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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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아르코미술관 기획공모전 : Catastrophology 카타스트로폴로지
- 전시기간
- 2012.11.06~2012.11.06
- 관람료
- 오프닝
- 장소
- 작가
- 부대행사
- 주관
- 주최
- 문의
불확실성과 불안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재난`에 대해 예술이 어떻게 개입하는가를 다루는 전시. 하지만 특정한 재난을 재현하거나 재난에 대한 분석 혹은 대응방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재난의 경험이 어떻게 미시적 차원에서 세계를 접하는 우리의 감각을 바꾸어놓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전시이다.
우연히 들이닥치는 폭력적인 힘에 의해 현실의 범주와 안전한 인과관계의 틀이 무너지는 것을 재난이라고 부른다면,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재난에 맞닥뜨리고 있다. 몇 달 전 미국의 한 영화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에서, 관객들은 순간 영화 속의 총소리와 실제의 총소리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관객이 보고 있던 영화 그 자체가 거대한 재난과 공포를 다룬 것이었음을 상기해볼 때, 우리는 허구와 현실의 안전한 테두리가 붕괴했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물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리는 재난의 당사자나 희생자가 아니라 목격자 혹은 구경꾼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삶의 위치에서 죽음의 위치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재난과 죽음은 도처에서 우리를 찾아내고 우리를 엄습한다. 재난의 재현과 재난 그 자체의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좁혀진 시대에 살기에, 우리 생존자들과 죽은 이들 사이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다. 일상과 재난의 경계선은 무너져가고 있다.
현대 사회의 재난은 단 한 번에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버리는 총체적 충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삶 속으로 스며들고 삶 자체와 공존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오늘날 재난은 잡음, 물리적 충격, 형체 없는 덩어리들로 우리에게 몰려온다. 소리도 냄새도 색깔도 없기에 도무지 대응책이 가늠되지 않는 방사능, 미처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퍼져나가는 전지구적 전염병, 이제 이상기후란 말을 붙이는 게 더 이상한 지경이 되어버린 기후변화, 가장 진부한 일상의 무대인 영화관, 지하철, 학교에서 일어나는 돌연한 폭력...
재난이 이토록 자주, 이토록 가깝게 경험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마주치는 미디어의 생생한 이미지들과 인터넷을 통해 퍼지는 소식들이 우리의 육체를 재난의 현장으로 시차 없이 옮겨놓기 때문일 것이다. 상당수의 사건들이 우리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피부로 느껴지는 재난의 생생한 감각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통신의 발달과 고화질 미디어의 발달은 거리를 소멸시키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붕괴시킨다. 뉴스의 영상들, 인터넷의 글자들은 이미 우리의 두뇌가 아니라 신경세포에, 피부에 각인된다.
‘재난학’이라는 신조어를 제목으로 삼은 이 전시 <카타스트로폴로지>는 재난의 대책을 제시하거나 정치적 책임 소재를 묻고자 기획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다른 분야에서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예술의 역할은 좀 다른 곳에 있다. 이 전시의 초점은 일상과 공존하는 현대의 재난이 어떻게 우리의 감각을 미시적 차원에서 바꾸어놓았는가를 동시대 미술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은 일상에 도래한 균열과 심연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환상 없이 우리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미하이 그레쿠, 헤르만 콜겐, 료이치 구로카와, 박자현, 손정은, 송진희. 이 여섯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수행한다. 퍼포먼스, 영상, 설치, 회화라는 다양한 장르에서 작업하지만 이 작가들은 미세한 극소감각에 집중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나 불편함의 느낌을 다룬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이들이 다루는 이미지나 오브제들은 그 어떤 것의 기호나 상징이 아니라 육체에 흔적을 남기는 물리적 진동이며 피부에 충격을 주는 촉각적인 사건이다. 이들의 작업은 특정한 재난이나 사건을 명시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미세한 감각의 뒤틀림을 사물이나 이미지의 존재감 그 자체만으로 어떠한 설명도 없이 보여주는 쪽에 속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이 작품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틀 그 자체를 의문시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차원과 맞닿아 있다.
박자현 일상인 _ 2011 _ 120x162cm _ 종이에 펜
‘재난’이라는 단어가 ‘사고’라는 단어보다 더 파괴적이고 두려운 느낌을 주는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의 죽음이나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의 붕괴를 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후쿠시마에서 온 경악스러운 영상과 사진들은 우리에게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좌표의 상실과 상식적인 인과관계의 종말을 경험하게 했다. 장난감처럼 팽개쳐져 있는 비행기들, 육지에 난파한 거대한 배의 사진은 우리 지각의 기준점을 붕괴시켰다. 원전에서 흘러나온 방사능 물질 중 가장 치명적인 플루토늄의 반감기가 2만년이라는 말을 들으며, 우리는 그 시간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의 삶과 상상력 훨씬 너머에 있다는 사실에 망연해졌다.
손정은 하느님의 만나, 아버지의 젖, 어머니의 정액 _ 혼합매체 _ 가변크기 _ 2012
우연히 들이닥치는 폭력적인 힘에 의해 현실의 범주와 안전한 인과관계의 틀이 무너지는 것을 재난이라고 부른다면,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재난에 맞닥뜨리고 있다. 몇 달 전 미국의 한 영화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에서, 관객들은 순간 영화 속의 총소리와 실제의 총소리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관객이 보고 있던 영화 그 자체가 거대한 재난과 공포를 다룬 것이었음을 상기해볼 때, 우리는 허구와 현실의 안전한 테두리가 붕괴했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물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리는 재난의 당사자나 희생자가 아니라 목격자 혹은 구경꾼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삶의 위치에서 죽음의 위치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재난과 죽음은 도처에서 우리를 찾아내고 우리를 엄습한다. 재난의 재현과 재난 그 자체의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좁혀진 시대에 살기에, 우리 생존자들과 죽은 이들 사이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다. 일상과 재난의 경계선은 무너져가고 있다.
송진희 Eat_into _ single channel video _ 08:00 _ 2011
현대 사회의 재난은 단 한 번에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버리는 총체적 충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삶 속으로 스며들고 삶 자체와 공존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오늘날 재난은 잡음, 물리적 충격, 형체 없는 덩어리들로 우리에게 몰려온다. 소리도 냄새도 색깔도 없기에 도무지 대응책이 가늠되지 않는 방사능, 미처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퍼져나가는 전지구적 전염병, 이제 이상기후란 말을 붙이는 게 더 이상한 지경이 되어버린 기후변화, 가장 진부한 일상의 무대인 영화관, 지하철, 학교에서 일어나는 돌연한 폭력...
재난이 이토록 자주, 이토록 가깝게 경험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마주치는 미디어의 생생한 이미지들과 인터넷을 통해 퍼지는 소식들이 우리의 육체를 재난의 현장으로 시차 없이 옮겨놓기 때문일 것이다. 상당수의 사건들이 우리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피부로 느껴지는 재난의 생생한 감각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통신의 발달과 고화질 미디어의 발달은 거리를 소멸시키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붕괴시킨다. 뉴스의 영상들, 인터넷의 글자들은 이미 우리의 두뇌가 아니라 신경세포에, 피부에 각인된다.
Herman Kolgen Dust Restriction _ Video Installation _ Dimention Variable _ 2012
‘재난학’이라는 신조어를 제목으로 삼은 이 전시 <카타스트로폴로지>는 재난의 대책을 제시하거나 정치적 책임 소재를 묻고자 기획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다른 분야에서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예술의 역할은 좀 다른 곳에 있다. 이 전시의 초점은 일상과 공존하는 현대의 재난이 어떻게 우리의 감각을 미시적 차원에서 바꾸어놓았는가를 동시대 미술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은 일상에 도래한 균열과 심연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환상 없이 우리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Mihai Grecu Iridium _ single channel video _ 04:16 _ 2006
미하이 그레쿠, 헤르만 콜겐, 료이치 구로카와, 박자현, 손정은, 송진희. 이 여섯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수행한다. 퍼포먼스, 영상, 설치, 회화라는 다양한 장르에서 작업하지만 이 작가들은 미세한 극소감각에 집중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나 불편함의 느낌을 다룬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이들이 다루는 이미지나 오브제들은 그 어떤 것의 기호나 상징이 아니라 육체에 흔적을 남기는 물리적 진동이며 피부에 충격을 주는 촉각적인 사건이다. 이들의 작업은 특정한 재난이나 사건을 명시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미세한 감각의 뒤틀림을 사물이나 이미지의 존재감 그 자체만으로 어떠한 설명도 없이 보여주는 쪽에 속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이 작품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틀 그 자체를 의문시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차원과 맞닿아 있다.
Ryoichi Kurokawa Ground _ 3.1 channel video installation _ 12:00min _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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