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건축에서 국가, 아방가르드, 유령 / 박정현

아방가르드는 20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남용된 단어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아방가르드를 이야기하려는 이 글은 아방가르드에 대한 최소한의 논의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현대 건축을 이해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베니스의 역사학자 만프레도 타푸리는 아방가르드의 역할을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가 야기하는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짐멜의 대도시 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그에게 예술(그리고 건축)은 자율성을 지닌 것이라기보다 사회적 총체의 한 부분이었다.1 반면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를 키치와는 구분될 필요가 있는 모더니즘 예술의 자율성(비재현성을 통해 사회로부터, 매체 특정성을 통해 다른 장르로부터)의 맥락에서 파악했다.2 Peter Bürger는 예술제도 그 자체를 비판한 초현실주의와 다다 등 1920년대의 실천을 역사적 아방가르드로 명명하며 특권을 부여했다.3 그에 따르면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한 모더니즘은 물론이고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반복하면서 이를 제도화해버린 1960년대 네오 아방가르드와도 구분되어야 했다.4 네오 아방가르드의 중요성을 복권하길 원한 할 포스터는 네오 아방가르드를 통해서 비로소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기획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고 진단했다.5 이외에도 아방가르드를 둘러싼 역사적 해석의 목록은 길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논의는 정치적 입장과 역사적 해석에 따라 양립할 수 없는 듯 보이지만 암묵적인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우선 아방가르드의 변증법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예술을 규정하는 제도와 기관, 산업 사회와 대도시가 야기한 소외와 충격이 먼저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정적인 규정”이 “부정적으로 이성적인 측면” 이전에 존재해야 한다.6 또 20세기 초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국경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예술의 공동체, 네트워크를 통해서 가능했다. 1930년대 국경이 배제와 차별의 경계가 되었을 때 유럽의 아방가르드가 소멸해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공은 앞에서 언급한 아방가르드의 변증법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없거나 부족한 가운데 역설적으로 생겨난 아방가르드였다. 일견 1960년대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다채로운 양상으로 나타난 비저너리 건축과 계획과 유사해 보일지 몰라도 기공의 작업은 딛고 서 있는 역사적 배경이 상당히 달랐다. 다른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달랐다. 국가는 극복해야 할 제도나 대타자나 현대예술을 억압하는 반동적 기제로 그려지곤 하지만, 지난 세기 한국에서 국가는 예술과 건축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에는 도약이 필요했다.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이는 한편 국가(nation-state)를 문자 그대로 건설해야 하는 과제는 시급한 것이었다. 왕조, 식민지, 미군정을 거친 뒤 탄생한 신생 독립국이었던 대한민국은 그동안의 국가의 부재를 극복해야 했다. 제도적, 법적, 행정적 부재뿐 아니라 어떤 가치와 이념으로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social imaginaries 역시 부재했다.7 1961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사 정권은 경제 개발을 통해 국가를 둘러싼 여러 문제(대표적으로 탈식민성, 정권의 정당성 등)를 일거에 해소하고자 했다. 빈곤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리를 비운 뒤 돌아온 아버지(유교적 전통에 따라 국가와 동일시된)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달러의 절감과 확보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조에 크게 의존해온 경제가 차관 경제로 전환되고 있던 1960년대 중반, 외환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 목표였다. 1964년 봄 한일국교 정상화 추진과 대일 청구권 협상과 11월 베트남파병 등이 대외적으로 추진된 달러 확보의 수단이었고 1965년 설립된 일련의 국영 기업은 내부적으로 마련한 방편이었다. 이 대내외적인 정책이 긴밀하게 얽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때 생겨난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기공과 한국개발공사이다. 해외개발공사는 베트남, 독일 등으로 건설노동자, 간호사와 광부를 내보내는 일을 주관했다. 인구가 늘고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던 1960년대 노동자들의 해외 진출은 국내 취업난을 해결하고 외화 획득을 동시에 노릴 유용한 기회였다. 기공은 일종의 수입대체를 위한 회사였다. 어렵게 벌어들인 달러를 외국 기술 용역 업체에 지불하지 않기 위해 전략적으로 만들어졌다. 농업 중심 국가에서 탈피해 공업 국가로 도약하려 했던 한국에서 항만, 고속도로, 상하수도 등의 도시 인프라스트럭처와 석유 화학단지와 제철소 등 산업 시설 설계 수요는 늘어나고 있었으나 외국 기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건축이 국가의 경제 개발 계획과 낯선 동거를 시작한다.


- 전시 도록 중에서

1 Manfredo Tafuri, Architecture and Utopia: Design and Capitalist Development (Cambridge, MA: MIT Press, 1976), p. 86.

2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ume 1: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4-1944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pp. 7-8.

3 Peter Bürger,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trans. Michael Shaw (Minneapolis: Minnesota University Press, 1984), p. 22.

4 Ibid., p. 111.

5 Hal Foster, Return of the Real (Cambridge, MA: MIT Press, 1996), p. 29.

6 G. W. F. Hegel, The Encyclopaedia Logic: Part I of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ical Sciences, trans. T. F. Geraets, W. A. Suchting, and H. S. Harris (Indianapolis: Hackett, 1991), p. 125.

7 Refer to Charles Taylor, Chapter 2 in Modern Social Imaginaries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