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REVIEW - 영화

관객의 예의, 영화의 예의

김정룡(영화평론가/영상물등급위원회위원)

 

끝까지 남아야하는 의무는 없다.

강의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며칠 전 영화를 보다가 너무 시시껄렁해서 그냥 극장을 나섰다는 얘기를 여담삼아 들려주는데 한 학생이 힐난조로 반문한다. “그저 그런 작품이라해도 끝까지 봐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긴 고통의 시간을 거치고 완성된 영화일텐데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나는 그리 뜸하지 않게 만나곤 한다. 그럴 때 솔직히 난 당황하지 않는다. 영화나 영화관람에 대한, 뭐랄까 나름대로의 관점이랄까 취향과 고집을 주장하는 편이어서 전혀 부끄러울게 없는 나의 답변은 이러하다. ‘누구도 그럴 수 있다. 즉 중간에 옷가지를 챙겨들고 나가버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래선 안된다고 말할 순 없다. 즉 스크린에 ‘The End’가 뜰 때까지 혹은 모든 스탭과 찬조자의 이름이 소개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객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령 나에게, 혹은 당신에게, 비디오를 보는 그 누구에게, 미술관에서 회화를 감상하는 이에게, 시 한편 소설 한편을 마주한 독자에게, 끝까지 봐야한다고 말할 권리는 없다. 나나 당신은 보거나 안볼 권리가 있다. 그것이 다중의 관람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는, 예컨대 일부 클래식 콘서트와 같은(사실 이 경우에도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몇몇 예외적인 공간적 특수성의 예를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이 정도까지 얘기했는데도 수긍하지 않는 이가 가끔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은 대개 ‘예의’라는 대목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좀더 당당해질 필요를 느끼는 순간이 이럴 때이다. 적극적인 답변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감독에 대한 혹은 영화에 대한 비례(非禮)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 영화는 나에게 먼저 예의없는, 무례한 영화였다. 그저 무의미할 뿐만아니라 내 인생의 한 소중한 시간을 황폐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 내가 취할 예의가 아닌 것이다.’

대개는 이쯤에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래도 못내 불편한 안색을 거두지 못하는 이들도 간혹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통상 ‘엔딩 타이틀’에 대한 미련을 마지막 무기로 들고 나온다. 이에 관해서라면, 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나올법한 우스꽝스런 사례 몇 가지를 체험한 바 있다. ‘출연자, 스탭, 로케이션 장소와 도움받은 이들 등등이 올라가는 마지막 자막에 대한 강조는 확실히 ‘예의’가 아니라 ‘기본’과 관련있으며, 관객이 아니라 영화제도와 제도적 관행과 관련있다. 영상이 끝나고 블랙스크린이 뜨는 순간 영화를 끊어버리는 성급하고도 독재적인 영사기사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자 관객의 권리장전이란 점에서 그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무례함에 맞서 기본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걸 봐야하는가 아닌가는 그러니까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는 얘기인 셈이다. 내가 겪은 농담같은 사례 중 어느 것은 아무튼 관객이 지나치게 예의바른데서 오는 희극적 현상이었다. 이란 영화 「가베」의 시사회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화가 끝나도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감동의 여운을 지연시키려고 그런 것일까? 나는 의구심이 일었다. 「가베」는 키아로스타미에 눌려 그만큼의 빛을 보지 못한 이란의 또다른 거장 마흐말바프의 상징주의적 작품이지만, 내가 보기엔 좀 아니올시다였다. 의미는 있지만 감동은커녕 재미도 없고 사실은 그 상징과 알레고리란 것도 도식적이고 다소 시대착오적인 느낌마저 주는 것이었다. 지루했다. 아름다운 민속촌 영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사는 이 정도인데, 문제는 기자를 포함한 열댓명의 관객이 아무튼 나를 빼곤 일어나질 않는 것이었다. 걸어나오다 멀뚱한 표정으로 자막을 눈으로 훑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다시 의문이 일었다. 이 사람들 모두 이란어를 할 줄 안단 말인가?

 

가장 강력한 수단은 ‘대화’

각설하고, 그렇다면 극장에서 관람을 중지할 결심을 하도록 부추기는, 착석을 훼방놓는(TV로 치자면 채널 서핑을 하게 하는), 이리도 길게 서로의 ‘예의’를 검토하게끔 만드는 요인이 있다면 그게 무언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무엇이 우리의 몸을 좀 쑤시게 만드는가. 구성의 문제라든가 개연성이라든가 어떤 상황의 연출력 따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육체의 그물에 걸리는 가장 확실한 건더기는 무엇보다도 대사다. 이미지, 상징, 관습, 다른 건 대충 넘어간다손 쳐도 이것만큼은 도무지 모른 척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를테면 신정균 감독의 데뷔작 「삼양동 정육점」에서 주인공 동천이 울부짖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짐짓 못들은 척 할 자신이 내겐 정말 없다. “변한 건 없어. 내가 형사짓을 관두고 너 대신에 이렇게 고기를 썰어도, 너 대신에 신혜년을 데리고 살아도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잖아. 너 아냐? 인생의 정체성을? 아무 것도 변하는 건 없이 그냥 스트레스만 새카맣게 쌓이는 그 씨팔놈의 정체성!” 임권택의 「노는 계집 창」에서 신은경이 ‘잃어버린 고향’ 운운할 때, 아니면 이지상의 「둘 하나 섹스」에서 남자가 서른이라고 하자, 여자 왈 “황혼이 보이는 나이네요”라고 대꾸할 때 나는 얼굴이 슬슬 달아오름을 느낀다. 그리고 자리를 뜰 마음을 먹고 어둔 극장 안에서 나갈 길을 찾는다.

왜 대사인가하고 반문하는 이가 혹시 있을까? 답은 아주 단순하다. 대사는 캐릭터, 영화가 구축하고자 하는 인생, 서사가 질질 끌고가려는 허구의, 그러나 스크린 상으론 실존하는 한 독자적 삶의 과거를 보여주고 현재를 말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고로 대사의 파멸은..., 실로 처참한 것이다.

반대의 예로 하필 외국영화를 들어서 안됐지만, 적어도 어떤 외화는 우리의 기대를 족히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연극적 배경에 희비극적 감정을 독특하게 버무린 영화 「헐리벌리」의 대사는 그런 의미에서 이들 인생의 존재에 대해 실감을 갖게 한다. 그리고 수사학적 이미지에 대한 경사가 유행처럼 영화계를 휩쓰는 요즘 세태에 어떤 반향을 주기도 한다 : 필이 죽었다고 하자 도나는 슬펐냐고 묻는다. 에디의 목소리는 투명하다. “정장 차림에 엄숙한 표정, 위로의 포옹과 의례적인 말, 위용을 자랑하는 장례차량... 묘지로 가 목사의 축도를 듣고 구덩이에다 던져 넣었어.” 도나, 다시 묻는다. “슬펐어요?”, 에디 답한다. “무덤을 둘러싼 승냥이들 같았어. 누군가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지. 반주없이 목소리로만. 목사가 추모의 말을 했지만 심금을 울린 건 이름없는 가수의 노래였어.” 여러 상황과 오브제, 모티브가 스크린의 수면 위로 넘실대더라도 때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건 대사라는, 이름없는 가수의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는 이 대목에서 새삼 떠올렸다. 뒷얘기는 내겐 무척 시사적으로 들렸다.

도나 : 솔직해질게요. 사실 동부엔 안갔어요. 샌프란시스코로 가다

     ‘옥스나드’에 머물렀죠.

에디 : 나도 거기 알아.

도나 : 멋지네요.

에디 : 뭐가 멋져?

도나 : 대화가 통하잖아요, 첫 대화에서부터.

그렇지. 예의고 뭐고 간에 우선은 대화가 통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