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플/다이얼로그"에서 강익중이 보여준 수천 점의ㅣ 그림은 지난 10년 간의 작업을 총망라한 것이다. {{.1997년 이후 뉴욕 휘트니 미술관 소장.}} 거기에는 삶과 죽음의 의미,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역할 등의 범우주적 문제 뿐 아니라 신체의 기능이나 뉴욕미수례의 편협성 등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의 다양한 개인적인 집착 및 환타지가 나타나 있다. 그는 격억, 만화 이미지, 일상적인 오브제 등을 캔버스 표면에 콜라지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는 초기 뉴욕 시절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이제는 지하철 내부가 아니라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에 있는 자그마한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데, 첼시 지역의 집에서 스튜디오까지 매일 걸어다니면서 보고 듣거나 생각한 것 등이 작품에 자주 반영되곤 한다.
"멀티플/다이얼로그"전시 작품가운데에는 지금은 없어진 투투로 갤러리에서 1986년 가졌던 그의 첫 뉴욕 전시회 당시 작품도 들어있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작가가 갤러리 한가운데에 설치한 텐트 속에 앉아 매일 10시간씩 그림을 그리면서 완성되는 대로 벽에 걸었다. 그는 1개월 동안 계속된 이 "생활"퍼포먼스 기간 중, 무려 1천 점에 이르는 작품을 제작했다. 1988년에는 6천점의 그림을 규칙적인 격자 형태로 브로드웨이 윈도우에 설치했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음향 요소를 도입한 "사운드 페인팅"을 몬클레어 칼리지에서 전시했다. 전시 작품 7천점 가운데 2천개의 캔버스 뒤에 소형 스피커를 장착시켜 바다, 천둥, 바람 소리 등의 음향효과가 나게 했는데 이는 저농적인 한국 풍경화의 기본 요소인 물, 구름, 나무 등에 상응하는 것이다.
강익중은 1991년 목판 시리즈를 시작했다. {{.1996년 이후 로스엔젤레스 현대미술관 소장.}} 이는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미술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당시 당뇨병으로 시력을 잃은 고국의 부친에게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그의 목판 작품은 길을 걷다가 그린 스케치 등을 바타으로 한 그날 그날의 일상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목판 작업은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인내와 정신잡중을 요구하는 고된 일이다. 작가는 목판 작업을 "아이디어를 청도응로 주조하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제작시간이 더 많이 드는 대신 보다 영구적인 재료에 아이디어를 담아둔다는 의미에서다. 목판작업에 나타난 불변성에의 감각은 "멀티플/다이얼로그"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9천4백 개의 목판이 빽빽하게 걸린 조그만 갤러리 공간은 차분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이는 백남준의 1993년도 작품 "새장 속의 케이지(Cage in Cage)"를 둘러싼 또 하나의 새장 역할을 했다. 전시장 내의 고요함은, 새장 속에 나란히 놓인 9개의 소형 모니터속에서 연주하고 있는 존 케이지의 이미지를 감싸는 장막과도 같았다.1992년도의 드로잉 시리즈에서는 이미지 대신 전적으로 낱말만을 사용했다. 주로 GRE 시험 가이드북에서 따온 영어 단어 및 문구는 붉은 색, 한글 문구는 푸른색으로 칠했는데 이러한 색채 배합은 흰 바탕의 그래프 용지와 더불어 미국의 성조기를 연상시키는 효과를 낸다. 이 드로잉들은 낯선 언어를 대할 때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언어의 물질성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낯선 외국어는 아이디어에의 접근을 가로막는 막강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쓰는 곳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일이다.
"영어를 배우는 부처"는 1992~94년 시기의 시리즈 그림으로, 동양 미술의 도상(圖像)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다른 작품과 구별된다. 어린 시절에 사찰(寺刹)에 갔던 기억을 바탕으로 묘사한 좌불상의 이미지가 잡지, 책, 신문 등에서 골라낸 영어 구절들을 암송하는 작가의 음성 녹음과 어우러지는데 여기에서 정확한 발음 구사를 위해 큰 소리로 읽기 연습을 하는 부처의 모습은 강익중 자신과 동일시된다. 또한 이미지와 언어의 병치를 통해, 동양 문화의 상징으로서 서양 문화의 상징으로서 서양 문화를 향해 열려진 태도를 보이는 부처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도 작가 자신을 반영한 것이다.
2만점의 그림을 한데 모은 "멀티플/다이얼로그"에서와 같이, 강익중은 항상 엄청난 숫자의 그림과 목판들을 벽에 격자 무늬로 정교하게 배열한다. 그런데 매번 이렇게 새로 설치할 때마다, 그림에 나타난 그의 이야기는 재편집된다. 즉, 동일한 전시가 반복되는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거대하고 획일적인 격자 형식에 맞춰, 스쳐 지나가는 삶의 순간들의 기록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띠고 특정한 순서 없이 임의로 배치된다. 이렇게 재배치된 그림들은 상하좌우에 근접한 그림이나 삽입된 음향의 내용에 따라 새로운 맥락을 갖게 된다.
"멀티플/다이얼로그"이후, 그의 작품은 현재적 시·공간의 단단한 지반을 떠나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미군과 초콜릿을 상징물로 사용한 1996년의 설치 전시 "8490일간의 기억"은 작가와 미국 문화와의 첫 대면을 암시한다.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당시의 서울에서 자란 그는 미군 본부가 위치한 이태원동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친구들과 함께 미군 본부 정문 앞에 가서 지프차를 타고 지나가는 미군들이 주는 초콜릿과 캔디를 받기 위해 앞을 다투곤 했다. 전쟁 후 가난했던 당시로서는 초콜릿이 매우 특별한 것이었고 그 달콤한 맛과 향기는 미국에 대한 환상에의 초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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