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REVIEW - 출판

새 역사 앞의 이스라엘

김기협(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

 

유럽 현대사의 산물

시오니즘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전통적 시오니즘은 막연한 민족정서 같은 것이다. 2천 년 가까운 세월을 나라없이 세계 각지에 퍼져 살면서도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해 온 종교, 관습, 문화 등의 복합체가 전통적 시오니즘이다.

한편 근대 시오니즘, 즉 정치적 시오니즘은 19세기말 유럽의 유대인들이 유럽 각국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자극받아 유대인도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자고하는 구체적 목적을 가진 운동이었다. 이 정치적 시오니즘이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이어졌고, 건국 후에도 아랍인과의 관계 설정에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해 왔다.

근대 시오니즘은 출발점에서부터 유럽의 정세변화에 따라 펼쳐졌다. 각국의 민족주의 고양에 따라 차별과 박해가 심해지는데 대한 반발로 시오니즘이 제기되었고, 1차대전을 통해 영국이 중동지역에 지배력을 가지게 됨에 따라 발포어 선언(1917년)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꿈이 구체화되었다.

1930년대 나치즘의 박해로 유럽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급증했으며 2차대전 중의 대학살로 국제적 동정을 모음에 따라 1947년 이스라엘 건국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이스라엘은 유럽현대사의 산물이다. 현지 아랍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대인도 유럽인이다. 유럽인들이 유럽 사정에 따라 몰려와 아랍세계 한복판에 둥지를 틀고 나라까지 세우니 이것을 침략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으로서는 난데없이 나타난 유대인의 통치를 받으라니 생존이 걸린 문제다. 유럽 유대인들이 근 2천년 전의 고토(故土)라 하여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운다는 계획은 애초부터 현지 아랍인들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을 바라본 관점은 제국주의자들이 ‘미개인’을 바라본 관점 그대로였다. 유럽의 고등문명을 전파해주는 것에 미개인들은 감사해야 마땅했다. 문명의 혜택을 외면하는 무지몽매한 미개인이 있다면 힘으로라도 문명의 고마움을 알게 해주면 될 일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이 모든 식민지에서 쓰던 이 정책이 팔레스타인이라고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랍인들에게 타협보다 강압의 태도를 취했다.

 

이스라엘의 역사 바로 세우기

이스라엘은 건국 후 국내의 아랍인에게는 억압 정책을, 주변 아랍국들에게는 대항정책을 취했다. 여러 차례 전쟁도 겪었고 유엔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국민의식의 통제는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다.

이스라엘의 투쟁사를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역사만이 학교에서 가르쳐졌다. 미화된 이스라엘사는 미국 영화계를 지배하는 유대인들의 영향력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랍인과 더불어 살려고 노력했지만 오만한 아랍인들이 이를 거절했다, 아랍세계와의 전쟁은 절대적 열세에 불구하고 생존을 위한 정신력으로 이겨낸 것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은 이스라엘이 쫓아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떠난 것이다, 등등이다. 그런데 지난 9월 배포된 이스라엘의 새 역사교재들은 관점을 크게 바꿨다. 팔레스타인인의 민족주의도 시오니즘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나의 민족주의로 소개돼 있고, 유대인의 진출로 생활조건의 변화를 맞는 아랍인들의 입장도 고려돼 있다. 유대인 지도자들의 오판으로 타협의 기회를 놓쳤을 가능성도 지적돼 있고, 아랍과의 전쟁도 유럽에서 가져온 우월한 기술과 자본에 힘입은 것이라고 설명돼 있다. 이 교재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츠하크 라빈 수상 정권에 의해 5년 전 편찬이 시작된 것이다. 라빈 암살 후 집권한 빈야민 네타냐후는 호전적 대외정책을 폈지만 이 편찬사업은 묵묵히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평화정책을 추구하는 에후드 바라크 수상 집권 후에 각급학교에서 쓰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보수파에서는 물론 이 교재들에 불만이 많다. 국민의 애국심이 위축되지 않겠느냐, 이스라엘의 국익이 손상되지 않겠느냐, 하는 걱정을 담은 논설이 줄을 이어 신문지면에 올라왔다. 그러나 이 교재들을 폐지시키려는 움직임은 없다. 진정한 역사를 찾는 다년 간에 걸친 학계의 노력이 이 교재들을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이른바 ‘수정주의’ 사관은 80년 대에 두각을 나타냈다. 국제적 고립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지식층의 의식이 무르익은 상태에서 정부문서가 대량 공개되기 시작했다. 이 문서에서 종래의 독선적 역사서술을 뒤엎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이로부터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다 현실적으로 해명하는 관점이 빚어져 나온 것이다. 이 새로운 사관이 90년 대의 평화정책에도 하나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최근에 나온 두 권의 책이 이스라엘의 수정주의 사관을 정리해 보여준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아비 슐레임 교수의 「철벽(鐵壁) The Iron Wall」과 이스라엘 벤구리온대학 베니 모리스 교수의 「시오니즘과 아랍의 대결 A History of the Zionist-Arab Conflict, 1881-1999」이다.

「철벽」은 호전적 시오니즘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1880-1940)가 제창한 대(對)아랍정책을 상징하는 말이다. 자보틴스키는 온건파가 주장하는 아랍인과의 화해 가능성을 환상이라 여기고, 아랍인을 ‘철벽’으로 밀어붙여야 힘으로 시오니즘을 짓밟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아랍인들이 화해에 나서게 될 것이며, 그래야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슐레임은 지금의 평화정착 추세가 자보틴스키의 예견에 부합하며, 지금 단계까지 강경책을 주장하는 호전파는 ‘투쟁’을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본 자보틴스키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우리도 다시 되돌아 봐야...

모리스의 책은 종래의 국수주의 사관을 벗어나면서도 반대쪽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정주의 사관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이 거둔 하나하나의 승리를 ‘기적’이니 ‘정신력의 승리’니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자세를 비판하지만 이 모든 승리를 묶어놓고 바라본다면 “시오니즘의 역사에는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시오니즘보다 25년 늦게 발동했다는 사실이 시오니즘의 승리에 중요한 작용을 했음을 지적하면서 “시오니즘이 유럽의 국수적 민족주의를 거울삼아 나타났듯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시오니즘을 거울삼아 나타났다”고 관조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역사 바로세우기’가 심심찮게 논의되는 것을 보면 지난 역사를 부끄러이 여기고 반성하는 마음이 적지않게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가 바로 서려면 ‘합리성’과 ‘객관성’의 두 발을 땅에 굳건히 딛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나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이스라엘의 새 역사관이 아랍세계와의 관계를 보는 것과 같은 수준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일까? 20세기 후반 국제사회의 말썽꾸러기 이스라엘의 변신이 껍데기만의 변신이 아님을 그 역사관의 변화에서 확인하며 우리의 자세도 다시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