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 포럼 / 한국관전시추진단, 정림건축문화재단

베니스 비엔날레 2018 리서치 포럼은 한국관의 주제 '스테이트 아방가르드'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토론했던 장이다. '스테이트 아방가르드'는 50년 전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이 국가 주도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도시와 건축에 관한 꿈을 추적하려 했다.

이를 개발 독재의 부산물이나 건축가의 상상력으로 간단히 재단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라는 예술사의 문제적 개념뿐 아니라 국가와 시민사회, 정치와 건축, 탈식민 논의 등 역사적, 이론적 이슈에 대한 세심한 이해가 필요했다. 이 자리에서 만주국과 메타볼리즘, 남미와 아시아의 근대건축,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군사 정권, 중화학공업단지와 관광단지 등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통해 1960년대 한국 현대 건축의 역사적 문맥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미래를 향한 상상력이 위축된 오늘날, 우리가 더 이상 (스테이트) 아방가르드가 작동하기 어려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자각하며, 탈성장 시대의 도시 건축에서 '공공'이란 무엇인지,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아방가르드의 잔해 속에서 찾고자 했다.

1.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5), 전후 일본의 국가 건축가 – 2017.7.19

단게 겐조는 히로시마 평화공원(1949-54)을 시작으로 도쿄도청사(1952-7), 요요기 올림픽 경기장(1961-4), 오사카 만국박람회장(1967-70),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신도쿄도청사(1988-91)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대표적인 국가 건축 프로젝트를 전담하다시피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게를 전후 일본의 ‘국가 건축가’로서 칭한다면, 이는 그가 국가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건축의 설계자라서 만은 아니다. 이에 더해 전통의 현대적 의미를 고민함으로서 일본 건축의 정체성 문제를 화두로 삼았고, 건축을 넘어 도시의 제반 인프라를 제안했으며, 나아가 일본이라는 국가가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2. 주식회사 대한민국: 충주비료공장과 건축의 기술 지식 – 2017.7.26

1961년 UN과 미국 기관의 기술적, 재정적 원조로 지어진 충주비료공장은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일종의 기업-정부 협력체 모델로 등장했다. 이 산업 단지는 남한 정부가 연료, 자금, 비료를 개발 경제를 견인할 3대 요소로 내걸었던 시기에 지어졌다. 비료 산업의 창설은 과학과 기술의 합병을 이끌었고, 기술적 진보라는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쓰였다. 충주비료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인적 자원으로서의 건축가를 동원했던 일을 살펴보고, 이러한 산업 교류가 어떻게 현대 한국 건축의 전문 지식으로 열매 맺게 되었는지 추적해 보고자 한다.

3. 중남미 근대건축과 프로파간다 – 2017.8.16

중남미는 모두 식민지 국가였다가 1810년 한 두 해 사이에 독립한다.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과 국제적인 이해가 대륙을 뒤집은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국가는 군부 쿠데타와 독재를 경험한다. 치명적인 독재 국체는 예술가들에게 프로파간다를 요구하거나, 아니 오히려,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에 처신한다. 누구는 국민건축가가 되고, 누구는 정치예술을 하지만, 한편 그것이 중남미 근대 건축의 지역성을 양생하고 있었다.

비록 1세기 반 정도 시차가 있지만, 우리나라와 참 닮았다. 대개 이들 건축은 고전적이거나, 노출 콘크리트의 야성을 즐기거나, 근육질의 형태이거나, 마니에리스모Manierismo의 양태가 그러하다.

4. 만주철도, 만주국을 달리다 – 2017.8.30

‘만주란 과연 어떤 곳일까? 왜 일본제국은 그토록 만주로 진출하고자 했으며,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은 만주로 향했을까? 만주철도가 연결하는 도시들은 어떤 곳이며, 만주웨스턴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만주벌판은 어떤 풍경일 것인가?’ 같은 질문을 마음 속에 품고 떠났던 만주 답사의 소소한 기록들을 소개한다.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청나라의 각축 속에서 만주철도와 동청철도의 본거지로 형성된 근대도시 대련과 하얼빈, 그리고 일본제국이 꿈꾸었던 이상향의 도시인 만주국의 수도, 장춘의 도시 풍경을 통해, 만주라는 이름은 지워졌지만 여전히 실재하는 ‘만주 근대의 환영(幻影)’을 살펴본다.

20세기 한국에 있어 만주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1910년대에는 항일과 독립을 위해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향한, ‘디아스포라의 땅’이었고, 1930년대에는 이효석, 유진오 등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한 번쯤은 기행을 다녀오던, ‘근대의 모델’과 같은 곳이었으며, 1960년대에는 전후 한국의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에 크게 영향을 준 곳이었다. 대련과 하얼빈, 그리고 장춘을 통해 본 만주의 도시, 건축을 통해 20세기의 한국을, 20세기의 동아시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5. 근대 일본이 경험한 국제전쟁과 그 이미지화 – 2017.9.13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여러 차례의 국제전쟁을 통해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서양의 식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품던 시기부터 만주국, 대동아공영권을 잇달아 수립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민관은 각 단계마다 대량의 이미지 자료를 제작하여 배포, 판매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이 시기 일본의 민관이 국제전쟁과 세계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를 품고 또 외부에 보여주고싶어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이 강연에서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 강연자가 소장한 자료를 중심으로 살필 것이다.

6.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설계자들 – 2017.9.19

건설부와 서울시, 주택공사는 60년대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거 형태의 실험을 진행한 후 70년대 중반부터 강남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아파트 건설에 나섰다. 중화학공업 육성책과 맞짝을 이룬 듯 보이는 이 도시 개발의 행보는 제2차 오일쇼크 전후의 부동산 투기 붐으로 위기에 처했다. 과잉설비 투자, 유동성 증가, 물가 상승 등이 위기의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방수’로 등장한 이들은 경제기획원의 젊은 테크노크라트들이었다.

“박정희 키즈(kids)” 혹은 “개혁적 시장주의 그룹”으로 불리던 이 테크노크라트들은 구세대의 관료들과는 달리 거시경제의 차원에서 물가 안정 방안을 모색하면서 주거 문제의 새로운 해법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 이후, 신군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청와대와 경제부처의 요직을 맡으면서 “안정, 개방, 자율”의 모토로 내세운 경제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주도했고, 택지개발촉진법 시행부터 토지공개념 도입까지 다양한 형태로 아파트 중심의 도시개발 및 주택 건설 정책에 개입했다.

본 포럼은 군인의 군사적 시선과 건축가의 구축적 시선 아래에서 도시 주거 문제의 해결안으로 제시되었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경제 관료의 정책적 시선의 매개를 거치면서 불안정하게나마 중산층의 양산 기지로 변모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7. 김포공항, 최초의 ‘국제주의 양식’ 터미널: 파열과 봉합으로서 탈식민지 근대성 – 2017.10.25

1960년 김포에 건설된 국가 최초의 근대식 국제공항 터미널 건설이 여러 단계에 걸쳐 완공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대량 항공 운송과 공항 건물 붐이 일었다. 미국의 제트기 시대를 연 뉴욕의 새 TWA 터미널(1956-62)과 워싱턴 덜레스 터미널(1958-1962)과 같은 동시대 미국 공항들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국제주의 스타일의 근대 김포 터미널은 당시 한국의 현대성과 세련됨의 구현체로 선전되었다.

그러나 포드주의 전성기와 전후 미국 경제 호황기에 만들어진 TWA와 덜레스와는 달리, 김포 국제공항의 첫 터미널은 얼마 전 분열된 나라의 신생 정부에 막 세워졌다. 정치·경제적으로 정반대로 대립하고, 내전으로 인한 물리적 파괴와 경제적 빈곤을 겪고, 정치적 불안정성이 여전히 심각한 곳이었다.

이처럼, 아시아에서 부상하던 미 제국주의의 지표였던 김포공항의 근대성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다. 근대 김포공항의 이데올로기는 유령 같은 북한(지금은 분단 국가의 신냉전 국제주의 질서 바깥에 위치하지만)의 존재를 끊임없이 소환했고, 한국 근대성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장소로서 물질적, 담론적 생산을 이끌어내는 ‘국제주의’ 거울처럼 출몰했다.

8. 폭력건설과 국민동원 – 국토건설단 – 2017.11.1

우연히 보게 된 오래전 신문에 실린 만평 한 점과 같은 신문에 흐릿하게 게재되었던 한 장의 사진이 드러내는 시간적 간극은 고작 6개월이다. 만평이 실린 것은 1961년 12월 27일이고, 흑백사진은 1962년 5월 1일 개막한 제1회 신인예술상 사진전시회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그 6개월의 시간을 평면적인 권력과 정치 일정의 직선 위에 올려놓으면 하나는 장면 내각 시절에 해당하지만 다른 하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정권을 장악한 헌정 공백기에 자리한다.

만평과 사진은 논의의 시작이다. 넓게는 문민통치에서 군부통치로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장면이기도 하지만 좁게 보면 순수 지식인들이 가졌던 이상적 국가건설의 꿈이 국가 주도의 폭력적 건설과 국민동원으로 엉뚱하게 물길을 바꾼 사건을 증거하는 까닭에 지적 호기심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호기심은 다시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던 발터 벤야민의 언명이나 ‘폭력 수단의 합법적 독점기관이 곧 국가’라고 했던 막스 베버의 직언을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확인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붙인 포럼의 논제가 ‘국가폭력과 국민동원’이다. 사회학자 한석정은 『만주모던』을 통해 1960년대 개발 체제의 기원을 만주에 두었다. 흥미롭게도 앞서 꺼낸 삽화와 사진은 그가 언급한 1960년대의 시작점에 놓인 것들이다. 그리고 1960년대는 희생의 정당화가 당연히 묵인되었고 포용과 배제가 극한적 상황으로 치닫던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목도한다.

논의와 발언의 시작은 물론 한 점의 삽화와 흑백 사진 한 장이다. 이들이 직설적으로 드러낸 ‘국토건설 과업’과 ‘국토건설단 설치’의 당위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는 논의의 몸통이다. 하지만 그것의 뿌리가 무엇이며,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다시 현실세계에 등장한 풍경을 목도했다는 기억은 다시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그리고 묻는다. 국가란 무엇인가?

9. 울산공업센터 지정요인과 개발과정 – 2017.11.7

1962년 울산공업센터 지정요인과 그 후의 개발과정을 되짚어 본다. 울산은 천연양항(天然良港)의 조건을 갖춘 울산만이 있어서 일찍부터 항구도시로 개발되었다. 신석기시대 것으로 알려진 반구대 암각화의 배 그림, 신라 건국보다 앞서는 북구 달천의 철 생산, 통일신라 시대 국가 항구로 알려진 중구 반구동의 계변성은 포구도시로 성장해 온 울산의 상징이다. 고려 말 이후 지속적으로 축성된 울산 좌병영성, 울산 좌수영성, 유포석보, 울산읍성, 언양읍성, 서생포만호진과 선소는 울산이 왜로 대표되는 해양세력 방어의 전초기지였음을 웅변한다.

그리고 1943년에 기공된 울산항 창설과 연락기지공사는 일본제국이 울산을 대륙침략 병참기지로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일제강점기의 울산개발 청사진은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안경모 울산개발계획본부장의 만남에 의해 대한민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변용되었다. 두 사건 모두 울산이 개발대상지였지만 개발 목적은 각각 ‘전쟁승리’와 ‘겨레의 빈곤탈출’에 있었다. 5.16 정부가 울산을 공업기지로 선택한 요인은 우수한 항만입지조건은 물론, 일본제국이 남긴 임해공단계획과 수백만평의 적산토지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주도로 급격하게 추진된 울산공업센터 개발은 이 도시를 국가 경제발전의 마중물 역할에 충실한 공업기지로 만들었고, 국가 산업단지 개발의 거대한 실험장 역할을 요구했다. 2017년은 공업센터 개발 55주년, 광역시 승격 20주년이 되는 해지만 공업화 외길을 걸어온 울산은 공업지역 면적이 주거지역과 상업지역 면적을 합친 것 보다 넓고, 2차 산업이 3차 산업을 압도하는 기형적 도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