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리뷰 - 미 술 |
새로운 가능성을 예기하고 준비하려는 단위 - 대안공간/ 대안미술
이영욱(미술평론가, 전주대교수) 대안공간의 출현과 걱정들 최근 미술계에서 생겨난 주목할만한 사건 중 하나를 든다면 대안공간의 출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 홍대 앞의 ‘루프 LOOP’, 인사동의 ‘대안공간 풀’과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부산의 ‘대안공간 섬’이 그 실례들이다. 이들은 모두 올해에 생겨났다. 가장 빠른 ‘루프’가 2월 경이고 가장 늦은 ‘섬’이 9월에 생겨났으니 대체로 7개월 정도의 기간동안에 4개의 대안공간을 표방하는 공간들이 생겨난 것이다. 서구에서 대안공간은 대체로 미술관이나 상업화랑 혹은 미술가협회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실험적 미술들 예를 들면 여성미술이나 유색인들의 미술 그리고 퍼포먼스나 개념미술, 비디오 작업 등을 수용하는 장소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들은 여러 재단이나 지자체 당국 그리고 예술기금들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공간을 유지하고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 나간다. 이렇게 볼 때 최근에 생겨난 우리의 대안공간들은 기본적으로 서구에서의 대안공간과 유사한 취지와 성격을 지니고 생겨났으면서도 문화적 환경의 차이로 인해 그 구조와 특성상 서로 약간은 다른 점들을 보여주는 듯 싶다. 차이점으로는 우선 재정적으로 별다른 지원이 없이 생겨나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앞으로 각각의 공간마다 어떤 식으로든 재정 지원책을 마련해 나가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지원 제도와 개념 모두가 빈약한 상태에서 이들이 어떻게 활동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가 염려스럽다. 때문인지 ‘풀’과 ‘섬’은 공간의 일부 혹은 일정 기간을 대관함으로써 재정을 보충해 나가고 있거나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루프는 카페 운영을 겸함으로써 문제를 타결해 나가려고 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이 점은 대안공간으로서의 위상과 의미를 희석시키는 측면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과 예전의 ‘그림마당 민’이나 현재의 갤러리 보다 그리고 여타 최근에 생겨난 멤버쉽 화랑 혹은 ‘살’바와 같은 인스탄트 갤러리 등과의 차별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미비한 우리의 대안성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이 비-영리 non-profit 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점, 또한 각각 공간마다 나름의 시각을 가진 주체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비교적 뚜렷하게 자신들의 활동의 방향들을 밝히고 그에 따른 다양한 프로그램들(아카데미, 심포지움, 워크샵, 매체발간 등)을 준비, 실행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걱정들은 기우에 그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하긴 이렇듯 열악한 상황에서 어찌보면 그 성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들 공간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이들의 대안성을 확인해 주는 듯하다. 때문에 그 대안성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특징도 서구의 대안공간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실제로 ‘풀’의 경우는 서구식으로 여성이니 인종이니 아니면 특정 양식이나 작업방식을 그 대안성의 요체로 내세우지 않고 있다. 그들은 차라리 특히 90년대를 통해 이루어진 전반적인 미술계의 변화와 그것에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기존 미술계의 무능력 혹은 작가들의 혼란 같은 것들을 주요 문제로 삼고 있으며 그 대안으로 생산적 대화와 담론의 생산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사루비아 다방’의 경우는 공모에 의한 작가 지원이라는 매우 단순한 프로그램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섬’은 아직 구체적인 의도 같은 것들을 명확히 하고 있지는 않으나 ‘젊고 실험적인 작가’와 같은 다소 덜 구체화된 범주를 대안적 기초로 삼고 있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루프’의 경우는 그 지향이 분명한 듯하다. 홍대 앞이라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메카를 배경으로 하여 복합문화적인 소통의 공간 혹은 ‘중심문화와 주변문화의 경계선에 서서 기존 미술 권력의 이분법을 파기하는’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강조한다. 결국 대체적으로 보건데 이들 공간들의 대안은 하나의 공간으로서 수행해낼 수 있는 역할에 상응하는 구체성을 아직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대안성의 현재이기도 하며 그 실제이기도 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실천으로 실현되는 대안 하지만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들 공간들 모두가 올해 초부터 시작하여 거의 7개월 정도의 기간에 갑자기(?) 생겨났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이렇듯 짧은 시간 안에 생겨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아마도 이것들은 어느 한 공간의 출현이 다른 공간의 출현에 직접 영향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각각의 공간을 만들어 낸 주체들이 동시적으로 준비를 하여 공간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대안공간을 표방하는 공간들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의식했건 아니건 이들을 추동했던 어떤 조건 혹은 지형변화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라면 이들의 대안성의 배경이 좀더 뚜렷하게 인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우선 IMF가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IMF는, 그 몇년전부터 외국 미술의 반입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생겨난 컬렉터들(특히 재벌과 기업 투자가들)의 외국미술 선호 현상과 더불어, 국내 작가들의 자기존립의 근거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또한 전지구화, 매체의 다변화 추세들 그리고 90년대를 거쳐 정보 해외여행 개방을 통해 이루어진 서구미술과의 새로운 만남 그리고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소비사회로 진입함으로써 나타난 미술계 내외의 지형변화들이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황이 가한 새로운 미술 혹은 새로운 미술활동과 문화에 대한 요구와 압력을 기존 제도들이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대기업의 미술관도 국립미술관도 아니면 상업적 화랑도 그리고 몇몇 기획 중심의 전시장들도 채워내지 못한 욕구들이 대안공간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대안공간들은 그야말로 영원한 대안에 머무르려는 공간들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예기하고 그것을 준비하려는 단위들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일은 변화를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읽어내는 일 그리고 그러한 읽기에 부응하는 일감들을 발견하고 성취해 내는 일 또한 지속적인 끈기와 사명감 등을 요청한다. 대안은 표명으로가 아니라 실천으로 현실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