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Review - 연 극 |
아를르의 풍경과 대학로의 풍경 안치운 연극평론가 고흐가 있는 아를르 풍경 모든 것이 어지럽다. 서울을 떠나 프랑스 아를르로 갔다. 파리에 도착해서 커피 한 잔 마시지 않고 곧바로 아를르 Arles로 가는 기차를 탔다. 1888년 반 고흐가 나간 정신을 겨우 이어가며 이곳까지 석탄 때는 느린 기차를 타고 온 것처럼. 더 이상 갈 곳이 없던 그가 도착했을 때, 달빛 아래로 강은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가다가 멈춘 그가 하늘을 바라본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무심한 강바람이 그 몸을 스치고 나서 멀리 지나갔다.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이란 제목이 붙은 그림을 본다. 그의 고향은 밤이 아니었을까? 어둔 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길을 잃고 헤매이고 있다.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간 정신처럼, 소용돌이처럼 휘어감는 별빛이 그를 감싸고 있다.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그는 삶의 모든 것을 소모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정열은 이성보다 훨씬 더 고흐 자신을 지배했을 것이다. 페드르는 정열이 이성을 지배한다고 했다. 세상에는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이들이 많다. 문제는 그들의 꿈이다. 그들은 꿈으로 세상을 엿보고 싶어 한다. 아를르에 와서 반 고흐를 만난다. 불모의 삶을 살았던 그의 행적은 도시의 곳곳을 채우고 있다. 아를르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아주 오래된 작은 도시이다. 아를르에서 기차를 타고 약 20분 북쪽으로 올라가면 아비뇽에 이른다. 파리에서 오자면 아비뇽을 거쳐 아를르에 이르게 된다. 아를르는 많이 알려진 도시이지만 아비뇽과 달리 아늑하고 조용하다. 아를르에 사는 사람들은 이 도시를 '만남의 터' 선전하고 있다. 무엇과의 만남인가? 내가 만약 반 고흐와 만난다면 나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이렇게 늙어간다는 사실? 사라지는 것은 흘러가는 세월만은 아니다. 아를르에 도착하자마자 고흐의 열정에 빨려드는 느낌이다. 그는 내 나이가 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경험하고 삶을 죽음에 편입시켰다. 고통과 비애 속에도 어느 정도 쾌락은 있었던 것일까? 그의 삶도, 죽음도 모두 이른 것. 나는 그보다 더 살아서 마르는 경험을 한다. 이성의 기초는 경험이라고 했다. 아직 살아있으므로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하지 못할 뿐 말라가는 것, 살갗이 말라 한 겹씩 벗겨지는 비극적 뺄셈의 경험을 나는 할 줄 안다. 더 벗겨질 살갗이 없기 전에 뭔가를 더해야 할 터인데. 내가 아직 무식한 탓인가? 덧셈을 생각하고 살고 있다니. 다 빼주고 나면, 욕망마저 말라 비틀어 죽어버리면, 그것을 안타까워 한다면 글로 남기면 될 터인데, 그래 이것이 그와 나의 차이이구나. 아를르에 머물면서 하릴없이 반 고흐가 그린 '밤카페' 나가 앉는다. 나무로 만든 견고한 의자와 햇빛을 가리는 차양, 포름 광장 place du forum을 향하는 벽이 모두 노란 색이다. 광장 주변을 일본 관광객들이 깃발을 따라 몰려 다닌다. 100년 전 고흐가 그린 그림을 보고, 일본 여행객들이 고흐가 캔버스를 놓았던 그 자리에서 이쪽을 향하여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는 시간을 건너 뛰는 경험을 시각적으로 하게 된다. 100년이란 시간은 정말 짧구나. 고흐가 불행 속에서 더 험한 길을 택했다고 한다면 관광객들은 불행을 가지고 노는 것 같다. 아를르는 과거를 담고 있는 고대 도시이다. 고대 로마 제국주의가 세운 원형경기장과 교회, 광장, 론강 위를 지나는 다리가 원래 모습 그대로 있다. 이 곳, 한적하고 작은 기차역에 내려 발을 내딛는 순간 과거는 바람처럼 친근하게 몸에 와닿았다. 발 아래 역사가 누워있다. 발바닥 아래에서 과거와 현재가 포개진다. 몸이 뜨거워 진다. 한 발은 죽음 위를, 다른 한 발은 욕망 위를 거니는 것 같다. 조그만 도시, 마을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산책길에 오래된 극장, 도서관, 식당, 헌 책방을 다녔다. 책을 손에 들고 다니다 멈추는 곳에서 읽었다.
병들어 가는 대학로 거리 '한국연극'(99년
9월호)의 특집제목은 ‘대학로 극장환경문제’였다. 실린 글들은 한결같이
대학로의 더러움을 말하고 있다. 연극의 거리, 문화의 거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학로가 병들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대학로를 고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대학로를 떠나자고 제안한 글도 실렸다. 대학로가
천박한 장소로 된 것은 누구 탓인가? 서울의 다른 곳에 비하면 대학로는
역사적으로나 지금의 환경으로 보나 명당임에 틀림없다. 이곳에는 공원이
있고, 언제나 연극과 춤을 볼 수 있고, 다양한 전시회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곳은 서울의 다른 유흥지역처럼 시끄럽고, 추잡하고,
더럽다. 늦은 저녁, 무분별한 광란의 쇼가 펼쳐진다. 벌지 않고 쓰기만
하는 청년들의 소비가 극치를 이룬다. 공원에는 앉을 곳조차 거의 없다.
긴의자는 오물로 뒤덮혀 있기가 일쑤이고, 술을 마시고 토한 분비물의
악취가 진동한다. 공원 관리 사무소가 있지만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인다.
불법으로 길 위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지만 경찰조차 단속을
하지 못하는 곳이 대학로가 아닌가! 대학로는 그야말로 무법지대이다.
우리들 모두가 어떤 정신적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공원이 아니다. 책을 읽고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옆 사람과 조용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곳도 되지 못한다. 서울,
그 어느 곳에 산책하며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대학로 연극은 술집이나
찻집 지하에서 겨우 연명할 뿐이다. 비유를 하자면 술집과 같은 유흥업소들의
병풍노릇을 할 뿐이다. 그들은 연극을 빌어 장사속을 차리지만, 연극은
대가를 얻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 모습을 잃고 있다. 연극은
술처럼, 커피처럼 가볍게 소비될 뿐이다. 우리가 되물어야 할 것은 이런
장소에서 연극문화가 제대로 꽃필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몇 년동안
이런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다. 연극인들은 언제까지 이런 곳에서 연극을
해야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