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문화예술 20세기 정리와 21세기 전망   ③ 무용

[원로에게  듣는다·최 현]
 우리 춤은 선대들이 남겨준 보물

장광열  무용평론가

choihyun.jpg공연예술계에서 무용가 최현은 완벽주의자로 통한다. 자신의 일상 생활은 물론이고 예술 창작 과정에 있어서도 그는 철저하다. 최현은 또 ‘시대의 낭만주의자’로 불린다. 그의 주변 곳곳에서 최현 특유의 유머와 멋스러움을 읽을 수 있다. 작가이자 평론가인 박용구는 최현의 작업에 대해 ‘시간과 공간이 계산된 극장춤으로 한국무용의 품격을 높이는 작업’이라고 규정한다. 박용구는 또 최현을 “「인간문화재」라는 물신화(物神化)의 명예를 비켜 선 창조적인 예술가”라며 그의 탐미주의를 칭찬했다. 그런가 하면 극작가 차범석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선비’라는 말로 그의 유유자적한 그러면서도 격조 높은 예술세계를 비유했다.

  최현의 행보는 수시로 필자를 놀라게 한다. 무용 공연은 물론이고 음악, 국악, 연극 등 중요한 공연이 열리는 현장에 가면 어김없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은 물론이고 세종대, 서울예고 등에 정기적으로 출강, 대학의 정교수보다도 훨씬 많은 시간을 후학들을 지도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운영위원, 문예진흥원의 각종 심의위원, 무용 콩쿨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정책적인 자문에서부터 좋고 나쁜 것에 대해 단호한 잣대를 들이댄다. 최근에는 서울예술단이 하반기 정기공연 무대로 올리는 「향가 - 사랑의 노래」 안무를 맡아 직업무용단의 단원들과 수개월째 연습실에서 땀 흘리고 있다. 다른 원로 무용가들이 춤의 현장에서 한발 비켜서 있는 것과 달리 최현은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춤에다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장광열 : 서울예술단과의 작업은 창단공연 때 「새불」을 안무한 이래 두번째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안무하신 「새불」은 당시 총체예술을 표방해 대단한 화제를 불러모았지요. 이번 작업은 어떤 내용입니까?

최현:서울예술단이 향가를 소재로 공연하는 세 편의 작품 중 「헌화가」의 안무를 맡았습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향가 중에서 사랑을 소재로 한 세 개의 작품을 뽑아낸 것은 이번 작업이 가무악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적절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서울예술단의 신임 무용감독인 손인영 씨와 현대무용을 전공한 안애순 씨 등 30대 후반의 젊은 안무가들과 한 무대에서 공연한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장:「헌화가」는 수로부인에 얽힌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선생님의 창작 작업에서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우리 것에 대한 천착과도 연관성이 깊을 것 같습니다. 「헌화가」에서 특별히 중점을 둔 요소들은 어떤 것들인가요?

:「헌화가」에 등장하는 진달래꽃의 이미지는 초월적 승화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겠다는 것은 보편적 삶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유와 상징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시문학이듯 향가 역시 매우 은유적이고 상징적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진달래꽃과 수로부인에 대해 1차원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의 정신세계와 연계시키는 작업을 해볼 작정입니다.

장:연습 과정에서 굉장히 소리를 많이 지르곤 하시던데요?

최:그래요. 저는 연습할 때 항상 단원들과 함께 움직입니다. 소리를 크게 질러대지요. 그래야 기가 살아나옵니다. 활력도 있고, 선생이 함께 춤추지 않고서는 신체를 매개로 하는 무용 창작작업은 그 효과가 반감됩니다.

장:창작작업에 있어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선생님의 완벽주의는 이미 소문이 나 있습니다. 캐스팅 과정에서 항상 고민하는 것도 완성도 높은 작업을 추구하는 의지 때문일텐데요, 이번 작업에서의 캐스팅 과정은 어땠습니까?

최:역시 힘들었어요. 단원들이 아직은 젊기 때문에 완벽한 표현을 기대하기는 무리입니다. 그래도 단원들이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있어 힘을 내고 있습니다. 노인 역은 제가 직접 춤출 예정입니다.

장:직접 출연하신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됩니다. 노인 역을 맡는다고 하시니 선생님의 작품 중에 「허행초」생각이 나는군요.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초연된 것으로 선생님의 춤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만든 작품이었지요.

최:「허행초」는 김영태 시인이 저를 위해 써준 시의 제목입니다.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는 자유주의자의 초월적 인생관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70평생 춤추기에 대한 마음 비움의 겸허한 자기성찰이지요. 3명의 동자들이 나오는데 공연이 끝난 후 참 좋았다는 얘기를 여러 군데서 들었습니다.

장:당시 선생님의 그 독무를 보고 한 평생 춤으로 살아오신 한 예인의 도도한 혼을 춤을 통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작품 공연 후 「허행초」라는 모임도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최:네, 공연이 끝난 후 인사동 이모집에 여러 사람들이 모였었지요. 예술행정가인 이종덕, 소설가 이세기, 화가 이만익, 음악평론가 이상만, 사진작가 배병우, 시인 성춘복 등이었지요. 「허행초」모임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장:최현은 본명이 아니지요. 선생님이 처음 춤에 입문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최:1929년 부산에서 태어났어요. 본명은 최윤찬입니다. 1946년 김해랑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8년 동안 선생님 밑에서 춤을 익혔지요. 54년에 독립해 혜화동 근처에 무용 연구소를 개원했어요. 76년에는 최현 무용단을 창단했고 그 사이에 문화재 전문위원,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등을 맡기도 했지요.「초라니」, 「춘향전」, 뮤지컬 「시집가는 날」, 「심청가」를 위시해「강릉매화전」, 「연」, 「광대가」, 「변강쇠타령」, 「토생전」 등을 안무한 것이 이 당시였습니다.

장:당시에는 지금보다 무용계 여건이 훨씬 열악했었는데, 예술가로서 어떤 목표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최:우리 춤의 형식이나 고루한 인습을 탈피하고 선대의 훌륭한 춤 자양분을 섭취하되 그것을 뛰어넘는 창조정신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천품은 곧 춤의 득도요 길」임을 생활신조로 삼았지요.

장:제가 선생님을 취재현장에서 만난 것이 84년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선생님은 국가적인 행사를 비롯해 크고 작은 공연을 통해 많은 작품들을 선보였지요.

최:86년 아시안 게임 개막식 식전 행사인 「영고」, 88년 서울 올림픽 폐막식에서 「안녕」 안무를 총괄했지요. 그 사이에 무용극, 창극, 마당극, 뮤지컬 등의 안무를 맡았고 창작춤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였어요. 90년에는 「동아일보 창사 70주년 기념 공연 「아리랑」을 안무해 모스크바 등 5개 도시를 순회공연하기도 했지요.”

:이 시기는 특히 화제작들이 많이 선보인 시기였습니다. 국적 불명의 창작춤이 난무할 때 우리 전통춤의 격을 오롯이 유지한 채 현재적인 감각을 가미한 작업들이 연이어 선보였지요.

최:대작보다는 소품이나 중편 규모의 작품들을 많이 공연했습니다. 「비원」, 김현자와 함께 춤춘「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남색끝동」, 박재삼의 시에 원필녀가 춤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96년 춤과 의상과의 만남 전에 출품된 「달 있는 제사」, 「상」, 「연가」, 「고풍」, 「남천」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입니다.

장:94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있었던 춤 입문 50년을 기념하는 첫 개인발표회는 단연 화제였지요. 아무래도 다시 한번 그때 얘기를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최현 춤전」으로 이름 붙여진 당시 공연은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최: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고 격려해 주었지요. 공간 속에서 춤춘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찰나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우주적 질서의 운용과 조형미, 영상미를 다룬다는 것은 늘 어렵습니다. 마치 건축과 같다고나 할까요. 발동작 하나, 손동작 하나가 모두 허공에 쌓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위한 작은 벽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첫 발표회가 늦어진 것입니다.”

:당시 공연을 준비하시면서 “우리의 춤사위, 춤가락을 형상화하는데 반세기가 걸렸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너무나 쉽게 자신의 개인 발표회를 겁없이 마련하는 젊은 무용가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97년 7월에는 울릉도에서도 공연이 있었지요?

최:독도 박물관 개관을 기념하는 현장에서 안숙선 씨의 창에 맞추어 「기원무」를 안무하고 춤추었지요. 자연 속에서 자연을 찬미하는 춤이었는데 아주 색다른 경험을 했어요.

장:국립무용단 단장을 역임하면서 수 차례의 해외공연 등을 가졌고, 창작작업 외에도 여러 군데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등 그 왕성한 작업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춤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는 자세로 살아 왔습니다. 춤 인재 배출이 나의 삶의 목표이지요. 그래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갑니다. 젊은 무용가들에게 제가 살아온 경험담과 제가 춤을 추면서 느끼는 생생한 체험들을 들려주는 것 자체가 예술가로서의 성장을 돕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장:꽤 오랫 동안 선생님을 지켜보았지만 선생님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은 전공도 각기 다르고, 계층도 상당히 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폭넓은 교류를 하게된 배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최:젊은이들을 만나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되지요. 나는 그들에게 나의 경험을 주지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살이에 대한 감각도 터득할 수 있고요. 저보다 나이 드신 분들로부터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장:90년대 들어 안무한 작업 중에서 몇 편은 우리 무용사에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들입니다. 저에게 선생님의 대표작 세 개를 꼽으라면 「남색끝동」, 「비상」, 「군자무」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조선조 양반계층 여인들의 한을 다룬 「남색끝동」은 가사노동의 생활 정서를 은은한 한국의 춤사위로 풀어낸 품격 높은 작품으로 평하고 싶습니다. 「비상」은 무엇보다 남성춤의 기개와 절제미가 오롯이 농축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군자무」는 매 난 국 죽의 춤 때깔이 각기 살아 숨쉬면서 전체적으로 수묵화의 담백함과 여백의 아름다움이 춤사위와 공간 사용 등을 통해 제대로 표출된 작품으로 평하고 싶습니다.

:명작무로 지정된 「비상」은 제가 가장 아끼는 독무입니다. 97년 12월 국립 민속박물관 공연 때 처음으로 아내이자 제자인 원필녀에게 이 작품을 물려주었습니다. 「군자무」는 93년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때 국립무용단의 주역 무용수들인 최정임(매화), 이미미(난초), 이문옥(국화), 양성옥(대나무)이 춤추었지요. 도예공 역은 손병우가 맡았습니다. 박용구 선생님께서 이 작품에 대해 「극장춤의 틀과 전형을 통해 도예공의 탐미적인 환타지가 전개된다」는 촌평을 해주셨습니다. 「남색끝동」은 최옥선 류의 가야금 산조를 사용해 만든 군무 위주의 작품이지요.

장:춤추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최:춤추는 마음의 바탕이 거울처럼 투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울은 춤추는 사람의 인격이요, 자세입니다.
장:최근의 한국 무용계 상황을 보고 걱정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최:준비 없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극장 공간을 무서워하지 않는 분위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보다 부정한 방법으로 외적인 결과를 얻으려는 일부 지도급 무용가들의 헛된 의식도 하루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예술가는 창작의 결과인 「작품」으로 말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작품이 예술가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재능 있는 예술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최현의 춤은 우리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춤사위에서 그렇고 작품의 소재, 그리고 소품이나 의상 등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언제나 그의 작품은 깔끔하다. 완벽주의자인 그의 성격이 작품 곳곳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우리 전통춤은 선대들이 남겨준 보물입니다. 그 춤들은 서양인들이 갖지 못하는 깊은 우물입니다.”

 그는 우리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무용가들의 현재 모습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노트를 챙기며 일어서는 필자에게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건넸다.  “저는 언젠가 저의 춤 인생을 강을 건너가는 사공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춤과 함께 평생을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