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문화예술 20세기 정리와 21세기 전망 ④ 음악

정신문화에 바탕을 둔 새천년 도래를 예견하며…

 

강준일(작곡가, 서울음악학회대표) 

1. 새롭게 많은 것을 얻고 또 잃은 한 세기 

20세기는 한마디로 변화의 역사였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세기를 보내며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며 새롭게 많은 것을 얻었고 또 잃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잃었던가를 정리하기조차 어렵다. 어찌보면 이 많은 일들이 우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진행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문화와 예술’의 분야는 그 특수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제멋대로’ 변화해서 오늘에 이르렀으며 마찬가지로 내일을 기약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지금의 문화현상을 과거와 연관지어서 설명하고 해석하고 또 이를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등의 이른바 보편적 역사철학의 과정으로 접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적 전기를 맞은 것도 아닌데 단지 새로운 천년이 도래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시대의 획을 긋고 이를 거론하거나 정의하는 일이 조금은 섣부르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하간에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고 싶은 심정이 온 인류의 열망이라는 전제하에서 성급하게나마 한 세기의 역사를  서둘러 살펴 정리해 보기로 하자. 

2. 음악계의 어제와 오늘

근대음악사의 시작을 상징하는 찬송가의 도입은 대략 한 세기 반쯤 전의 일이다. 처음에는 악보 없이 가사만으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데, 마치 천자문을 낭송하듯 언문체로 읊조리는 식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1880년대에 선교사들이 번역한 새찬송가가 등장했는데 개화기에 뭇 학교의 음악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직도 이 찬송가들 대부분이 거의 모든 교회에서 불려지고 있으며, 더욱 특기할 일은 아직도 표지에 ‘새찬송가’라고 박혀있는 것을 흔하게 본다는 사실에 있다.

이 찬송가에 남겨진 어색한 번역 가사의 흔적이야말로 20세기 우리음악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끊이지 않는 외래문화의 물결에 시달리며 억지쓰듯이 살아남은 상처투성이의 모습”이야말로 이제부터 우리가 회고해야 할 과거의 기록이다.

1920년대 후반에 ‘창가’운동이 일어났고 새로운 양식의 ‘가곡’이 보급되었다. 이 시기의 주역으로 작곡가 홍난파가 등장한다. 그의 역할은 지금까지도 그의 명성이 남겨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들의 ‘새노래’발표회에 관심을 가졌고 또 참여했으며 노래를 함께 부르고 즐겼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노래방’에는 가도 창작곡 발표에는 관심이 없다. 뿐만 아니라 홍난파 이후에 그 어떤 작곡가들에 관해서도 거의 아는 바 없다.

1920년대에 젊은 음악학도들은 서양음악을 배우기 위해서 현해탄을 건너 동경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그들의 행적은 모든 국민들의 관심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전설적 가수 윤심덕도 있었다. 그는 돌아와 화려한 스타로 출발했지만 자살로 슬프게 막을 내렸는데, 이는 1926년의 일이다. 이를 전후해서 그의 유명한 「사의 찬미」 레코드가 10만장이나 팔렸다 한다. 라디오도 텔레비젼도 없던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1930년대에는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서 아니 한편으로 윤심덕 같은 스타를 꿈꾸며 현해탄을 건너갔다. 이들은 후에 이나라 근대음악사의 주역이 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신여성의 모델이 되었다. 그런 결과로 보수적 가정에서는 음악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심어주게 된 것도 사실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유학의 열기는 미국으로 대체되었다. 피아니스트 김원복, 지휘자 임원식처럼 유학으로부터 귀국을 신문사회면에서 요란스럽게 다루었던 시절도 있었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전쟁고아의 상징처럼 천재소년 피아니스트 한동일이 미국음악계에 별처럼 떠올랐는데 이런 열풍은 피난살이에 시달리던 우리 국민들에게 신데렐라의 신화 같은 새탈출구로 떠올랐다. 그래서 전쟁의 폐허를 뚫고 서방세계를 향해 뛰쳐나간 젊은이들 중에는 천신만고 끝에 유학에 성공하고 콩쿨에 입상하는 등의 쾌거를 올렸는데(이는 요즈음 ‘박세리 열풍’에 비길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뉴욕필의 지휘자 번스틴과 함께 무대에 서 있는 김영욱, 혹은 정경화의 사진들이 뉴스위크지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런 사건은 반세기가 지나 천재소녀 장영주의 등장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이런 열풍 아닌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한 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는 데도 과연 이를 단순한 ‘사건’으로 가볍게 넘기고 말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음악 역사는 광적인 유학열풍이 불러온 시행착오의 부산물로 해석해도 좋다는 말인가?

물론 누구나 이런 결론을 졸속한 속단이라고 비난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유학열풍이 단순히 교육의 후진성 내지는 학교제도의 미비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문제들이 적지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음악교육의 제도화를 주도해 온 음악대학의 설립는 1953년 서울대학교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오늘날까지 꾸준하게 늘어가고 있다. 현재 30여의 대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으며 매년 5천명이 넘는 음악학사를 배출하고 있다. 좀더 실감나는 숫자로 표현하면, 서울시내의 대학만으로도 최소 40개의 오케스트라를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또 이들 졸업생들이 매년 치뤄야 하는 졸업연주만도 거의 천 회에 육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양적인 팽대(?)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어서 대학입시를 둘러싼 과외비의 과다지출을 비롯해서 입시부정, 교수비리 등의 문제들이 지난 반 세기 동안 그칠 날이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반 세기 동안에 음악교육의 기회가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학 열풍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세계 명문대학의 경우 한국유학생이 없는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한국학생을 제외하고 학교운영이 어려울 정도의 학교들이 속출하는 실정이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여전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있지만 이들이 귀국해서 얻는 영광은 과거에 비하면 매우 약소하다. 물론 아주 뛰어난 인재들은 대부분 귀국하지 않고 해외활동을 계속하기 마련이다. 때로 이들은 잠시 귀국해서 유명세로 많은 수입을 얻어가기도 하는데, 어이없게도 이들 대부분이 한결같이 달러로 개런티를 요구하며 또 이를 받아 몽땅 해외로 갖고 나가는 일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이런 정경은 유학 반 세기가 남긴 못마땅한 작태(?)로 응당 지탄받아야 할 일이다.

유학의 열풍이 계속되다보니 매해 귀국하는 인재들의 숫자 역시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설 무대, 대학강단 등은 점차 협소해져서 이제는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덕분에 연주회장 대관이 힘들어져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중견무대의 대관은 거의 10대1의 경쟁에 이르고 있다. 연주력의 진보는 물론 활동의 빈도도 나날이 눈에 띄게 상승하고 있다. 특히 오케스트라의 활동력이 증가되었고 오페라 공연 역시 활기를 띠고 있다.

1948년 국내에 최초로 고려교향악단이 창설되었고 이후 1970년대 말까지 약30년 동안 오직 두 개의 교향악단이 활동했다. 그러나 이제는 30개가 넘는 교향악단이 정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특히 지자제 활성화의 공헌이 컸다. 이제 대부분의 대도시에는 교향악단이 상주하며 오페라단, 합창단의 결성 역시 급속히 늘고 있다. 뿐 아니라 대형무대를 갖춘 현대식 상설공연장이 속속 건설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껏 서울에 편중되어 있던 공연활동들이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어가고 있으며 지방주민들도 서울에서나 가능했던 수준 높은 연주를 감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 현실은 금세기 우리의 음악문화를 매우 고무적으로 평가해 주는 듯 하다. 실제로 반세기 전 어두컴컴한 교회의 가스등 아래서 풍금반주에 맞춰서 「봉선화」를 부르고 감격하던 시대에 비하면 이 얼마나 눈부신 발전이란 말인가? 반 세기 동안 피땀을 흘려 자식들을 유학보내 서양음악을 가르친 보람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아닌가? 그들이 돌아와 자랑스런 경제발전 위에 이룩한 조국의 멋진 현대식 무대에서 연주회를 갖게 되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그 많은 연주회장을 둘러보아도 진정한 관객은 별로 많지 않다. 우리의 연주회장은 대부분 음악과 관계되거나 아니면 연주자들의 친지들로 채워질 뿐이다. 더구나 유료관객을 기대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다시말해서 자신의 연주 수입으로 생활이 가능한 연주자는 국내에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공연사업’이 갖춰야 할 ‘작품/연주자/연주회장/관객’의 등식이 성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제 우리의 경제력은 훌륭한 연주회를 즐길 만큼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며, 우리의 연주자들 역시 훌륭한 연주회를 제공할 만큼의 능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결국 수준높은 서양음악 연주를 이해 할 수 있는 관객이 없거나, 아니면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좀더 나아가 보면, 서양음악은 우리와 너무 동떨어져 있고 그렇다고 우리 문화를 음악으로 표현해서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작곡가를 확보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이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해서 우리의 의문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제 이 문제들을 좀더 근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첫째로 현재 당면한 교육현실에 관해서, 둘째로는 전통음악과 창작에 관해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3. 음악교육 현실이 의미하는 것 

교육을 둘러싼 문제는 금세기 인류를 절망에 빠트리게 한 최악의 사태들 중 으뜸으로 꼽혀야 할 것이다. 그 중 우리나라는 가장 심각한 상황에 봉착해 있다. 음악교육 문제의 경우, 천재교육은 그렇다치고라도 일반 학교교육은 어떠한가? 그 답은 들으나 마나, 우리의 모든 교육이 실패했는데 음악이 예외일 리 없다. 차라리 창가를 가르치던 금세기 초가 좋았으며, 풍금소리에 손벽치던 낙도시절이 그보다 조금 나빠졌고, 대학입시에 시달려 아예 음악시간을 없애버린 요즈음의 중고등학교보다 더 못한 사태를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지금의 젊은이들은 학예활동, 예술제 등을 경험하지 못한 채 사춘기를 보내고 청년기에 이르고 있다. 이들의 상상력은 항상 억제되어 왔고 정신의 자유로움은 무시되어 왔다. 선택의 여지 없이 대학으로 그리고 다시 직장으로 쫓겨가다가 무미건조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들에게서 텔레비젼만이 유일한 문화의 대상이며, 따라서 “열린음악회” “노래방”이상의 문화를 기대하기란 어렵기 마련이다.

반면, 불행하게도 우리의 자랑스런 음악예술의 공급자들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고 계층을 가로질러 18세기 서구귀족들이 즐기던 고급예술의 에센스를 연마하고 이를 완벽히(원조의 맛 그대로) 조국에서 재현하는 기적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의 백성들은, 오로지 돈벌이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이들은 과외공부에 여념이 없어 이같이 고아한 예술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이 되었음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고 보니, 과연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음악에 뜻을 둔 음악가들 대다수는 서구 문화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무한히 노력했다는 것이며, 그동안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오로지 경제력의 상승을 위해서 이른바 ‘개처럼’ 일만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반세기를 보내고 한자리에 모였을 때 이 두 부류는 서로 이룰 수 없는 짝사랑으로 끝내야 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멋진 연주회장을 짓고 고아한 레퍼토리로 연주를 훌륭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들 우리 모두 함께 즐기고 감동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의 교육문제가 해결된다면 바람직한 답을 얻게 될까? 물론 교육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수긍하는 일이다. 그러나 설사 이를 당장에 시정한다고 해도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육이 예술의 수용력을 길러줄 수는 있어도 창조와 생산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앞으로 한동안 우리의 음악문화는 미망의 늪에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남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미미하게나마 기대할 수도 있다. 이는 바로 「창조」라는 신비한 요술에 거는 희망이다. 새로운 창조만이 벌어진 두 계층 사이에 벽을 허물어내리는 신화를 단번에 이룰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천재 작곡가의 등장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천재라면 지금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기적을 이룰 것이고 그 결과 우리 모두 함께 감동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때에는 우리의 자랑스런 연주가들의 역량도 한껏 빛나게 될 것은 물론, 세계에 우리의 자랑스런 음악문화를 전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가능성은 너무나 약소하다. 왜냐하면 지난 한 세기 동안 그 누구 하나 우리의 창작계를 위해 어떤 조그마한 배려라도 했던가? 홍난파와 안익태는 친일파로, 김순남은 사회주의자로, 윤이상은 용공분자로 온갖 푸대접을 불사했던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고 보면 진정한 창작을 위해 후원은 고사하고 그들의 자유로운 정신마저 속박하려 했던 우리 정치사의 빗나간 폭정은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연주가 음악문화를 주도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상대적으로 창작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아니 그 보다도 이런 오류의 주역이 바로 작곡가들 자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껏 창작을 전공하는 대부분의 작고가들 역시 유학병에 걸려 해외에서 전전긍긍하다가 귀국하는 과정을 당연스럽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영어로, 혹은 독일어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게 된 것을 당연스럽게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관행처럼 여기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애당초 우리나라 관객과 무관하게 존재해 왔던 것이다. 실제로 지난 30년간 우리 작곡계의 창작물들은 지나치게 유럽의 입맛을 의식해왔고 상대적으로 우리 관객들을 도외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창작계가 이 땅에 존립하기에 필요한 최소의 사회적 기반조차 잃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음악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해결의 마지막 열쇠를 쥐고 있는 창작계에 대한 작은 기대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누구도 우리음악의 문제를 해결 해 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그러기에 앞서 아쉬우나마 우리의 전통음악 분야에 남은 어떤 기대의 가능성을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4. 전통음악의 현황 

1930년대의 연주회는 양악과 국악의 구별 없이 함께 공연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의 영향으로 우리 전통음악의 활동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전통음악을 마치 천박한 것인 양 얕보게 만든 것에는 식민정부와 함께 선교사들의 음모와도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통음악은 아주 서서히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갔고 그 자리를 서양음악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전통음악은 잠깐 빛을 보는 듯 하더니 유신정권과 새마을운동 등의 횡포에 눌려 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모를 다 겪었다. 80년대에 들어서 5공화국은 전통음악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지만 한동안 반체제적 경향에 속한다고 해서 억압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 한많은 반 세기 수모의 역사는 88올림픽을 치루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에는 「사물놀이」의 등장과 영화 「서편제」의 공헌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또 한편 올림픽을 치뤄낸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 이룩한 업적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전통음악인들의 활동무대는 지난 10년 사이에 현저하게 확대되었다. 대학 문도 넓어졌고 특히 전통음악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대학의 동아리 뿐 아니라 초중고교의 실기시간, 각종기관의 교양강좌 등에서 전통음악에 관한 관심과 호응이 더욱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통음악의 미래는 아직 낙관하기에 이르다. 오늘날 전통음악이 당면한 문제의 한 끝에는 우리 음악유산 ‘보존’의 임무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우리 음악정신의 ‘계승’이라는 과제가 놓여져 있다. 이는 곧 전(傳)하고 통(統)하는 음악문화의 속성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는 긴밀이 연관되어 있어 그 중 어느 한 기능만으로 존립을 꾀하기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작금에 이르러서 전통음악 보전에 속하는 ‘전’의 문제는 비교적 양호한데 비해서 ‘통’의 문제는 아직도 요원하게 보인다.

즉, 우리가 지난 시대의 음악을 즐기는 경향은 점차 높아지고 있어서 ‘전’은 성공적인데 비하면 우리음악의 정신을 계승한 음악의 창조에는 실패하고 있어 ‘통’은 저조하다고 보아야 한다. 진정한 ‘통’의 개념은 단순히 전통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을 넘어서 거의 모든 음악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구태여 ‘양악’, ‘국악’의 구별이 필요치 않게 된다. 그보다는 이 모두가 ‘우리음악’이 되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흔히 양악이이라고 부르는 분야의 창작물이든, 대중음악, 종교음악, 제식음악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우리 전통의 정신을 계승할 때에 비로서 ‘통’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양악’이니 ‘국악’이니 하는 분야의 구별이 당연시되고 있으며 서로 무관한 듯 취급되고 있다. 무모한 장벽을 허물기 전에는 우리의 전통음악이든 창작음악이든 그 어떤 것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새시대를 맞이해서 우리음악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 중에 이 동서양 음악의 벽을 허무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아직도 전통음악으로부터 어떤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 가에 관한 연구는 매우 저조하다. 이런 결과는 앞서 거론한 창작부재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음악 창작의 실패는 바로 전통음악 정신계승의 실패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좀더 중요한 사실은 이처럼 정신계승에 실패함으로 인해서 결국은 전통음악 존립에도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점에 모두 유의해야 할 것이다.

 

5. 정신문화 되찾고 우리얼 담긴 예술 창조해야 

금세기 마지막 해에 이르러서 보는 우리의 음악문화는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금세기에 우리는 분명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훌륭한 연주회장과 우수한 오케스트라 연주단체가 만들어졌으며, 자랑스러운 연주가들이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고, 또 좋은 시설을 갖춘 대학과 학벌을 자랑하는 교수진과 넘쳐나는 학도들이 있다. 길가 어디서나 음악이 흘러나오고 각종 음향매체의 판매는 호황을 누린다.

하룻저녁 수많은 연주회장에서 화려한 연주회가 넘쳐나고 전파매체에서는 전세계의 연주를 속속 방영해주고 있다. 그야말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경제력 향상과 함께 세계화의 물결 속에 발전하는 조국 근대화가 가져다 준 성취라고 자랑할 만도 하다.

과연 우리는 얻기만 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바로 우리 자신을 잃었던 것이다! 컴 케골의 말을 인용하면 寧泳汰Ì 모든 것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Ó 바로 우리를 두고 남긴 말처럼 들린다. 즉, 자신을 잃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과 같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이 시대 바로 ‘우리들의 음악’은 없다. 모두 외래의 것 아니면 선조들이 남긴 유산일 뿐이다. 우리가 발전하고 성취했다는 착각은 바로 이같은 외래 문화권의 예술을 향유하고 있다는 망상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의 것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모두 크나큰 우려와 슬픔을 느껴야 할 때이다.

이런 비극은 한 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빗나간 유학의 열풍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다른 일면에는 무모한 경제 발전의 추구와 교육의 실패에 그 원인 있다. 뿐 아니라 정신문화 계승을 소홀히 하고 창작의 중요성을 간과한 결과로부터 사태를 거의 절망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 책임의 일면은 일본의 식민정책이나 미국의 제국주의적 문화전략에 있으며 또 다른 일면 오랜 군사독재에 따른 자유로운 정신의 억압에서 비롯된 창조성의 결여에 있다. 그러나 이제와서 그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지금이라도 빨리 우리의 정신문화를 되찾고 우리 얼이 담긴 예술을 창조해서 우리의 문화를 재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정신을 상실한 문명이 어떻게 사멸했던가에 대한 기록은 지난 역사에서 무수하게 발견된다. 그런 만큼 새천년이 절반도 가기 전에 우리민족이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기 전에 우리 모두 정신문화의식의 재건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시기는 바로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같은 각성이야말로 정신정신문화에 바탕을 둔 새천년 도래를 예견하며 우리 모두 함께 지난 시대의 반성과 회고를 통해 얻어진 소중한 결론임을 재차 다짐해 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