본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책을 읽지 않은 채
그냥 소문으로만 들었기 때문일 터이다. 위에서 예로 든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꼼꼼하게 읽으려면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한다. 우선 좋은
판본을 구해야 하고, 잘 설명해 놓은 해설서를 옆에 두고 읽기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 책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눈이 맞아 도망친 이들이 있다면, 등이 맞아 살림을
차린 뺑덕어미와 눈먼 황봉사같은 이들도 있다.
고전 희곡들의 공통된 특징은 동시대성을 지니고 있는 점이다.
고전은 언제 읽어도 좋은 작품이면서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밀턴의 「실락원」을 전공하는 미국의 한 교수가 작품을 그것도
거꾸로 외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학생이라면 이런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싶어졌다. 문학 공부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연극을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서 아직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희곡을 줄줄 외우는 이를 보지 못했다.
일상의 대화나 소설 속에서 희곡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은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아첨하는 이른바 교언영색하는
것도 아닐 터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 발화하는 말의 울림은 삶의 유장한
흐름에 얹힐 때 비로소 멀리 멀리 퍼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기
위함이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샤가 하는 “제게
빛을 주시되 가볍게 하지는 마세요. Let me give light, but let me
not be light”(5:1:129)라는 말은 얼마나 빛이 나는가! 죽기 전에 좋아하는
고전을 몇 번 더 읽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