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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사이에서 …고독한 작가의 초상

 

김 명 신 (문학평론가)

박상륭의 ‘글쓰기’ 작업과 그 방식을 볼 때 그는 철저히 수공업적이며, 시장경제의 메카니즘을 넘어서서 존재하고 있는 작가이다. ‘주문생산자’가 아닌 ‘창조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는, 이 시대 진지한 작가적 정신의 표상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주저치 않는다. 그의 문학은 상업성에 휘둘리지 않는 문학적 자존과, 문학이 갖는 예술적 품격의 한 절정을 통해 이 시대에 진정한 작가의 존재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글자 하나하나를 마치 수틀에 수를 놓듯이 한땀한땀 글자들을 수놓아가며, ‘말’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수도 없는 문장과의 싸움을 통해, 우리 시대 산문문학 품격의 한 절정, 우리말이 갖는 아름다움과 그 섬세한 결의 극치를 보여주는 『죽음의 한 연구』를 산출해 낼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은 시적 힘과 철학적 사유의 힘들이 ‘전율’에 가까운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놀라운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밑바탕에는 사유의 힘이 자리잡고 있고 그 사유들은 우리 모국어의 섬세한 가닥과 그 리듬을 타고 비로소 ‘몸’을 입고 ‘화육’을 단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칠조어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작가의 내면을 짐작 할 수 있게 한 「두 집 사이」

그래서, 1975년 출간된 이래, 문학을 지망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문학적 전범이 되어온 그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우리가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리고 다시 1990년대에 장장 네권에 이르는 『칠조어론』을 통해 그의 작가적 자존과 위엄의 한 세계를 또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그의 소설은, 거대한 ‘말들의 난장(亂場)’과 형이상학적 사변의 그 아찔한 소용돌이 속으로 그 얼마나 자주 우리를 휘말려 버리게 했던가! 그의 작품이 주었던 경악과 기쁨과 새로움을 잊을 수 없다.

그가 이국 땅 캐나다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30여년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온지도 일년이 넘었다. 나는 그가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는 광화문의 한 아파트를 방문하여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었다.

그의 독서 경험이나 작품 외적인 이야기들, 유년기 혹은 그의 젊은 시절의 삶의 이력에 대해 듣고 싶기도 했지만 이 시대의 뛰어난 작가의 생활을 한 편린이라도 엿볼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그의 아파트는 멀리 떠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 외에는 찾아오는 이들과 더불어 소주를 마시며 문학과 문단의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반쯤 주선(酒仙)의 경지에 이르곤 하던 그가 부인과 함께 잠시 캐나다에 갔기 때문이다.

서울 중심가 콘크리트 빌딩 숲에서 무척 적적해하던, 부인과 더불어 오후 두시쯤이면 교보문고까지 산책을 하며 책을 보거나 명동쪽으로 가서 장을 보거나 하는 것이 일과였던, 캐나다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척 쓸쓸해하던 그가 잠시 자신의 아파트를 떠났다. 그의 일상적 삶의 모습은 작품 안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문학적 원체험이라할 수 있는 자전적 요소가 거의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대목은 『칠조어론』집필을 완료한 이후, 고국에 돌아와서의 작가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실 말이지, 늙은네 자신은, 무신론자도 아니었으려니와, 무종교주의자도 못되었음에도, 그렇다고 무슨 도(道) 한 가지도 닦아본 것이 없어, 죽어도 머리 둘 곳이 없는 듯해, 그저 막막해하고만 있는데, 그러다 보니 늙은네는, 신이 있다거나, 내세가 있다는 어떤 교의도 부정해본 적도 없이, 허무주의자, 삶은 별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허무주의자가 되어버린 듯도 싶으다구.(두 집 사이 「평심」 127-128쪽)

 

돌( ). 늙은 삶과 시간은 모순이러함. 반어법이구나. 역설이러람. 뒈져 눕기도 한사코 싫으며, 살아 시간을 견뎌내기란, 권태의 연속이며, 실의, 무의미, 그리고 무덤까지나 이어지는, 위로받을 수 없는 외로움뿐이라고 알아, 살아 있음을 투덜댄다. 중수업이나 했었다면, 지금쯤은 학(鶴)이었을라는가? 늙다리 중들마다 학일라는가? 이만큼이나 살아 늙었으면, 속인이라도 학쯤 되었을 법한데도, 아직도 두 경계 사이에서, 깃털 성글어진 늙은 갈매기 꼴로, 힘겹고도 외롭게 배회만 하고 있구나.(두 집 사이 「평심」 128쪽)

 

자신의 운명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외로움

이 부분에는 그의 고민과 쓸쓸함의 요체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문학하기’보다, ‘구도(求道)행’이자 ‘해탈’을 위한 방편이며, 우주를 경전(經典)으로 한 ‘경전’의 해독서와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고 언론과의 인터뷰나 작품 안에서 누누이 밝혀 왔었다. 『칠조어론』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의 작품을 ‘경전’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죽음의 한 연구』에서는 6조라는 인물을 통해, 『칠조어론』에서는 촛불중인 7조를 통해 각기 구원과 득도, 대자유를 향한 열망과 믿음을 구조화시키고 있다. 6조나 7조는 작가를 대신한 작가의 분신과 다름없는 인물들이다. 그 인물들은 구도를 향한 처절하리만치 치열한 자아탐색과 내적 싸움의 과정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의 작품쓰기의 내적 기원, 정신적 기원을 보건데 사실 그는 거의 출가한 중(僧)과 다름없다. 이것은 보통 작가들이 흔하게 표현하듯 ‘문학이 곧 구원의 길’이라고 말할 때의 그 구원과는 질을 달리한다.

문학과 경전, 예술과 종교의 사이에서 그의 사유의 책자들은 발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문학의 진정성과 삶의 진실성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고독과 고뇌의 요체는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민을 떠났던 캐나다의 땅에서 원고 보따리를 들고 오던 그가 이제는 고국의 땅에서 작품쓰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외롭다. 문단권력화한 우리의 문학적 현실 안에서 외롭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문학의 근원, 이른바 ‘속인(俗人)’의 삶인가 출가한 ‘중’으로서의 삶인가라는, ‘두 집 사이’를 오가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들 안에서 또다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래 그는 여전히 ‘외로운’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기의 화현에의 의지 속에 감금된, 걷잡을 수 없는 춤, 춤 속에 감금된 화현에의 의지. 춤은, 정지 또는 무동(無動) 속에 들 때, 그 춤으로부터 해방될 것이지만, 소멸에의 공포 탓에 추지 않으면 안되는 그 춤은, 분명히 형벌이다. 스스로가 부과한 형벌이다. 유정(有情)은 그리고, 그 형벌에서 태어난 형벌의 자식들. 유정은 유정들대로. 바로 저 꼭 같은 소멸에의 두려움 탓에, 형벌의 윤회쪽에서 위안을 찾는다. 석가모니가 일러 그것은 고해라고, 그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려야 한다고, 목메어 부르짖는다. 피안에서 그는 우닐고 있구나, 고고(苦苦), 우닐고 있어. 이런데도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 무슨 목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못케라, 아지 못케라. 하긴 또 모르긴 모르지. 의미는 있는지 어쩌는지 그건 채워져야할 괄호(括弧)로 남겨둔다 해도 석가모니의 오열에 찬 부르짖음에 귀기울이기로 한다면, 이런 형벌을 형벌이라고 알아, 표표히 벗어붙인 뒤, 고해를 건너가 버리는 일, 그런 목적같은 것이 없어 보이지만은 않는다. (두 집 사이 「평심」 154-155쪽)

  

 

삶의 두 존재 방식-진정한 의미는…

‘늙은 아해(兒孩) 얘기’라는 부제가 붙은 「두 집 사이」라는 연작 소설의 첫편에는 이처럼 작가의 내면이 짙게 배어있다. 사실 그와 만나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의 형형한 눈빛과 약간은 어눌한듯한 천천히 내뱉는듯한 그의 어투, 그와의 대화는 마치 선문답 같다. 나는 그저 작가의 향기를 느껴볼 뿐이다.

첫편 이외의 다른 「두 집 사이」 연작은 첫편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그것들은 산문집인 「산해기」를 연상케하는 소설들이다. 그가 ‘제일의 늙은 아해 얘기’를 쓸 때의 심경이 어떠했을까를 나는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그의 귀국은 조용했고, 그의 생활은 거의 은둔자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결코 조용하지도 않으며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우리를 물고 늘어지며 우리를 향해 도전해 오고 있다. 박상륭 소설의 독서 행위는 그 자체가 명상이게 하며 수행이게 한다. 그의 소설은 우리의 독서 행위 안에서 숱한 ‘불화’와 ‘혼란’을 일으키며 우리를 폭풍우 같은 어떤 전의(戰意)로 소용돌이치게 한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 위에서, 삶의 두 존재 방식 위, 그 아슬아슬한 긴장 위에서 그는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물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