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장 - 문화예술인의 작품 활동 현장 |
흙과 불과 혼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작품 김인현 (르포라이터)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었던 작업실 테라코타 작가 이서기씨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는 그녀의 작업이 마무리를 보고 있던 시간이었다. 이른 시간 서울을 떠났음에도 도로는 잦은 정체를 보이고 있었고 가까운 길이라 얕잡아 보았던 여주는 생각만큼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어찌 어찌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이천나들목을 지나 한참을 가서야 그녀가 가르쳐 준 여주나들목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그녀의 말들을 상기하면서 우회전과 좌회전을 거듭했고, 잦은 굴곡을 보이는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서야 점동면 소재지를 만났다. 몇 번이나 지나가는 촌로들에게 길을 물었던 덕분이었다. 개통이 얼마 되지 않은 점동면과 당진리를 이어주는 깨끗한 신작로 끝에 그녀의 작업실이 있었다. 시골인심은 그래도 살아있었던지, 자기 일손을 잠시 멈춘 채 시골 아낙들과, 슈퍼 노인은 초행을 떠난 나그네의 번거로운 길 안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업실 마당은 온통, 그녀의 작품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노란 테라코타들의 무더기 속에서 나는 작은 경탄을 하고 있었다. 겉에서 보기엔 여느 시골집들과 다를 바 없는 외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녀가 사는 마당과 그녀가 일하는 작업실은 아늑했다. 사람이 사는 맛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녀의 작업실은 작고 아늑했다. 벽면은 노란 옹기 흙과 깨어진 항아리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중앙엔 투박한 난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울 외곽의 어느 전망 좋은 강변에서 보았음직한 카페를 닮았다. “원래 이곳에서 카페를 했었어요. 하지만 이곳이 좋다고 먼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기도 그렇고, 또 나 하나 보자고 오는 사람들 대접하지는 못할망정 장사라니요. 그래서 결국은 접었지요.” 하지만 아직도 곳곳엔 카페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타 주던 맛있던 커피 한 잔에도...
그녀만의 독특한 작업방법 혼자 사는 외로움 때문일까? 그녀의 작품엔 그녀가 말한 외로움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뻥 뚫린 입, 그 입 사이로 보이는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공허가 인간 군상들 속에 묻어 있었다. 그것을 통해 그녀는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외로움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리내고 싶지만 소리낼 수 없는, 그런 능력마저도 가지지 못한, 그런 사람의 답답함을 말하고 싶었어요. 답답함이나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제 작품의 입을 뚫어요” 그녀의 생각은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뻥 뚫린 입으로 그녀의 공허를 단박에 감지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일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의 정교함, 그것이 그녀만이 가진 힘은 아닐까? 미술이론가 최형순 씨는 그렇게 정교한 그녀의 작품을 두고, ‘테라코타답지 않은 섬세함으로 번잡한 일상을 뛰어넘는 이상향을 제시하려는 작품’, ‘얼굴 표정이 강조되고, 사실성이 두드러진 손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평한바 있다. 테라코타란 흙과 불과 혼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즉 점성이 좋은 옹기 흙에 작가는 혼을 불어넣고, 그런 과정 속에 일정한 모양을 갖춘 옹기 흙을 오랜 시간 공들인 불길로 다듬으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신성한 노동의 산물인 것이다. 최형순 씨의 말을 빌리자면 테라코타는 ‘가식적인 세련을 도모함 없이, 가장 자연스러운 채로 우리 삶이 태어나고 돌아가야 할 그 흙을 빚고 가마에 굽는 과정을 거친 신성한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테라코타의 기법은 통째로 하나의 기초를 만든 후, 부분을 떼어내서 다시 작업을 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테라코타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이 방식이 이서기 씨에게는 조금 낯설다. 그녀의 작업 방식은 조금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로 코일링이라는 기법을 사용한다. 도자기를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이 기법은 둥글고 가늘게 찰흙을 한 층 한 층 쌓아올려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이 기법은 일정한 모양을 갖춘 도자기류를 만드는데 적합한 방식이지, 테라코타에선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잦은 변형과 굴곡을 숨기고 있는 테라코타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처음부터 오랜 구상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내고 있는 이 대단스러운 작가는 유감스럽게도 대학은 문턱 한 번 변변히 밟아보지 못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정진규 씨가 보여준 테라코타를 통해 얻은 개안의 덕이다. 우리 나라에 테라코타라는 작업을 처음으로 소개했던 정진규 씨의 작품을 보면서 그녀는 어떤 끌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까지는 보지 못했던 세계에 눈을 뜬것이다. 그 날 이후, 흙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긴 그녀에게 흙 작업이 하나의 의미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정식으로 테라코타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초창기에는 고생도 많았다.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자수성가하다시피 한 그녀의 고생은 그녀 나름대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이제 막 테라코타에 재미를 붙인 그녀에겐 변변한 가마 하나 없었다. 결국 그녀가 찾아낸 최적의 장소는 당시 신내동에 조성되어 있던 옹기 가마터, 이서기씨는 그 옹기를 굽는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구어 냈다. 우악스런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남들의 공정 속에 자신의 작품을 끼워 넣는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즐거웠던 것은 ‘보기에 놓았고 작업하는 것이 행복했었’기 때문이었다.
도심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해맑음 이서기 씨는 자신의 고향을 자주 지리산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고향은 하동이다. 서울에서 지하 작업실에 전전하던 시절, 직장생활을 할 것도 아니라면, 서울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리산 쪽으로의 이주를 생각했다. 1991년 일이다. 그런데 일이 잘되려고 그랬는지, 부동산하는 친구가 여주 땅을 권했고, 그 친구와 몇 군데를 돌아보던 중, 최적의 장소를 발견한 곳이 지금 그녀가 머물고 있는 땅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벌써 8년을 살아가고 있다. 문명은 언제나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 누구나 서울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결심은 쉽지가 않은 법이다. 그녀는 훌쩍 서울을 떴다. 그것을 두고 ‘무식해서’라고 말한다. “문명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편해지는 것 같아요. 이곳에서 살아보니 돈도 필요가 없더라구요. 때로는 무식이 용기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한답니다.” 정말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복잡한 도심에서 생을 사는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맛 볼 수 없는, 50을 눈앞에 둔 작가의 해맑음을 엿보았다고 하면 지나치다고 할까? 그녀는 아침 8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출근을 한다. 출근이래야 마당을 하나 가로지르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언제나 작업실로 출근을 해서 작업을 하고, 오후가 되면 다시 마당을 가로질러 퇴근을 한다. 그때부터는 그녀의 자유시간, 그 시간의 대부분을 독서로 보내는 그녀가 최근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100인의 나의 스승」이라는 가제가 붙어 있는 작품이다. “살아가다 보니,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들 모두의 얼굴을 하나하나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어요. 옆집 아저씨, 농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청년 등, 모든 사람들이 지금 제 작품의 소재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