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 현대 국가 건설의 제3의 길 / 안창모

1962년 2월 국제관광공사법이 제정되면서 광장동에 관광호텔 프로젝트가 빠르게 추진되었다. 목적은 외화벌이였다. 경제개발을 위해 달러가 필요했는데, 변변한 산업시설이 없던 한국에서 유일한 외화벌이 수단은 관광이었다. 대상은 외국인 여행객이 아니라 주한미군과 한국의 전후복구를 위해 파견된 유엔 관계자였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외화벌이가 목적인 프로젝트였기에, 워커힐프로젝트의 시설은 높은 수준의 디자인과 설비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나상진, 김희춘, 엄덕문, 김수근 등 국내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고, 건축자재와 설비 대부분이 수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조선총독부에 의해 관광진흥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적이 있다. 이때 관광산업은 경주와 수원 등 역사문화유산을 관광지화하거나, 금강산 등 경관이 빼어난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자연스럽게 역사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지에는 한국의 전통건축을 모티프로 하는 관광시설이 지어졌고, 자연유산을 관광자원으로 하는 관광지에는 북유럽풍의 관광시설로 지어졌다. 그런데 해방 후 첫 리조트시설은 워커힐호텔은 일본이나 미국령 괌에서 휴가를 보내는 주한미군과 유엔 관계자를 대상으로 했기에 일본이나 괌과 비견되는 시설을 완비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워커힐호텔은 최신의 디자인과 우리의 전통건축이 동시에 필요했다. 그 결과는 힐탑바와 더글라스 홀 그리고 한국민속관으로 나타났다.

워커힐호텔프로젝트가 보릿고개 해결과 반공을 내세우며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선택한 경제프로젝트였다면 자유센터는 반공이라는 정권의 이념을 선명하게 국내외에 드러내는 프로젝트로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성지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프로젝트였다. 이는 공산주의의 확산 방지를 제일의 정책으로 삼았던 미국을 의식한 프로젝트였다. 미국은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말까지 ‘적색공포(red scare)’의 시대로 불리는 시대였다. 위스콘신주 연방 상원의원인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에 의해 시작된 매카시즘(McCarthyism)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으로 대부분 공산주의자와 관련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직업을 잃었다. 따라서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여진이 남아있던 시절에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입장에서 쿠데타의 성공과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반공’을 이용했다. 자유센터는 자신이 반공주의자임을 선언하여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분단된 한국 현실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정책의 가시적 표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두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건축가 김수근이었다는 점이다.

자유센터를 설계한 김수근은 워커힐호텔 프로젝트에서도 힐탑바와 더글라스 홀을 디자인했다. 자유센터는 남산의 북측산록에 지어졌는데, 무장군인이 도열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기둥과 북으로 향한 뱃머리를 연상시키는 조형언어로 지어졌으며, 힐탑바는 한국전쟁 때 죽은 미국의 워커장군 이니셜(W)을 연상시키는 건축 구조를 가진 역피라미드 형상의 쇼킹한 디자인을 만들어냈으며, 더글라스홀은 구릉지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경사지 위에 곡선의 매스를 지닌 건물로 당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오스카 니마이어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두 프로젝트에서 김수근은 발주처의 목적하는 바를 조형언어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신이 정부의 정책적 의지를 가시화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인정받았고, 자신의 조형언어를 구현해줄 기술력의 확보가 필요했던 김수근은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정권의 이인자인 김종필의 지원으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 전시 도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