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문화예술 20세기 정리와 21세기 전망 ③ 무용 |
[21세기 무용의 전망] 한혜리 무용평론가, 경성대 교수 1999년을 보내면 2000년을 맞이하는 것은 누구도 거슬리지 못하는 일인데 1998년에서 1999년으로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길래 이렇게 지구촌 전체가 술렁이는가? 우리로 말한다면 70년을 맞으면서 그리고 80년에 대한 기대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80년대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경험하고서도 새로운 세기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결과를 차치한 기대는 참 벅찬 것이고 가질만한 감정이다.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무용을 기대하는 것, 무용으로 인해 좀 더 행복하리라는 상상도 포함되니 말이다. 무용사적으로 볼 때 새로운 양식과 새로운 장르의 무용이 생겨나는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원천이 있다. 그 하나는 지구의 각 민족문화의 소산으로서의 춤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기술의 발달이다. 민족 대 이동을 수 차례 겪은 지구상의 모든 민족은 국민 내지는 종족 그리고 생활 반경과는 관계없는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 등으로 구분되고있다. 그들이 지닌 각각의 문화가 세계 속 하나의 핵으로 기능해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무용의 내적 혁명을 주도한다면 나날이 발전하고있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무용 창작 방법론의 혁신으로 무용의 외적혁명을 일으킨다.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새로운 형태의 무용은 움직임과 또 다른 매체와의 새로운 결합방식으로 예술 장르간의 구분마저 모호하게 만들어 오늘날 탈 장르, 장르간의 통합 내지는 벽 허물기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도저히 융합될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이 어우러져 있는 오늘의 새로운 무용이 낯설다 해도 그리고 내일의 무용에서 어떤 충격을 받을지 염려스럽다해도 상상을 뛰어넘는 과학과 산업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발끝으로 춤추는데 만족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시장 논리에 의해 체제가 개조되는 상황에서 인격도야를 위한 인격 성장의 발로로서의 고상한 차원의 춤추기만을 강요할 수 있을까?우리의 시대 정신과 맞물린 작품을 맛보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가?비록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무용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지라도 그리고 친숙한 형태가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을 열고 새로 태어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포용한다면 새로운 세기에는 보다 많은 애호가들이 그들의 지성을 또 다른 방법으로 자극하는 무용의 즐거움으로 인해 행복할 것이다.
새로운 세기·새로운 무용 무용에 있어 배분 불가능한 존재 요소인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현대의 과학문명이 무용에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이자 혼란이었으며, 현장예술이자 1회성 예술로서 무용의 존재는 유일성에 있어서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실내·외의 특정 장소인 무대 그리고 흔히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던 감상을 전제로 한 무용은 그 공간의 개념이 바뀌면서 범위도 인간 상상의 영역만큼 넓어졌다. 컴퓨터 사이버 공간은 물론이고 편집이 가능한 영화나 비디오필름의 공간으로 다양화되어 당연히 공연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증인으로 무용수가 만드는 작품과 함께 시간의 경과를 체험했던 관객의 시간 개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정된 공간인 무대의 정형화된 틀을 깨는 첫 시도는 그랜드 유니언이 했고, 비디오 필름 속으로 무용공간을 옮긴 커닝함의 생각이 혁신적이 라는 것은 이제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평가 기준이다. 영화 필름으로 무대 메커니즘의 한계를 해결한 에스뀌스 l’Esquisse 무용단의 부비에 Bouvier와 오바디아 Ovadia의 시도는 9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일로 무용공간 개념의 확대 뿐 만이 아니라 영화의 편집이 갖는 창작방식을 무용에 적용시킨 또 다른 시도도 포함되어 있기에 무용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혁신적 생각을 한 무용 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민족문화 유산으로서 무용을 보는 시각 무용은 더 이상 육체적 예술이 아니다. 움직임의 테크닉에 가치 평가를 의지하는 시대를 벗어나면서 작품에서 독창성의 배경이 되는 것은, 나와 타자를 구별하고 자신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징표로서의 민족문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족문화 유산으로서의 무용은 각 민족 전통무용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계승과 보존의 방법론도 각 민족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적용, 발전시키고 있다.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개방한 지는 오래 되었으나 지구촌 가족이 한국의 문화를 중국과 일본의 그것과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에 대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게 된 것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이 가장 큰 계기로 작용했다. 다르다는 이유로 호기심을 자극했던 한국의 전통 문화에서 가장 가시적 효과가 컸던 것은 전통 춤이었고 그후 이미 평가받은 유산에 대한 보존과 계승에 유형의 문화재와 같은 기준을 무용에도 적용시켰다. 이러한 전통의 보존과 계승이 새로운 세기에도 과연 시장성을 가질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언젠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감탄한 지구촌 사람들의 호기심은 그칠 것이고 그 후 우리의 전통 춤이 세계문화에서 하나의 핵으로 존재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에 대한 답이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마사 그라함이 자신의 조국인 미국의 부강을 위하여 개척정신을 강조한 애국적인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국가 정책적으로 후원을 받고 개인 본인의 이름을 내건 학교 운영으로 그라함 테크닉을 세계에 전파하여 문화 사절로의 역할을 다했던 것은 이미 20세기 초, 중반의 일로 인디언에게 땅을 빼앗은 미국인의 행위에 무용작품을 통해 정당성과 합리화의 계기를 제공 해준 종교와 같은 수준의 예술의 정신적 힘의 과시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세련되지 못한 문화정책이 세기말에 오게 되면 유럽은 좀더 세련된 방법으로 자신들이 문화국민임을 그리고 세련된 국민임을 강조하게 된다. 다 종족 국가가 보편화되어 있고 민족의 이동이 빈번한 오늘날의 사람들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주관적 결심으로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도 이미지관리를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들이 속해있거나 심하게는 선택한 국가에 대한 자부심도 국가 결속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전의 군사력 내지는 점유 면적으로 국가의 부강을 과시하던 것이 20세기 중반 민족국가들의 잇단 독립으로 그 막을 내렸다면 독창적 문화로 내재적 힘을 과시하고 예술로서 자신들의 국가관과 사상을 전파시켜 식민지와는 또 다른 복제 민족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국가력의 과시는 유럽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거의 모든 유럽 통합국가에서는 더 이상 무용인의 출신국가나 문화 배경이 된 민족에 대한 구분 없이 그들 모국의 이름 대신 경제적으로 지원하고있는 자신들의 나라이름을 달고 작품활동을 하도록 하고 있다. 즉, 그들의 배경이 된 조국과는 상관없이 경제적, 정책적 지원을 하고있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의 무용단 이름을 달고 세계 순회공연을 하게 한다. 특히 아시아 지역을 순회할 때에는 무용단원들의 일체 경비를 지원함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홍보까지 전담하고 있으며 안무자를 비롯한 무용수의 대우는 자신들 국가의 부강과 국가 이미지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젊은 무용가중에 독창적 작업방법으로 이미 무용사에 기록되고 있는 조셉 나지는 헝가리 태생이고 카롤린 칼송은 미국인이다.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의 윌리암 포사이드도 미국인이며 네덜란드 댄스시어터를 성장시킨 지리 킬리안은 체코 출신이다. 그러나 유럽의 대부분 나라들은 그들 국가의 국적으로 활동하여 국가이미지를 상승시키기만 한다면 무용인의 상상력의 원동력이 되고 독창적 표현의 근거가 되는 그들 민족문화는 어떤 것이 되었건 “환영합니다”이다. 이제 국가는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제공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기반과 그 힘으로 문화적 자긍심까지 줄 수 있는 이미지로 다른 국가와 차별화 되려고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 개인이 지닌 독창성은 성장배경에서 온 민족문화권의 민족정서가 세계문화의 하나의 핵으로 작용하고있는 것이다.
시장논리와 무용의 문화 상품화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리고 자유시장 체제에서 문화도 하나의 상품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디자인과 포장이 상품가치를 높인다는 것도 이제는 새삼스레 설득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주장이 아니고 그 포장에는 국가나 민족에 대한 선전은 물론 그 권력의 과시도 포함되어 있다. 구매를 전제로 하는 상품은 여러 종류 그리고 다양한 질이 구비되어있어야 한다. 수요자의 수준에 따라 공급도 그 차원을 달리하여야한다. 전통 춤을 상품화 할 때도 관광 상품으로부터 시작하여 문화의 복합체로서 의상에서 시작하여 몸맵시까지 문화의 고급 프리젠테이션 성격의 상품으로까지 그 다양화를 생각해야 한다. 전통을 근거로 한 새로운 장르의 무용 개발은 상품의 또 다른 다양화 측면으로 시대 감각을 가진 전통의 변용은 막아야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해야할 시대인 것이다. 관광 패키지 상품에 포함될 수 있는 한국 춤도 그리고 한국 대중 정서를 바탕으로 십대에서 노년층까지 다양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대중가요를 더 화려하게 장식하는 코러스 무용도 독창성을 갖기 위해서는 실험적 창작무용이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어야한다. 물론 새로운 무용의 근원지는 민속무용이나 민족무용 등의 전통 춤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전통 춤의 보존과 계승은 필수적인 것이나 그 변질과 변용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수준의 대중과 다양한 취향의 관객 예술에 있어서 고급과 대중 혹은 순수와 오락의 단순한 이분법에는 무리가 많다. 예술의 한 장르에서는 무모한 대중에 불과한 사람이지만 다른 장르에서는 전문가인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연령에 따른 취향의 특성도 무시하지 못하며 생활환경에 따른 취향의 다양성 그리고 전문화된 직업의 과학시대를 살면서는 지성과 감성 즉 지성과 문화적 수준과의 불일치가 보편화되어 개인의 수준에 맞는 무용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떤 종류의 무용을 보고 즐거워하는지에 대한 각자의 취향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채 무용환경에서 소외되는 인구가 적지 않다. 세대에 따라 제공되는 문화 환경이 다르고 또 무용 환경에 대한 정보 입수의 방법도 다르다. 극장에서의 감상 무용이란 발레 등의 특정 무용밖에 모르는 세대가 있는가 하면 춤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조용히 앉아서 생각하고 감상하는 무용을 어색해 하고 지루해 하는 오늘의 10대까지 무용의 수요 계층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이제는 어떤 것이 고급한 취향이고 저급한 취향인지를 분리하고 취향의 고급화와 고급한 정신의 소유를 위해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무용을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된다고 감상을 강요할 수 있던 강압적 교육환경은 조성할 수 없다. 이렇게 다양하고 유도(誘導) 불가능할 것 같은 관객을 우리 무용계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할 것인가?
다양한 전문인이 필요하다 무용의 종류가 다양해진다는 말을 무용에 대한 욕구가 다양해 졌다는 말로 바꾸면 무용 전문인들의 분야가 다양화되고 세분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방법론으로 무용을 만드는 창의력을 가진 안무자가 많이 나올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을 조성해야한다는 주장은 다른 국가 또는 타 장르 예술과의 경쟁에서 시장 논리에서 밀리지 말아야하는 어찌 보면 무용의 존립과 관계되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이다. 무용창작이나 공연에 필요한 타 장르 예술 전문인들과의 협동 내지는 공동 작업은 필수적이고 완성된 무용작품을 포장하고 선전하는 전문가도 필요하다. 경영 마인드만 있다고 해서 무용의 관객 층을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무조건 관객을 많이 동원한다고 해서 성공적인 기획이라 할 수도 없다. 예술품의 선전은 더더욱 수용계층의 수준을 정확히 겨냥할 수 있는 감각도 있어야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순수창작무용의 바른 방향 설정과 그에 따른 타당하고 합리적인 공식적이고 사회적 인정과 평가이다. 관객의 취향을 고급화하는 거시적이고 교육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대중이 좋아하는 무용만을 만들고 공급하는 시장논리에 무용이 놓여지게 된다면 대중 취향에 맞춘 작품만을 무용인에게 요구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세계 경쟁력이 없다느니 상품화 능력이 부족하다느니 하면서 한국의 무용계는 자성의 소리가 높다. 제작에 많은 투자를 한 창작품도 한정된 무용 관객으로 1회나 2회 공연으로 끝나게 되면 경쟁력 희박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오늘의 무용환경이나 2~3명의 관객을 앉혀 놓고도 굳건히 그리고 당당하게 무대를 점유하고 있는 타 장르의 관습과 비교해 볼 때 경쟁력 탓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창작의 당위성과 순수한 정신에 당당함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잘못된 환경 탓이 아닐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 가능한 순수 창작무용이 있을까?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 채 공연되어지는 순수 무용이 없다면 그리고 창작인이 그 고독한 작업을 중단한다면 관객들이 그토록 손뼉 치고 즐거워하는 TV의 춤들도 그리고 흥이 날 때 한바탕 추는 춤도 그리고 성장하고 우아하게 즐길 수 있는 이미 보편화되어진 감상용 무용공연도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곳이 없어진다는 것을 대중 모두에게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그러나 새로운 무용창작품을 지금 당장 이해하고 즐길 줄 모른다 해도 즉, 그것이 재미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투자하고 지켜봐 주어야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심어줄 수 있다. 그래야 새로운 21세기에는 우리도 땅의 크기나 경제력, 군사력으로가 아닌 고급한 정신 문화로 세계 다른 나라와 당당히 어깨를 맞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