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리뷰  - 영 화

처절한 고뇌와 산통이 필요한 상업영화

 

김정룡(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위원)

 

20세기의 마지막 몇 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누볐던 화두라면 단연 ‘국제 경쟁력 확보’일 것이다. 경제계를 비롯하여 사회 각 계층에선 너나없이 세계화를 입에 올렸고, 세계화라는 기표의 실질적인 기의는 곧 해외 시장을 향한 일로매진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요컨대 세계 여러 나라에 내놓아 잘 팔릴만한 상품을 만들자는게 IMF이후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영화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쉬리」 신드롬 이후 한국 영화에 관한 언론의 보도에는 대개 ‘경쟁력’, ‘상품성’, ‘품질’ 등의 어휘가 꼬리표처럼 붙어다녔다. 꽤 많은 영화인들 또한 「쉬리」와 「타이타닉」 혹은 「용가리」와 「쥐라기 공원」을 비교 대상으로 입에 달고 다녔다. 그렇게 오래 떠들고 이리저리 재본 결과, 그래 우리 영화가 경쟁력을 좀 얻었는가? 나는 소음 이상의 것을 얻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생명력 있는 작품이 경쟁력 우월

경쟁력을 갖는다는 건 말을 바꾸면 상품 가치를 높인다는 얘기다. 영화라는 상품의 가치는 제작비 규모 여부라든가 스타 시스템, 구경거리로서의 영상미 따위와도 물론 관련은 있다. 그러나 재정을 포함해 할리우드와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영화계의 제반 여건을 고려하건대, 우리 영화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매우 현실적인 관건은 그보다 오히려 문화적 중력, 유머감각과 상식과 철학을 포함한 사고의 깊이와 너비, 세계관과 이를 적절히 담아내는 지적인 테크닉의 문제 따위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령 이런 예를 들어보자. 「쉬리」나 「유령」, 「주유소 습격사건」을 한 5년쯤 뒤에 다시 보아도 관객들은 즐거워 할 수 있을까?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10년뒤에도 사람들의 입에, 아주 아주 간간이라도 오르내릴 수 있을까?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성공시대」는 4년만에 다시 봤을 때 참으로 참담한 인상만을 안겨주었다. 젊은 영화라고 매스컴에서 호평을 받았던 「그대안의 블루」를 2-3년 뒤 TV에서 방영했을 때 난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같은 영화가 이렇게 짧은 시간의 흐름속에서도 시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작가로 통하는, 내로라 할 만한 한국 감독의, 그 당시 언론의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작품을 명절이나 연휴 무렵 집안 마루에서 보았을 때의 실망과 지루함을 더 길게 서술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

문제는 경쟁력이 아니라 생명력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경쟁력은 생명력 있는 작품만이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다. 경쟁력이란 말이 해외 덤핑 시장이나 B급 시장만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니라면, 세계의 중앙 광장에 내다 팔 만큼 외화와 능히 붙어 볼 맷집이 있는 경쟁력을 일컫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를 예술 영화 내지는 진지한 작품만이 상품 가치가 있다는 소리로 곡해하여 듣지 않기를 바란다.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처럼 난해하고 철학적이지만 빠르게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 영화도 있고, 스필버그의 여러 SF 영화처럼 자기 생명을 오래 유지하는 상업 영화도 있지 않은가) 대중 영화로서, 대중적 상품 매체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두께를 말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단적인 보기이긴 하나, 「ET」가 가진 경쟁력은 무엇인가.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가 저토록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배경은 어디에 있나. 비록 광범위한 대중으로부터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더라도 왕가위가 최소한 열광적인 매니아층을 거느린 까닭은 무언가. 그 영화들이 자국 시장이라는 범주를 넘어 바다 건너 여러 나라의 어린이,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인기 절찬리에 ‘팔린’ 근거를 우린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그 지역에 충실한 것이(예컨대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클리셰에  가까운 경구는, 그것이 지닌 일말의 진실과 효용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대목에서 힘을 잃는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세상에 대한 관찰, 견자(見者)로서의 자세를 그 영화의 제작 주체가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판타지적 설정 안에 기성 세대를 사실상의 외계인으로 묘사함으로써 아이들과 소통불능 상태에 처한 체제의 현실을 제시한 데서 우린, 몇가지 다른 혐의가 있긴 해도, 「ET」의 귀엽고도 리얼한 현실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순정만화적 상황과 나른한 감상주의가 있을지라도 「러브레터」에는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존재한다. 학창시절의 풍경화는 확실히 섬세한 관찰의 산물이다. 왕가위라면 그의 작품 세계에 동의하지 않는 관객도 많다. 그러나 몇가지 주목할 면이 있다는 사실에는 그들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상실감이 넘쳐나는 세계로서의 도시와 청춘, 이를 속도감 넘치는 포장지에 담을 줄 아는 감각. 현실을 보는 눈이 있고 이를 도회적 제스처로 그리는 기술이 있다는 것. 그 다음, 이 모든 요인들은 궁극에 ‘말이 되는 내러티브’를 토대로 뿜어져 나온다. 즉 ‘얘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 영화에서 아기자기하든지, 가슴이 찡하든지, 아니면 그런대로 경쾌하고 볼 만하든지 어떤 형태로든 얕고 깊은 재미가 부재한 것은 중요한 문제다. 그런 문제는 허약한 내러티브, 이야기가 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숨은 문제가 낳은 것이다. 드라마, 상황의 허술함이란 문제는 또 현실을 표피적으로 대충 본 결과가 낳은 것이다. 고소영과 정우성이 사랑하게 된 동기가 저렇게 싱거운데, 말하자면 현실감 없는데 「러브」가 재미있을 수 있을까? 「용가리」가 괴물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선한 동물로 변화하게 된 까닭도 아리송하고 싸우는 목적도 대상도 절실하지 않은데 경쟁력이 있을까? 현실을 새롭게 관찰한 것도 없이 좁은 체험에 기반한 이분법적 세계관을 강요하는 「유령」, 그 생명이 오래 갈까?

 

힘든 역경도 꿋꿋이 이겨야

상업 오락 영화를 너무 진지하게 접근하는 것 아닌가,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는 거대한 오해를 하고 있다. 상업 영화야말로 고도의 진지한 접근이 필요한 분야이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말을 걸고 이야기하는 것이 대중적 상업 영화다. 폭넓은 교감을 기대하며 기획한 영화가 설득력이 없다면, 현실을 거닐든 판타지 안에서 노닐든 극장에서 처음 만난 관객이라는 낯선 사람들을 설복시킬 무언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게임은 끝난 것이다.

대단찮은 외국 것엔 상찬을 하고 우리 영화에는 너무 야박하다고 불평하는 이도 있겠다. 그는 맘씨가 착할지는 몰라도 순진한 사람이다. 그리고 위험한 사람이다. 생명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위 아래를 보라. 중국이 어떻게 변해가고 일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냉혹한 정글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 남으려면 훨씬 더 악착같은, 처절한 고뇌와 산통이 필요한데, 뭐 그럭저럭 고생했으니 이쯤에서 멈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