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Review  - 문 학


김영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  세기말 소설의 한 표정

강진호  문학평론가, 성신여대 교수

김영하는 현실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의사(擬似)현실을 그려왔고 그것도 일상적 소재들을 변형하여 콜라주 collage하듯 가상의 체험을 만들어내는데 주력해 온 작가이다. 그의 소설은 현실에 대한 핍진한 반영과는 거리가 먼 다양한 내용들을 보여주며, 형식면에서도 멜로와 신파에서 키치, 판타지, 추리, 후일담 등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속도감 있는 문체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소설문법제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1997년 「호출」 이후 2년만에 나온 김영하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이 작품집에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욕망을 그린 「사진관 살인사건」을 필두로 「흡혈귀」, 「바람이 분다」, 「피뢰침」, 「비상구」 등 9편의 단편이 수록되
어 있다 .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독자들과 문학평론가들의 화제가 되었던 작가답게 이 작품집 역시 속도감 있는 문체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소설문법을 제시한다. 추리 형식을 빈다든지, 괴기소설의 주인공과도 같은 냉혈한을 그린다든지, SF의 한 장면과도 같은 기이한 모험을 감행한다든지 하는 등의 다양한 소재와 기법의 활용은 그의 궁극적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케 한다. 이를 테면, 일생에 한번 경험할까 말까 한 벼락맞는 체험이라든가(「피뢰침」), 죽음을 찬미하고 매사에 냉소적인 남편이 사실은 거세당한 흡혈귀였다는 내용(「흡혈귀」) 등은 작품이 작가의 상상에 의해 구성된 가상일 뿐 일상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단지 독자들의 기대지평을 배반한 대담한 상상력과 간간이 제시되는 영상적 이미지만 존재한다.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는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 또한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을 사로잡고, 더구나 기이한 삽화가 가미됨으로써 독자들은 추리소설이나 공상소설을 보는 듯한 흥미마저 느끼게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현실에서 벗어난 하나의 세계(혹은 형식)를 만들어 내고자 시도한다.그렇기에 그의 허구는 현실의 반영이라거나 인식과는 거리가 먼 단지 창조된 가상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 속에서 현실에 대한 고뇌를 읽어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뚜렷한 삶의 의미도, 나아가 목표도 갖지 못한 젊음의 광상곡

 소설이란 허구이며 그렇기에 허구에 집착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당연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소설의 재미란 이 허구의 실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하지만 허구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에서 암시받을 수 있듯이, 그것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개연성이 있는 거짓말이다. 더구나 소설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그리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독자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추체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삶과 현실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면서 부단히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개척해야 한다. 심지어 창작의 자료를 얻기 위해서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거나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방기하고 세상 속으로 몰입할 필요도 있다. 이런 것이 배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소설 쓰기란 백지 위에다 그림을 그려내듯 새로운 가상을 창조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품 속의 인물이란 그 나름의 역사가 있고, 그들의 삶 역시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현실의 논리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인물이나 상황이 꼭 작가의 의도대로만 그려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란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현실을 그리는 모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김영하 소설에는 이 후자의 측면이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하는 신처럼 인물과 상황을 장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결합(즉, 콜라주)할 뿐이다. 김영하 소설에서 인물들의 성격이 대부분 냉소적이고 허무적인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실제의 환경과 역사를 무시한 채 작가의 가치관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종되기 때문이다. 소설을 현실과는 거리를 둔 가공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기에 맞서서 가상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평범한 샐러리맨이 사랑을 느끼는 순간 갑자기 투명인간으로 변하여 직장과 가정을 잃게 된다는 내용은(「고압선」) 사랑이라는 지고의 가치마저도 조롱하려는 심리를 담고 있다.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고, 만나야 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은 이미 다 겪어보았다는 식의 자만이나(「바람이 분다」), 인생을 흉내내는 영화는 인생보다도 더 지겹다는 식의 냉소주의는(「흡혈귀」) 작가의 현실적인 무력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들의 행위는 무책임하고 안이할 수밖에 없다. 인물들은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섹스만을 즐기며, 걸핏하면 먼 타국으로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삶에 대한 애정이 왜곡되어 있는 까닭에 이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기껏 조소나 유희의 대상으로밖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작가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세상에 대해서도 달려오는 사람을 피하듯 슬쩍 비켜서 있다. 이렇게 보자면 김영하의 소설은 뚜렷한 삶의 의미도, 나아가 목표도 갖지 못한 젊음의 광상곡이라 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실제적인 즐거움을 제공해야...

90년대 들어서 문학의 독자가 급격하게 위축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소통 매체의 급격한 발달에 따른 문학 환경의 변화가 주된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겠으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문학 내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탈 장르와 서사 부재의 작품들이 횡행하면서 문학은 그 본래의 기능을 스스로 방기하고 있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근본원인은 대리체험에 있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삶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고, 동시에 미로와도 같은 현실에 대한 인식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존재방식은 바로 이런 데 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범람한 소설에서는 독자가 더불어 체험할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맥락 없이 내면세계에 침잠한다거나 우연한 사건의 남발로 현실을 추상화한다거나 아니면 설익은 감각만을 앞세워 서사를 부정하는 태도 등은 독자들로 하여금 공유할 체험공간 자체를 배제하는 행동이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기에 독자들은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흥미를 찾게 되며, 급기야 좀더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흥미를 제공하는 다른 매체로 시선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세기 전환기를 앞둔 상황에서 문학이 다시 본연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문학인 스스로가 냉정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촉망받는 젊은 작가 김영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역시 이제는 세상의 논리를 좀더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독자들에게 실제적인 즐거움을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