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프로그램  문화예술 20세기 정리와 21세기 전망 ⑤ 미술

무엇이 문제인가 세기말 한국 미술의 과제 1)

성완경 (미술평론가/인하대교수)

 

근대성 그리고 문화적 문맥 형성의 문제 

IMF 체제의 찬 바람이 한국을 강타하기 시작한 것이 재 작년 연말이니 이제 꼭 2년이 되었다. IMF 사태의 여파로 우리 사회는 근대화 내지 세계화의 실질적 조건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전에 없이 새로운 각성을 갖게 되었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글로벌리즘의 정체가 무엇이고 이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일이 얼마나 만만치않은 일인가에 대하여 혹독한 레슨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한편 정보화 사회, 신 기술사회, 지식사회로의 변화의 징후와 구호들이 우리의 삶을 하루가 다르게 다른 세계, 다른 가상 속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이 변화의 의미와 파장, 그것이 일으키는 갈등과 희망에 대한 문화적 논의가 무성하다.

미술계도 물론 이런 환경변화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크게 영향받고 있다. 영향받는다 했지만 동요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그 변화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핵이 부재하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국 미술의 상황은 그냥 불황 혼돈 안개로 싸여 있다. 우선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 불황이다. 적어도 시장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미술은 현재 극심한 불황기에 처해 있다는 데 대다수 미술인들이 동의한다. 그리고 불안과 허탈을 느끼고 있다. 당혹감도 있다. 한편 새로운 작가군의 등장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많다. 새로운 발상과 감수성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읽어내고 담아내는 제도적, 환경적 틀이 부재한다. 방향감각이나 제대로 된 공론 형성의 틀이 없는 혼돈과 안개, 바로 그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사실 한국 미술이 정상적이고 내실 있는 내용으로 호황을 누린 적이 과연 있었는가도 의문이다. 지금의 불안은 이제까지의 호황의 구조가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냐는 것이 갑자기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불과 얼마 전 국내외의 주목이 되었던 화려하고도 급속한 외형적 성장과 국제화를 생각할 때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외형과 실제 사이의 괴리는 한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문화 그 자체라 할만큼 일반적이고 뿌리깊은 것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아직도 미해결된 ‘근대화 속의 전근대성’ 내지 ‘근대화 속의 불합리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전근대(프리 모던)와 근대(모던)와 탈근대(포스트모던)가 특이한 방식으로 공존하는 사회다. 특히 미술의 경우는 아마도 모던을 생략하고 프리모던으로부터 포스트모던으로 직행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지 모른다.

글로벌시대에 한국 미술의 허실을 살핀다는 것은 한국 근대화 과정의 특수성을 주목하면서 그 속에서 어떻게 현대 미술의 ‘자율성’과 ‘생산성’이 상호작용하며 의미있는 문화적 문맥을 형성하고 있나에 대한 비평적이며 실천적인 주시를 떠나서는 제대로 답을 구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본다. 다시 말해 (1)한국 사회 특유의 근대화의 양상들에 대한 검토와 (2) “문화적 문맥으로서의 현대 미술이라는 제도”가 한국 사회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근 현대 역사와 미술사를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과 더불어, 세계 현대 미술의 의식과 풍경을 근원적으로 바꿔놓았던 60년 대 말 이후의 미학적 정치적 쟁점들과 미술제도 및 미디어 문화의 상황 전체에 대한 충분한 이해 속에서 살필 때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한국의 전위미술과 세계의 개념주의 미술-편차를 보는 시각

 

해방 후 우리 미술의 역사를 살피면 이 점에서 주목할만한 의미있는 시기가 세 차례 있었다. 첫 째는 1960년 대 말에서 70년 대 초의 아방가르드적 실험미술의 시기다. 둘 째는 1980년 대 민중미술의 등장과 반모더니즘의 기류이다. 셋 째는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시기다.

첫 번째인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는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아방가르드적 감성이 뚜렷이 드러난 시기였다. 네오 다다, 앗상블라주, 기하학적 추상 등 탈앵포르멜적인 새로운 추상 및 오브제 미술, 설치·입체미술로부터 이벤트, 해프닝, 대지미술, 프로세스 아트, 메일 아트, 실험영화 등 행위예술적·개념미술적 성격이 강한 조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험미술의 조류가 펼쳐졌다. 그러나 이 조류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모노크롬류의 백색미학이 70년 대의 주류로 헤게모니를 구축하면서 급속히 잊혀지거나 사라졌다. 이것은 이 실험미술의 조류에 뛰어들었던 4.19세대 작가들이 아방가르드적 열정과 감각은 있었지만,  자신이 몸담아 살고 있었던 구체적 사회현실의 정치적·문화적 의미와 자신의 작업을 연결시켜 조망하기에는 위에 말한 인식 구도의 형성이 아직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미숙은 그들이 대체로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서구 전위미술의 피상적 정보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과도 연관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의 세계적 상황과 잠시 비교할 필요가 있다.

세계사적으로 60년대 말에서 7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73년부터 20년 간의 역사는, 역사가 홉스봄이 말했듯, 세계가 방향을 잃고 불안정과 위기에 빠져드는 역사다. 이렇게 보면, 비록 사람들이 황금시대의 토대를 무너뜨린 산사태의 의미를 80년 대에 와서야 알아차렸지만, 어쨌든 이것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산사태의 시작에 해당하는 시기다. 미술사에서 이 시기에 가장 지속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미술조류는 개념주의적 미술 조류-개념주의의 영향을 받았거나 개념주의의 주변에 있는 조류들- 이다. 개념주의 미술은 기존의 ‘오브젝트(물건)로서의 미술’의 헤게모니를 부정하면서 ‘아이디어로서의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였다. 또한 현대의 미술관과 경제구조 속에서의 미술의 제도화 현상을 비판하고, 나아가 미술을 사회적 정치적 저항에 개입시킴으로서 사회 속에서의 미술의 역할을 새로이 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개념주의 예술이 예술체계 내에서의 숨겨진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구조에 결정적 요소인 예술제도의 비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개념주의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예술제도의 안과 밖에” 동시에 위치시킨다. 개념주의는 때로는 정치적 참여 혹은 저항의 행위로서의 기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예술과 삶의 결합을 꿈꾸는 행동주의 프로젝트로 발전하기도 한다.

개념주의의 눈부신 성과를 볼 수 있는 한가지 예로 남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남미에서는 정치적 개념주의 미술이 발전하였는데 그 뚜렷한 성과는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중심부의 언어로부터 자신의 언어를 추출해낸 데 있다. 이로써 남미의 개념예술가들은 서구의 모더니즘의 언어를 자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념주의의 유산은 전반적으로 오늘의 모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실천형식에 풍부하고 다양하게 녹아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개념주의의 지적인 산물들은 오늘날 아이디어와 과정, 체험에 강조를 두는 예술작품으로, 즉 정치적 사회적 컨텍스트와 설치, 사진, 언어, 대지예술, 과학과의 결합, 예술과 삶의 결합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작품으로 풍부하게 통합되었다.

개념주의의 이같은 성과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은 오늘의 한국 미술과 국제 미술의 상황을 이해하고 한국 미술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우리 나라에서 개념 미술은 후기미니멀리즘과 거의 동일시되어 이해되었다. 서구에서도 오랜 동안 개념예술의 역사는 미국과 서유럽의 평론가와 미술사가들에 의해 독점되었고 주로 물질성과 기술 그리고 스타일을 강조하는 후기미니멀리즘으로 동일시되어 이해되어온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협소한 시야에서의 개념 미술의 이해였다는 주장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선 미니멀리즘을 환기시키는 근본적으로 형식주의적인 실천으로 지시되는 용어로서의 개념예술 conceptual art와 예술의 물리적 형태와 그것에의 시각적 통각(統覺)에 대한 역사적 의존을 완전히 부숴버린 개념주의 conceptualism는 명백히 구별해서 이해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를테면 최근 뉴욕의 퀸즈 뮤지엄 오브 아트에서 있었던 「세계의 개념주의: 다양한 발원점들, 1950년대-1980년대」 전에서 이런 관점이 전시의 기획 개념에서 뚜렷이 제시되었고 그것이 전시의 중요한 성과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나라에서 70년대의 주류미술로 정착하게 된 모노크롬회화류의 미술은 바로 서양의 이 후기미니멀리즘적 개념 미술이 일본을 거쳐-보다 정확히는 일본에서 모노파(物派) 작가로 알려진 이우환의 현상학적 동양철학적 번안을 거쳐- 한국에 수입되어 이것이 다시 한국적 서정성이라는 형식주의 미학으로 또 한번 절충된 결과다. 이 모노크롬미학은 우리 나라에서 70년 대이래 항상 한국 현대 미술의 가장 대표적이고 오리지널한 성취로서 꼽아왔고 아직도 그렇다. 이것이 현대미술에 대한 너무 협소하고 왜곡된 이해의 결과가 아니냐하는 지적은 새삼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왕있었던 우리 현대 미술의 유산을 또 한번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객관적 정보의 존중은 우리 스스로 비평적 저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70년대 들어서서 백색 모노크롬 미학이 한국 전위 미술의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그 헤게모니와 그 협소한 미학적 시야에 의해 당시의 퍼포먼스적·프로세스적·개념적 성향의 실험적 미술 기류의 상세한 내용과 그 의미가 상당 부분이 가리워지거나 왜곡되어왔기 때문에, 앞으로 새롭게 조사·연구되고 음미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같은 폄하와 몰이해의 결과로 1970년 대 중반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풍경은 극도로 평면화되었다. 아울러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의 방식에서 그 지적·사회적 컨텍스트의 생략은 한국 현대 미술의 정상적 발전에 중요한 손실을 초래했다.

 

민중미술과 현대미술의 관계-새로운 시야의 통합 필요

 

두 번째 시기는 1980년대로서 민중 미술의 태동과 그 전개를 보여준 시기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라는 특유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술의 문화적·정치적 컨텍스트를 문제삼고, 자생적·지역적 맥락에서 성장한 미술 운동이었다. 이 점에서 이제까지의 한국의 다른 어떤 모더니즘 미술 조류보다도 ‘근대적’ 성격을 실질적으로 보여준 미술 운동이자 문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 근대적 성격의 하나로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 인식에 기반한 자생성과 지역성·민족문화적 정체성의 획득을, 그리고 다른 하나로 소통으로서의 미술의 기능 회복과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의 정상화를 들 수 있다.

민중미술가들은 후자의 경우에는 제한된 성공을, 그리고 전자의 경우에는 뚜렷한 성공을 거두었다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그 성취는 “미술제도의 안쪽이 아닌 바깥 쪽에” 즉 전통, 대중, 지역(민족문화적 전통/ 참여적 운동적 대중/농촌과 공장과 대학이라는 지역적 맥락) 속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얻은 성취였다. 겉으로 들어난 스타일이나 형식(이를테면 민중적 도상학과 서사적 양식의 벽화, 걸개그림, 깃발그림 등) 그 자체보다도, 이를테면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해 생활 근거와 농촌 문화적 정서를 한꺼 번에 잃어버린 대도시 근교 공장 노동자들에게 풍물놀이의 장단을 되찾아주면서 이를 생존권 사수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전투적 신명으로 연결지어낸 그 하나만으로서도 이들의 성취는 우리의 현대사에서 전위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기에 손색이 없다.

후자의 성취는 부분적이다. 민중 미술은 이제까지 한국의 보수적 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에 꼭같이 깃들여 있던 순수주의적, 형식주의적 미술 인식의 한계를 깨고 현실적, 지적, 대중적 소통으로서의 미술의 힘을 회복하는데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또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비좁고 편향된 이해 방식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그 인식 지평을 확장하는 데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현대 미술에 대한, 특히 모더니즘의 언어와 제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문제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민중 미술가들 대다수에게 공통적 정서로 작용한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회의적 태도와 미술제도에 대한 만성화된 냉소주의는 전위미술의 문화적 가치와 텍스트성에 대한 이해 부족 혹은 이해 노력 포기의 알리바이로 작용했다.  이런 경향은 민중 미술의 후기에 즉 80년 대 말과 90년대 초에 더 심화됐다. 민중미술의 성취는 점차 후자보다는 전자에 즉 집중된 것으로 되어갔으며 이와 더불어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와 포섭의 노력도 더욱 희미해져 갔다.

무엇보다도 현대 미술의 제도에 대한 주목이 소홀했다는 점, 다시 말해 예술과 사회의 거리와 그 원거리적 중거리적 작용의 변증법에 대한 조망에 허약했다는 점은 민중미술의 중요한 한계다. 결국 다시 한번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예술제도의 안과 밖에 동시에 위치시키는” 조망의 문제인 것이다.

민중 미술 언어의 점진적인 상투화와 질적 저하가 이 조망의 한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 한계의 의미를 너무 좁은 시각에서 이해한 것이다. 정치적 미술 혹은 민중 미술은 어느 때나 어느 사회에서나 새로운 미술의 가치에 대해 둔감한, 오직 모든 것을 미학적 잣대만으로 평가하려는 대중 속에서 흔히 매도와 혐오의 대상으로 있었다. 이런 일이 80년대 초에 한국사회에 있었고 90년대의 마지막 해인 지금까지도 아직 있다. 오직 적은 수의 작품만이 그 매도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그러나 그 적은 수의 작품이 꼭 민중 미술의 대표적 걸작인 것은 아니다(신학철의 경우를 보라). 저질 얘기는 민중 미술의 사실상의 핵심이 아니다.

한국 미술의 진짜 스캔들은 앞서 말한 조망의 획득으로 한국의 현대 미술을 더 나은 수준으로 견인하는 역사적 기회를 민중 미술이 놓쳤고 모더니즘 미술은 애초부터 잃을 것도 없었다는 점에 있다. 민중 미술과 현대 미술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한국 미술계의 신경망과 인식 패턴 속에 민중 미술과 현대 미술 간의 상호 포섭을 가로막는 어떤 장애가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민중 미술이 현대 미술의 제도에 대한 인식의 소홀로 인하여 스스로를 현대 미술의 안과 밖에 위치시키는 ‘개념주의적 조망’에 실패했다면, 모더니스트 비평은 애초부터 그 시선을 현대 미술의 안쪽으로 한정함으로써 그 장애를 ‘자연화’하였다. 이 장애는 불행히도 오랜동안 한국민을 길들여 온 냉전 이데올로기의 효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일부 모더니스트 비평에 의해 더욱 높은 장벽으로 되어 민중미술을 모더니즘 미술로부터 분리시켰다. 그 결과 1980년대 말 경 민중 미술 대 모더니즘, 또는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이라는 이미 있었던 대립 구도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 대립은 지금까지도 상존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논의를 일정한 수준 이하로 제약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과 문화적 차원의 획득

 

세 번째 시기인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논쟁과 더불어 1980년 대 한국 현대 미술의 이슈들에 대한 점검과 새로운 문화 조건에 대한 논쟁이 고조되었던 시기다. 이 논쟁은 앞서 말한 대립된 두 진영 간의 논쟁이었다. 이 시기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 혼란과 민주화 운동의 표류, 경제 호황과 중산 계층의 성장, 급속한 도시화의 진행, 새로운 소비 패턴과 취향의 등장(특히 ‘신세대 문화’)으로 특징지워진다. 한편 ’88 서울 올림픽으로 미술의 개방화, 국제화가 시작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권 붕괴가 시작되던 때였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이러한 국내외적 정세변화 속에서 한국 현대미술에 잠재되어 있던 제반 컨텍스트들을 새로운 틀 속에서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란 개념은 1987년 경부터 ‘메타복스’ ‘난지도’ 그룹 등 한국의 일부 설치 미술, 오브제 미술, 형상 회화를 기존의 모더니즘 및 민중 미술과 구별되는 ‘탈모던’적 경향이라고 주장하며 옹호한 모더니즘의 제2세대 평론가들에 의해 먼저 제기되었는데, 이에 대해 민중 미술 쪽 평론가들이 그 범주화의 부적절함과 개념의 피상성을 문제삼아 반격하면서 이후 거듭된 상호 반론과 더불어 본격적 논쟁으로 발전했다. 민중 미술 쪽 논의는 사회 변혁의 의지를 여전히 견지하는 가운데, 한국 사회에서 진행 중인 과거와는 다른 문화 변동의 현상을 주목하면서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진보적 문화이론과 비평논리의 틀을 모색하려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쪽은 민중 미술의 정치적 편향을 단죄하면서, 다원주의를 새로운 가치로 정당화하려 시도했다. 의미있는 것은 이 논쟁을 통해 양 진영 모두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미술 개념으로서보다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영역에 보다 광범위하게 관련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문제로 파악해 세계 자본주의의 전체 구조와 한국이라고 하는 지역적 구조와의 연결점에 주목한 점이다. 또한 후기 자본주의적 사회의 중요한 현상으로 문화 지형의 전반적 변화에 주목해 미술의 논의를 문화이론, 문화비평 내지 문화과학의 영역으로 확장할 필요성을 현실화하는 계기로 삼게 된 점도 중요한 성과다.

그러나 실제 미술의 생산과 이 논쟁 사이의 연결이 희박했다는 점이 이 논쟁의 중요한 한계였다.  이 시기 이후 국내 미술 비평은 별다른 뚜렷한 이슈를 형성하지 못한 채, 그 비평적 지도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했다. 국제적 미술 동향에 대한 정보 및 해설기사와 프로모션 기사가 비평을 압도하고 있는 현상은 최근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고 있다.

비평가에 의한 비평이든 작가들에 의한 비평이든 비평적 논점의 실종은 93년 이후 오늘의 미술의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징후임에 틀림없다. 1990년대 초 중반 이후 부상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은 대부분 이같은 비평 이론의 공백 속에서 작가 자신의 개인적 역량과 국내외 화랑의 프로모션을 통해 알려진 작가들이다.

신세대적 키치 미술, 페미니즘 계열 여성작가, 회화적 오브제 및 설치로서의 사진, 비디오나 조각 설치의 대형 현장작업, 새로운 개념주의적 오브제 등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작가들의 작업에서 새로운 문화적 지역성으로서의 혼성의 전략과 신감각주의를 그 약간의 공통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특히 키치적·컬트적·대중문화적 신세대 미술에서 이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의 국제화된 미술 환경 속에서 지역성과 문화적 매력의 강조, 감각주의, 전시 연출력 등은 점점 더 지역성과 세계성의 접합을 중시하는 국 내외적 교류의 네트워크 속에서 쉽사리 식별가능한 작가적 탁월성의 표지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타일 상의 차이와 다양성에서 지역성의 문화적 표지를 쉽사리 식별하려 하는 경향은, 점점 증대해가는 국제적 문화교류 속에서 특히 한국과 같은 아시아 지역의 현대 미술을 인지하는 손쉬운 기준으로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점차 증대되어 가는 국제 미술의 교류와 이로 인한 문화의 상대주의 속에서 경계 이동, 정체성의 해체, 혼성, 번안, 유목주의, 무역로와 동서 교차, 새로운 지도 그리기 등 갖가지 수사학으로 표현되는 문화 다원주의의 이슈는 세기 말의 한국 미술에도 피할 수 없는 새로운 문맥 형성의 과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원주의가 제기하는 문맥 형성은, 한국에서 진정한 ‘문화적 문맥’으로서의 현대 미술이라는 ‘제도’의 구축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미술의 제도와 사회 정치적, 문화적 컨텍스트를 한데 아우르는 ‘개념주의적 조망’을 제안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핵심이 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근대화의 특수한 조건을 올바로 보는 일이다. 한국 사회라고 하는 장소적·시간적 구체성과 지역성의 문맥 속에서 근대화의 속도와 균열, 그 충돌과 모순, 차이와 다양성의 지점들을 드러내고 문맥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같은 문맥화의 충실도가 한국 미술의 지역성과 세계 문화의 보편성과의 연결 그리고 한국 미술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모색의 과제에 있어서 가장 핵심 사안이 될 것이라고 본다.

 

1) 이 글은 일본의 미술사회평론지 POSI(책임편집인 針生一郞I, 제9호, 1999)에 실린 졸고 “韓國現代美術의 構造와 展望”(열화당 간 졸저 <민중미술 모더니즘 시각문화>에 재수록)를 기본 골격으로 하여 내용을 다소 수정하거나 첨삭한 것이다. 개념 예술에 관한 부분은 뉴욕의 <Global Conceptualism: Points of Origins, 1950s-1980s>(Queens Museum of Art, 1999)전 카탈로그 글을 일부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