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지킴이 - 서도소리 60년 지켜온 명창 이은관 |
고난속에 승화된 빛나는 소리혼 서도소리 60년 지켜온 명창 이은관
서연호 (본지 편집자문위원, 고려대교수) 어려서부터 소리 잘하는 소년으로 알려져...
선생은 강원도 이천에서 나서 보통학교를 다니고 가업인 농사일을 했다. 어려서부터 마을에서는 소리 잘하는 소년으로 알려졌다. 19세 나던 봄에 인근의 철원극장에서 콩쿨대회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지원했다. 3백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예선을 거쳐 30여명 뽑아서 본선을 치루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요를 불렀는데, 선생은 민요인 양산도를 불러서 일등을 차지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음악자질이 확인되었고, 음악인생의 길이 놓이게 되었다. 심사위원이었던 고마부(풀루트주자)의 소개로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초한가를 부르고 고향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농사일보다는 본격적으로 소리공부를 하고 싶었다. 완고한 아버지를 피해 몰래 집을 나와 황주의 이인수선생을 찾았다. 선생은 용강 출신으로 배뱅이굿의 창시자라고 하는 김관준 소리의 계승자였다. 김관준은 벌써 작고한 뒤였다. 고향에는 이미 결혼한 아내가 있었다. 선생댁에서 머슴노릇을 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열심히 소리를 배웠다. 당시 선생 밑에는 쉰 명이나 제자들이 드나들었고 기녀들이 다수였다. 「배뱅이굿」을 비롯해서 「공명가」, 「초한가」, 「배따라기」 등 빠짐없이 다 배웠다.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되었던 소리 경기민요와 시조를 배우기 위해 서울 출신인 최경식선생을 찾았다. 선생은 무료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한 곳에서 3개월 정도 배우고 집에 갔다가 다시 장소를 옮겨서 3개월 정도 공부하고, 이렇게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5년여를 수학했다. 무대생활을 시작한 것은 1942년 조선가무단이었다. 유명한 흥행가 김두칠이 운영을 맡고, 광복 뒤에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현철이 단장이었다. 이창배(총무), 신불출과 김윤심(만담), 젊은 명창으로 박초월, 박천복, 이춘옥, 최경식, 최일송, 정득만, 엄태영 등이 활약했다. 말석단원으로 고작 단가 몇 마디를 부르면서 전국을 순회했다. 일제말기에 가무단은 해체되고, 개인적으로 일을 찾아 다니면서 활동했다. 이 무렵 김두칠과 김주전이 흥행을 위해 민요경진대회를 주최했다. 지금의 서울평화극장, 당시의 제일극장에서였다. 주최측은 관객의 이목을 모으기 위해 여류인 김계춘과 선생으로 하여금 각각 배뱅이굿을 부르게 했다. 일종의 대결이자 특기자랑을 유도하는 기획이었다. 이른바 ‘울리는 배뱅이굿과 웃기는 배뱅이굿’을 나란히 올려놓는 방식이다. 그날 먼저 출연한 김계춘은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들었고, 뒤이어서 선생은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전자의 소리는 본디 높고 간드러진 소리였는데, 선생은 그 높이를 능가하는 소리를 내야했고, 동시에 구성지고 익살스런 가락을 연출했다. 이 무대를 통해서 선생의 배뱅이굿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1950년 4월, 지방공연을 다니다 비를 맞고 목을 버리게 되었다. 소리가 유일한 생계수단인 그에게 목이 가버렸으니 전쟁과 더불어 온 가족에게는 큰 시련이 닥쳤다. 1952년 가을, 어느날 아침에 기적처럼 목이 다시 돌아왔을 때의 기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노래인생이 시작되었다. 이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의 경쾌하고 서민적인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은 삶의 용기와 기쁨을 제공했다. 1957년 배뱅이굿은 영화화 됐고, 조미령이 배뱅이역을, 그는 박수무당역을 맡아 베를린영화제·도쿄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영화와 함께 만들어진 레코드는 6만장이나 팔렸다. 도쿄영화제 참석시에는 히비야공원에서 나애심·황금심·고복수·백설희 등과 같이 교포위문공연을 가져 갈채를 받았다. 그후 해외동포위문공연은 수차례 이어졌다.
면면히 이어져온 소리의 맥 배뱅이굿을 포함해서 서도소리는 1984년 11월 27일 무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고 선생은 보유자가 되었다. 그동안 한국방송공사 국악대상·보관문화훈장·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을 수상했다. 이수자로서 박준용과 김경배가 소리의 맥을 잇고 있으며, 전수생 박정욱은 훌륭한 재질을 보이고 있다. 그 낭랑한 목소리와 경이적인 고음은 여전히 선생의 예능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배뱅이굿놀이의 전승 자료는 창자를 기준으로 하면, 김종조·최순경·김용훈·김성민·김경복·김정연·이은관·양소운·김흥섭·창자미상 등의 소리 혹은 사설이 채록되었다. 전승계보는 창시자인 김관준(평남 용강 출신)으로부터 아들인 김종조가 소리를 계승했다. 그의 소리는 장수길·김용훈·김경복·김성민 등에게 전승되었으며, 5분 정도 분량이 레코드에 남아 있다. 평남 순천 출신인 최순경은 김관준의 제자로서, 김경복과 백신행이 그의 소리를 이었다. 그의 소리 역시 5분 정도 분량이 레코드에 남아 있다. 김관준의 소리는 김종조와 최순경 이외에도 이인수·김칠성·곽풍·김주호 등에게 전승되었다. 평남 용강 출신으로 「변강쇠타령」으로 유명했던 김정보의 아들인 김용훈은 김종조의 제자이다. 그의 소리는 강용권에 의해 채록되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김경복은 김종조와 최순경의 제자로서, 그의 소리는 양종승에 의해 채록되었다. 평남 용강 출신인 김성민은 김종조의 제자로서 그의 소리는 최상수에 의해 채록되었다. 평양 출신인 김정연은 김칠성의 제자로서 1934년 봉산탈춤의 연희자인 민천식과 더불어 배뱅이굿을 창극으로 각색하여 개성극장에서 공연했다. 1970년대 후반 국립극장에서 창극으로 재공연했는데, 이 대본은 그의 ‘서도소리대전집’에 수록되었다. 이은관의 스승인 이인수의 소리는 채록되지 못했다. 이은관의 소리는 창본으로 4개나 채록되었다. 황해도 재령 출신인 양소운은 문창규의 소리를 계승했다. 문창규가 누구로부터 배뱅이굿을 전수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소리는 김상훈에 의해 채록되었다. 김흥섭의 소리는 평안북도 운산에서 김태준에 의해 채록되었다. 그가 누구로부터 소리를 전수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창자미상의 소리는 유인만이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관북사에서 채록한 것이다. 김관준 계통의 소리와 상당한 차이를 보여 주목된다.
이은관의 창본(김동욱, 1961년)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전개된다. ⓐ 서울의 이정승, 김정승, 최정승이 황해도의 명산 대찰을 찾아가 자식 낳기를 기원하고, 그후 부인들이 세월네, 네월네, 배뱅이를 각각 낳는다. 배뱅이는 달비 한 쌍을 받아 배배 틀었다고 해서 작명된 것이다. ⓑ 세월네와 네월네는 시집을 가고, 배뱅이는 약혼한다. ⓒ 배뱅이는 시주를 받으러 나온 금강산 상좌중과 사랑에 빠지고, 두 남녀는 상사병이 든다. ⓓ 주지스님은 상좌중을 싸리나무 채독속에 넣어 배뱅이의 방에 숨겨준다. 두 남녀는 재회하여 즐겁게 지낸다. ⓔ 상좌중은 봉산지방으로 시주를 받으러 나가 돌아오지 않고, 배뱅이는 그를 그리다가 죽는다. ⓕ 배뱅이 부모는 무당들을 불러다 초혼굿을 시작했으나 무당마다 엉터리라고 해서 쫓아낸다. ⓖ 평양에 사는 건달이 기생집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배뱅이네 마을의 주막에 찾아들어 술을 마시며 행패를 부린다. 그는 굿소리를 듣게 되고, 노파로부터 배뱅이의 내력을 소상히 듣게 된다. 노파는 굿을 해서 외상값을 갚으라고 한다. ⓗ 건달은 무당들을 내쫓고 굿을 잘 해서 부모와 이웃사람들을 감동시킨다. ⓘ 건달은 배뱅이집 재산을 받아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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