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현장 -마당극 공연현장

연극의 개념과 그 개념을  실현하는 건축이 탄탄해야…
“변학도는 왜 향단이에게 삐삐를 쳤는가?”

 김윤철  연극평론가

신분 상승을 노리는 탈선한 기회주의자 춘향

고전을 현대화한다는 것은 고전에 대해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관, 인생관, 인간관을 전제로 해서 변화된 사회의식과 세계관을, 또는 적어도 미학적 관점의 변화를 전경화함으로써 동시대에 적합한 연극적 발언을 하고자 함이다. 이를테면 흥부를 무능력한 패배주의자로 보고 놀부를 유능한 정치인으로 본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신생극단 천막무대가 제작한 「변학도는 왜 향단이에게 삐삐를 쳤는가?」(최민아·박미영·조은정 공동작, 김형태 연출)는 역시 춘향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을 전복시키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다. 춘향은 이제 더 이상 기생의 딸로서 양반의 아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키는 양반순종적인 인물이 아니라 몽룡이와 변학도 등 닥치는 대로 양반들을 성적으로 유혹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탈선한 기회주의자다. 이 극에서 고전의 윤리관을 전수하는 인물은 향단이다. 향단이와 방자를 선하고 의로운 인물로 유지시켜 춘향이의 변화를 부각시키자는 것이 이 공연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다.

 

마당극 형식의 극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려면 마당극을
극장극 형식으로 각색하거나 극장을 마당화해야…

우리에게는 정인숙이 있고, 미국에는 르윈스키가 있어서 이러한 설정이 전혀 어색하거나 무리스럽지는 않다. 다만 그렇게 인물의 성격을 반대화하려면 연극논리적으로 그것이 설득될만큼 동기부여와 성격발전을 텍스트 안에서 실현해야 하는데, 이 공연에선 작가의 의도만 있지 그 의도를 실현하는 드라마터치가 없다. 그래서 새 춘향이가 밉거나 충격적이지도 않고 새 향단이가 감동스럽지도 않다. 물론 극은, 특히 후반부에, 핍박당하는 서민들이 의식을 깨우쳐 부당한 압제에 분연히 항거하는 모습을 강조하면서 집단을 주인공으로 삼는 극을 표방하고는 있다. 경박한 소극적 분위기로 일관하던 극이 이 시점에 이르면 갑자기 진지해지고 그 진지한 분위기가 필요이상으로 길게 강조되는데, 정작 변학도를 응징하는 장면에선 서둘러 화해를 시도한다. 정의의 승리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서민층에 대한 진실도 지배층에 대한 비판도 정당화될 만큼 충분히 발전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체적 진실의 규명없이 응시를 서두르는 우리네의 정치적 실수가 연극에까지 반복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현실이 그렇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 하는데 당위적, 개연적 세계를 그릴 수 있는 연극마저 답답한 현실을 반복할 때 연극의 소용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극이 현실을 드라이하게 사실적으로 복사하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어두운 희극을 지향하는 것도 아닌데, 밤무대 가수가 등장하고, 힙합춤을 춘다 해서 현대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연극의 개념과 그 개념을 실현하는 건축이 탄탄해야 하는 것이다.

   마당극 형식의 극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려면 마당극을 극장극 형식으로 각색하거나 극장을 마당화해야 할 것이다. 연출자는 극장의 로비와 통로를 활용하고 관객을 극에 참여시키면서 극장을 마당화하려는 쪽으로 작업의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동숭홀의 극장성을 무너뜨리기엔 그 시도가 너무나 단편적이고 미미했다. 중년관객을 억지로 끌어내어 해설자가 지시하는 주례사를 반복하게 하는 식의 관객참여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관객참여는 관객의 자발성과 즉흥성이 담보되지 않을 땐 무의미하다. 더욱이 연출자는 한국민족악단을 오케스트라 피트에 두지 않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무대 위에 둔채 연주와 반주를 시켰는데, 연극에서 무대 위란 배우들의 공간이기 때문에 기왕에 악단을 무대 위에 등장 시켰으면 그들을 배우처럼 활용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민족악단원들은 자기 몸을 들킨 관객처럼 수줍은 모습으로 극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무대환경 속의 이방인일 뿐이었다. 극은 인물의 성격과 무관한 우스개 소리와 길거리 언어, 그리고 박철민이란 배우의 대중친화력으로 일부 관객들에게 간헐적인 재미를 제공했지만, 마당극으로서도 극장극으로서도 자기존재를 정당화하는 연극미학의 부재를 드러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