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예 술 칼 럼 |
정신문화와 경제논리 김주연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세기말 한국문화에 돈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착각이나 오해는 하지말자. 행여 많은 돈이 문화분야에 몰려들고 있다는 의미의 바람은 아니니까. 사실인즉, 그와 정반대의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돈, 돈, 돈…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온통 돈뿐이라는 인식이 전 국가적으로 강조되면서 모든 문화분야를 거세게 강타하고 있다는 의미의 돈 바람이다. 그러니까 돈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 막상 돈 그 자체에는 항상 빈곤한 결핍을 보여온 문화의 여러 부문들은, 요즈음 유행어로 ‘퇴출’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돈 못 버는 문화는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비문화론까지 거의 아무런 제한없이 범람하고 있다. 이른바 IMF 경제위기를 전후해서 우리현실에 급격하게 밀어닥치고 있는 이같은 흐름은 우리문화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크게 우려되는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소위 ‘경영마인드’를 곳곳에 내세우는 새로운 풍조는 몇 가지 배경을 등에 업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첫째는 경제위기가 관련된 경제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의 확대와 그 심화이다. 이것은, 한때 만 달러까지 국민소득이 올랐었다는 환상에 기인하는 상대적 박탈감과 관계된다. 물질생활의 풍요를 잠시나마 경험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중요성은 놓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나머지 물질지상주의, 경제지상주의가 부지불식간에 심어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 경제위기를 파고 든 이른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는, 경제위기와는 불가피한 상황을 배수진으로 치고,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명분으로한 정부당국의 경제 제일의 드라이브 정책을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신지식인들을 중심으로한 생산성·효율성의 문화론이 그것이다. 신지식인론은, 지금까지의 지식인은 말하자면 생산적 경제활동을 해오지 못했다는 비판을 담고 있는 새로운 명제, 혹은 케치 프레이드인데, 여기에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 숨어있다. 생산과 효율이 강조되는 능률주의(우리는 그 장단점을 70년대에 익히 경험한 바 있다)는 단기적으로는 경제발전을 재촉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문화의식을 불모화하고 결과적으로 인간성을 위협한다는 사실이다.
정신문화는 인문과학 일반이며 문학·예술부문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이제 체제 개념이 아니라, 욕망을 생산하는 코드의 개념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거의 맹목적으로 신봉하면서 동시에 그 바탕으로 삼고 있는 능률이라는 우상은 그 적정한 낙원이 실재하지 않는, 욕망이라는 미로이다. 욕망은 그것이 극대화될 때, 성경은 죄악이라고까지 규탄한다. 그래서일까,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도와온 것은 칼빈의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퓨리탄이즘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절제이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만을 동반할 때 자본주의의 능률 신화는 죄악·죽음의 저 성서적 에토스의 세계와 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청결과 절제를 요체로 한 자유·평등 사상과 더불어 성장해온 미국의 자본주의가 대체 언제부터 그 주춧돌들을 내팽개치고 소위 신자유주의의 물결속으로 가라앉게 되었는가. 우리 또한 언제부터 일말의 고려나 성찰도 없이 덩달아 이들의 손을 잡고 테크노 댄스를 추게 되었는가. 생각해볼수록 나로서는 우스꽝스럽다는 느낌에서 쉽게 벗어나지지 않는다. 올해초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열렸던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었다. 신자유주의가 바야흐로 기세등등하게 퍼져 나가던 시점과 맞물린 시기에 스며나온 인간선언인 셈인데, 경제분야 자체에서 진지한 반성이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장개방과 국가의 개입 자세, 자본이동의 자유를 내세움으로써 전 세계가 그야말로 자본의 능률과 능력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신자유주의, 거기엔 돈만 있지 인간은 없다는 공격이 가해진 것이다. 이 통렬한 비판은, 그러나 별 후속의 음성을 들려주지 않는다. 특히 우리에게서는 더욱 그렇다. 왜 그럴까? 정신문화의 힘이 너무 쇠약해진 까닭이다. 정신문화라고 하면 그 범주가 너무 넓거나 애매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크게 두 분야에 걸쳐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인문과학 일반이며, 다른 하나는 문학·예술부문이다. 지금 바로 이 두분야가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가고 있으며 국가와 사회제도, 심지어는 언론까지 이 정신문화 죽이기에 팔을 걷고 나서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 한 언론은 교수가 변해야 대학이 산다고 하면서 고고학, 철학 등을 노골적으로 ‘장사가 안되는 기초학문’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아울러 이런 부문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지를 폈다. 이런 주장은 국가에 의해서는 아예 국책화되고 있다. 교육당국을 통한 이른바 대학개혁, 혹은 구조조정의 내용을 보면, 수요자 중심, 즉 학생 선택권의 보장이라는 명분아래 ‘장사가 잘되는 학문’으로의 집중을 조장하고 있다. 그 결과 인문과학은 고사(枯死)하고 있으며, 이 현상은 당연한 시대적 추이로 정당화된다. 정당화될 뿐 아니라 국가는 각종 인센티브를 주면서 대학을 시장판으로 몰아 가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저항에 불이익을 주고 있다. 과연 인문과학, 곧 정신문화는 이렇게 죽어 마땅한 것인가. 문학·예술 역시 애니매이션이나 영상위주의 공연주의로만 그 생명이 연상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다음세대에게 참다운 능률성을 ... 물론
인문과학이나 전통적인 문학·예술이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첨단기술사회에서
옛날의 위엄을 관습적으로 누린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비현실적인
생각이다. 설혹 그 위엄이 계승된다고 하더라도, 시대인식과 방법론에
있어서 커다란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인문과학이라는 문학의 본질이 훼손되거나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우리 모두의 세심한 주의가 요청된다는 사실을 나는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 본질은 무엇인가? 한 단어로 요약된다면, 그것은
비판정신이다. 정신문화란 생활문화라는 말로 확대된 ‘문화’의 기본,
그 본질에 대한 이름인데, 그것은 곧 정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인간 존재는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지는 바, 물질인 육체는 끊임없는
물질적 요구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의 다른 존재와
달리, 물질적 요구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형이하·형이상의 복합적 존재이다.
그리하여 물질이 아무리 풍족하더라도 인간은, 삶은 무엇인가. 참다운
삶은 무엇인가와 같은 형이상의 질문 앞에 도망갈 수 없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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