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리뷰 - 문화읽기 |
공간인식 되찾는 것이 우리 문화의 정신 되살려 내는 것
강영희(문화평론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한 여행길에 대전에 들른 적이 있다. 역앞 광장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곳의 강렬한 인상이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설렁탕에 딸려 나온, 고춧가루를 잔뜩 뿌린 굵다란 깍두기와 어딘가 비슷한, 엄청나게 큰 빨간 글씨의 초(超)대형 간판들이었다. 그렇게 커다랗고 빨간 글씨로 쓰인 간판은 그때껏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낯설고 불편한 느낌으로 남은 빨간 초대형 간판의 기억은, 팔십년대 초반 새로 개발되어 북적이는 강남의 먹자골목을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이번에는 낯익은 불쾌함으로 되살아났다. 돌아보니 ‘군화발 장단과 새마을 노래의 곡조에 맞춰’ 조국 근대화에 몰두하던 칠십년대의 내면풍경이, ‘칼라티비의 영상과 디스코 장단에 맞춰’ 선진조국을 구가하던 팔십년대의 내면풍경과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얼마전 휑하니 넓혀진 동네 길가에 새로 들어선 가게들에 내걸린 예의 빨간 대형간판과 맞닥뜨린 나는, 이번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불쾌감 대신 수치심 비슷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역전의 뜨내기 음식점이나 흥청거리는 신흥 번화가의 먹자골목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의 전통적인 주택가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제 그것은 다른 누구의 탓으로도 돌릴 수 없는, 우리들 마음 속의 굳은살로 자리잡은 것일런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문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여유로운 자기중심 되찾기 위한 열쇠 누군가 반문할런지 모른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뭘 그러느냐고. 그렇다면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바로 그 먹고 살아야겠다는 말이 ‘타인에 대한 배려’ 따위는 안중에 없어도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뒤집으면 결국 ‘자신에 대한 반성’이 되기도 할텐데 말이다. 인간의 삶은 시간이라는 길다란 좌표와 공간이라는 넓다란 좌표가 4차원적으로 겹쳐지면서 굴러간다. 시간의 화살 위에 올라탄 인간이 잡담 제하고 일직선적 목표의식에 몰두한 채 앞만 보고 나간다면, 공간의 치마폭에 싸인 인간은 반성적 성찰의 시선으로 이모저모 주변을 둘러본다. 앞의 것이 개체적인 경쟁을 지향한다면, 뒤의 것은 공동체적인 상생(相生)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회의 생명 에너지란 것을 가정한다면 그것은 언제부턴가 시간 좌표쪽에 지나치게 강박된 반면 공간 좌표쪽에는 반대로 그만큼 무감각해졌다. 앞서 말한 바, 자신에 대한 반성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가 놀랄 만큼 결여되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빨간 초대형 간판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것이야말로 이같은 사실을 입증한다. 하지만 인간의 행복한 삶에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상 시간에 대한 인식보다는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따지고보면 시간이란 추상적인 것이며 설사 시간의 흐름을 순간적으로 거머쥔다 해도 그것은 연속해서 변태(變態)를 거듭하는 거푸집의 자취로만 남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넘쳐나는 생생한 실체로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가능성은 바로 공간이라는 언덕에 기대서 전개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공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얼핏 평범해 뵈는 말이, 어쩌면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 자신의 문화(文化), 즉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여유로운 자기중심을 되찾기 위한 열쇠가 되리라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 여기 있다.
자연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는 전통적인 공간인식 서구열강의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시작된 19세기 이래, 서양의 근대(近代)를 따라잡기 위한 안간힘으로 시작된 시간 편향은 갖가지 조급증과 강박관념을 낳으며 우리를 불행한 자기부정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하면 된다’, ‘속전속결’, ‘남부럽지 않게’ ‘새벽종이 울렸네’와 같은 말들에 등떠밀리면서 저들(서구)의 피안(彼岸)을 넘겨다보는 시간축의 경쟁에 비끌어매인 결과,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에 뿌리내린 풍요로운 공간감각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거세해버리는 비극을 경험해야 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것은 뭘까.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기실은 주변의 집과 거리뿐 아니라 초목이나 산천과 같은 자연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는 전통적인 공간인식이다. 그것은 김정희의 ‘대동여지도’로 대표되는 조선시대의 옛지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데,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산천과 어우러져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자연을 산맥(山脈), 수맥(水脈)처럼 유기체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자연과 그 속에 사는 인간을 동종의 기(氣)를 주고받는 호혜적인 관계로 여기는 생각이다.
진정한 문화의 영혼이 깃드는 곳 필요 개인이 차지한 공간을 주변과 단절된 고립된 영역으로 파악하고 이에 따라 개인을 기계적으로 분리가능한 원자와 같은 무엇으로 파악하는 서구적인 공간인식이란, 본질적으로 사회, 자연과 같은 주변의 공간을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본래적인 공간인식을 서구의 그것으로 바꿔치기 당한 것은 엄밀하게 말해 또다른 무엇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저 기존의 공간인식을 싹둑 잘라내버린 형국이랄 수 있다. 따라서 잃어버린 우리의 공간인식을 되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느새 빈칸이 되어버린 공간인식의 부재 자체를 치유하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공간인식 상실은 언젠가부터 우리로 하여금 오래된 유적이나 오래된 집, 오래된 가구와 가재도구를 거추장스러워 하면서 주변에서 몰아내도록 부추겼다. 이같은 것들이야말로 공간과 시간이 만나서 이룩하는 진정한 문화(文化)의 영혼이 깃드는 곳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공간인식을 되찾는 것은 결국 우리 문화의 정신을 새롭게 되살려내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빨리 이 곳, 문화의 영혼을 박제해버린 문명(文明)의 상징인 건조한 시멘트의 숲을 벗어나야 한다. ‘빨리빨리’라고 쓰인 완장을 찬 시간(時間)이란 독재자에게 볼모로 잡힌 우리의 자화상이 어른거리는 곳, 새빨간 초대형 이정표들이 끔찍한 악몽속의 한 장면처럼 삐죽하게 고개를 내미는 그런 곳에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